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올빼미
아무래도 나는 야행성동물인가봐. 아무리 피곤해도 12시만 넘어가면 왜 잠이 오지 않는 걸까? 내 불면의 역사를 돌아보려면 시간을 아주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아마도 열살이 채 되기도 전이었던 같아. 요 앞에 빌 브라이슨의 책에 대한 서평에도 썼지만, 이때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서 다른 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래서 밤마다 맘껏 책을 읽을 수 있었어. 같은 방을 쓰던 여동생은 쉽게 잠드는 편이었고, 한번 자면 탱크가 지나가도 깨지 않는 아이였지. 나는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하며 밤마다 책을 읽곤 했어.
'올빼미' 이건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별명이었어. 부모님이 보시기에 나는 참 징그럽게도 잠을 안자는 아이였을거야. 그리고 이제는 징그럽게 잠을 안자는 어른이 되어버렸지. 아버지는 단순히 대표적인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나를 '올빼미'라고 불렀을거야. 아마도, 그런데 올빼미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를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것도 아셨을까?
둘. 술 한잔
혼자 살 때, 잠이 안오면 소주를 한병 사들고 들어와, 담배 연기를 안주삼아 홀짝거리곤 했어. 술과 담배와 음악과 책이 긴 불면의 밤을 함께 해준 동무들이었지. 혼자 마신 술이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안주가 없어서 그랬을까. 한병만 마셔도 취해서 잠들곤 했는데, 이상하게 밖에서 누군가와 마실때는 두 병 이상을 마셔도 취하질 않아. 게다가 적당히 마시고 들어온 날엔 오히려 더 잠을 못자게 돼. 밤새 이런저런 감정에 취해 뭔가를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날이 밝아버려. 젠장. 이제서야 피곤해지는 건 또 뭐야. 출근은 어떻게 하라구!
함께 일해보자는 사람과 술을 한잔 했어. 한 달전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정중히 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분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나봐. 한번 더 나를 불러내더니, 세 병째의 소주를 거의 비워갈때쯤 조심스럽게 다시 물어보더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아, 난 이런거 참 싫어하고, 잘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분이 오해하지 않도록, 내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애써 설명한 보람도 없이, 그분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지금까지 마신 술이 아깝게도 정신이 확 들어버렸어. 젠장 그리고 이 시간까지 잠을 못자고 이러고 있어. 아침이면 먼 길을 운전 해서 가야하는데 말야.
셋. 목소리
결혼 후 아내의 책들과 내 책들이 합쳐졌을 때, 겹치는 책은 별로 없었다. 우린 독서 취향이 좀 많이 달랐다. 몇 안되는 겹치는 책들 중에 눈에 띄는 책은 배수아의 <내안에 남자가 숨어있다>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 트리거 포인트라는 말이 나온다. 끌리는 점이라는 뜻으로 풀 수 있으려나. 배수아는 누구나 사람을 볼때 가장 먼저 보는 부위가 이 트리거 포인트라고 말하는데, 내 경우에는 시각적 요소보다는(물론 시각적 요소도 아주 중요할 때가 있지만!) 목소리에 종종 끌리곤 한다.
차분한 목소리, 맑은 목소리, 밝고 명랑한 목소리, 가녀린 목소리. 나는 유독 목소리에 잘 빠져들었다. <허니와 클로버>라는 애니를 보면 한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옆 사람이 관찰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단번에 사랑에 빠져버린 순간이 있는데, 아마 평생 이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월드 뮤직 어워드'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뚜뚜루뚜~ 뚜뚜루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크랜베리스'의 돌로레스 오리어던이었다.
며칠 전 놀랄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살면서 워낙 적을 많이 만들어왔던 터라, 페이스북 가입을 많이 망설였는데, 업무 특성상 페이스북을 꼭 알아야 했기에 가입을 했다. 본명이 아닌 '감은빛'이란 필명으로. 최근의 인간관계 위주로 친구를 만들면서 눈팅을 하곤 했는데, 페이스북이 추천하는 사람 명단에 익숙한 이름이 하나 있었다. 아주 흔한 이름이기에 설마했다. 그냥 무시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손은 어느새 그 이름을 클릭해버렸다. 프로필에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사진도 없었다. 그 녀석이 맞는지 아닌지 알수 없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러고는 그냥 잊어버렸다. 며칠이 지나서 다시 그 이름을 마주쳤다. 프로필 사진이 없는 걸 보니, 지난번에 마주친 그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설마 그 녀석은 아닐꺼야. 녀석과 나는 매칭되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 학교도 하나도 안 겹치고, 관심사도 안겹친다. 인간관계도 하나도 연결되어있지 않다. 심지어 나는 본명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페이스북이 어떻게 알고 녀석을 나에게 추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다시 한번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클릭했다. 여전히 정보는 등록되어있지 않았지만, 그새 친구가 늘어 있었고, 그 사람의 친구 목록에서 또 하나의 익숙한 이름을 찾아냈다. 녀석의 친구였다. 절대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성조차도 아주 희귀한 성씨였다. 게다가 프로필 사진은 바로 녀석의 친구가 맞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바로 그 녀석의 페이스북에 들어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담벼락을 클릭해보니, 등록된 사진이 하나 있었다. 그 녀석이었다.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녀석을 알게된 건 채팅을 통해서였다. 맡고 있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무척 우울한 날이었다. 기분전환을 하려고 온라인에 접속하여 문학동호회에 들어갔다. 그 동호회는 채팅을 위주로 운영되는 모 사이트에 속해있었다. 동호회에 들어가서 게시판을 살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누군가가 쪽지를 건넸다.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안나지만, 나는 그냥 호기심에 낯선이의 대화를 받아주었다. 몇 마디 주고받던 말들이 점점 더 호기심을 키워서 결국 그 사람과 채팅을 이어갔다. 아주 낯선 경험이었다.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낯선 이와 무려 다섯시간 동안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너무 오래 채팅을 했기 때문에 눈도 아프고, 손목도 아팠다. 어깨도, 허리도 모두 뻐근했다. 이제 그만 대화를 중단하려했는데, 그쪽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했다.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나는 별 감정이 없었다. 그냥 온라인에서 낯선 여성이 대화를 걸어오니, 응했을 뿐이고, 적당한 과장과 가식을 담은 대화를 이어갔을 뿐이다. 물론 좀 재밌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그건 다만 낯선 여성에 대한 호기심 이상은 아니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그 여성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전화통화는 밤새 이어져서 다시 다섯시간동안 우린 대화를 나눴다. 손가락으로 다섯시간, 그리고 목소리로 다섯시간. 우연히 받은 쪽지 하나가 무려 열시간동안 우리를 붙잡아놓았고, 결국 우린 사귀기로 결정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었다.(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날 바로 얼굴을 확인했고, 아마도 그 이후에 사귀기로 결정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독특한 인연이었기에, 녀석의 사진을 페이스북에서 만났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녀석과의 시간들이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머리속에서 재생되었다. 아, 난 이런 기분으론 도저히 일을 못하겠어! 컴퓨터를 꺼버리고 무작정 사무실을 나섰다. 골목길을 따라 근처를 걸었다. 어떻게 페이스북이 그 녀석을 나에게 추천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한참동안 무작정 골목을 거닐다가 돌아왔다. 페이스북 정말 무섭다. 본명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옛 애인을 찾아주다니! 이러다가 수많은 옛 애인들을 하나하나 찾게 되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난다. 제발, 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제발!
한가지 묘한 건, 당시에는 참 좋아했던 녀석의 목소리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 나를 사로잡은 강력한 마력의 목소리는 세 개다. 각각 독특한 개성이 담긴 우리집 세 여우의 목소리들. 이 밤,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