실존주의자로 사는 법
게리 콕스 지음, 지여울 옮김 / 황소걸음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달쯤 전 일이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데, 뒤이어 들어온 젊은 남자 둘이 내 옆 탁자에 앉았다. 둘이 계속 대화를 주고받는데, 바로 옆이다 보니 듣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들렸다. 밥 먹기에 집중해보기도 하고, 딴생각을 열심히 해보기도 했는데, 그들의 대화는 자꾸만 내 공상을 비집고 들어왔다. 음악을 하는 친구들 같았다. 한쪽은 20대 중후반, 한쪽은 20대 초반 같았다. 나이 차가 별로 안나 보이는데, 어린 쪽이 다른 쪽을 굉장히 깍듯하게 대했다. 좀 더 나이 많은 쪽이 이런저런 경험담과 조언을 들려주는 듯했다.

 

 

 

그러다 한 문장이 내 마음을 파고들어 왔다. "단 한 번의 후회도 하지 않을 자신 있어?" 아직 대학을 다니고 있는 친구가 공부보다는 음악을 선택하려 한다고 말했을 때, 선배로 보이는 친구가 했던 말이다. 그 친구는 후배가 이 어렵고, 배고픈 길을 선택한 것이 안타까운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확실한 각오를 하고 시작하길 바라는 것일까? 표현은 달랐지만, 가끔 후배 활동가들과 상담을 하게 되면 나도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진정으로 네가 원하는 것이 뭔지 고민하고, 네 의지가 확고하다면 그 길로 가라!" 그리고 내 경험담을 들려주곤 했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생이 된 후, 선후배들의 요청에도 나는 학생회 활동을 중단했다. 운동권 집단 내부의 권력싸움, 패거리 문화 등이 지긋지긋했다. 그러자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늘 선후배들과 어울려 다녔는데, 이제 혼자 있는 때가 많아졌다. 읽고 싶었던 책들도 찾아 읽고, 공부도 많이 해야지 결의를 다졌다. 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어려운 철학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지만, 유독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만은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냥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당시에 내가 생각한 실존주의는 그런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강에 집어 던지려고 집어든 돌멩이 하나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한 것처럼, 자연의 모든 구성원은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두 거기에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인공물로 채워가는 행위가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환경운동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자연스럽게 활동가가 되었다.

 

 

 

과연 나는 단 한 번의 후회도 없었을까? 한때 내게 상담을 요청하곤 했던 후배 활동가들은 과연 이런저런 갈등과 고민들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을까? 가족의 반대와 경제적인 어려움, 단체나 조직 내에서의 갈등, 진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 개인이나 단체의 전망에 대한 생각들 등등 수많은 고민거리가 쉴 새 없이 던져졌다.

 

 

 

결국, 나는 직업활동가를 그만두고 직장인이 되는 선택을 했지만, 활동가의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후회도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활동했던 단체에 대해서는 후회와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활동가를 그만둔 것도 사실 결혼이나 육아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등의 개인적인 사정이 아닌 단체 활동에서 전망을 찾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야기가 좀 많이 옆으로 새버렸는데, 저 위에서 "단 한 번의 후회도 하지 않을 자신 있어?" 라는 질문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을 무렵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실존주의 철학 안내서이자 진정한 의미의 자기 계발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기존의 딱딱한 철학책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저자의 발랄하면서도 당돌한 어투는(이 책은 저자가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읽힌다.) 철학이라는 학문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쉽게 읽을 수 있다.

 

 

 

실존주의라는 조금은 무겁고, 조금은 어려운 주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기존 철학책들처럼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을 또 다른 어려운 단어들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의 예를 들어가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물론 아무리 쉬운 설명이라 해도, 그 설명을 제대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하긴 하다. 어쨌거나 이 책 덕분에 오랜만에 실존주의에 대한 내 오랜 관심과 열정을 다시 한번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무렵, 대학 후배가 서울로 찾아왔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우린 그닥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후배는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나 역시 몇 가지 어려운 상황과 고민으로 맘이 편치 않았다. 헤어질 때 후배 녀석이 말했다.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소. 힘내이소!" 애써 웃음을 보이며 말하는 녀석에게 나도 비슷한 말을 돌려줬다.

 

 

 

실존주의는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지독할 정도로 솔직한 철학이다.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이 말인 듯하다. 실존주의자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허무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자신의 삶의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반허무주의자이기도 하다. 나 역시 실존주의자로서 어렵고 힘든 상황에 헛된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더 힘들어하고 또 괴로워하지만, 나 자신과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리라 생각한다. 힘든 시기에 좋은 책 한 권을 만난 것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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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8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2-11-2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궁금합니다. 과연 식사는 제대로 하셨을지요. 식사중이셨으니까요.

감은빛 2012-11-28 19:01   좋아요 0 | URL
아, 시간이 좀 지나서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좀 불편하게 먹었던 것 같아요.

제 식사를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비로그인 2012-11-28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점점 느끼게 되는거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12-11-28 19:0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노력하는 태도를 갖는 것만으로도 제법 이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2012-11-29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9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11-2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어져요...
그 말을 했던 사람에게요. ^^

당연히 후회하고 반성하고 발전하고, 후회하지 않는 삶은 모험이 없는 삶인거 같고.
실존주의.... 현재를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 네 저도 실존주의자인지라.

감은빛 2012-11-29 12:43   좋아요 0 | URL
음, 글쎄요.
후회라는 단어에 대한 체감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결의를 갖고 시작해야 된다고 받아들였어요.
나중에 결국 후회할 날이 있을지라도 시작할 때만큼은,
그런 일은 없을거야 라는 각오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달여우님도 실존주의자였군요.
언제 한 잔 기울이면서 실존주의에 대해 논해볼까요? ^^

마태우스 2012-12-0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회 얘기를 하시니 제 얘기가 하고 싶어지네요. 저는 기생충학을 택할 때 별다른 고민없이 선택을 했어요. 임상을 택한 친구들에 비하면 그리 넉넉한 삶을 살지 못할 거였지만, 그래도 기생충이 좋았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네요 벌써... 그간 한번도 후회를 안했다면 거짓말 같지만, 진짜로 전 후회를 안했지요. 친구들보다 금전적으론 넉넉치 못하지만 그만큼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그 넉넉치 못하단 것도 우리 사회 기준으로 보면 상위에 있을 것 같아서 후회를 안한 측면도 있지요. 음악과 비교하기엔 적절치 않았네요 그러고보니깐.

감은빛 2012-12-04 11:25   좋아요 0 | URL
네, 마태우스님께서는 정말 후회 안하셨을 것 같아요.
음악, 미술, 체육 이런 쪽은 이 나라에서 정말 먹고 살기 힘들죠.
글쟁이도 그 못지않게 배고픈 쪽이구요.
저는 그보다 더 배고픈 사회운동 쪽에 있었구요. -_-;;

그치만 그런 비교보다는 각자의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선택.
그 얘길 하고 싶었던 것이니
마태우스님의 말씀이 적절치 않은 것은 아니예요.
저는 마태우스님 이야기를 알게되어 좋네요! ^^

마태우스 2012-12-04 12:14   좋아요 0 | URL
직업활동가 정말 힘들죠. 일은 많고,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는 요즘같은 시대에 그 바쁨이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다보면 중간에 회의도 들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꾸준히 일하시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신 거죠. 많은 걸 생각하게 되는 글이네요

페크pek0501 2012-12-04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제부터인가 헛된 희망을 품지 않게 돼 버렸는데, 그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삶이란 그저 그런 시시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일상을 반복하다가 죽는 거죠.ㅋㅋ
그냥 인간이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라고 생각해요.

"나 자신과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리라 생각한다."
- 이 말이 꽂히는군요. 요즘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실감하는
일이 있었거든요. ^^

저, 첫 방문이어요!!!!!!!!

페크pek0501 2012-12-04 16:59   좋아요 0 | URL
아니, 첫 방문이 아니라 첫 댓글이어요.ㅋ

감은빛 2012-12-05 13:5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첫 댓글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억해두겠습니다! ^^

'삶의 의미'에 대해 어려서부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여전히 그 고민은 계속되고 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삶은 그냥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죠.
그것만 알게 되어도 큰 깨달음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 페크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분이신 듯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