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복 팬티
공장 탈의실 옷걸이에 낡은 깃발처럼 걸린 누런
팬티는, 주조 공장 성철이 일할 때 갈아입는 작업복
팬티다. 새 팬티 입으나 누런 팬티 입으나 공장에
들어가자마자 쇳가루 흙먼지투성이 될 게 뻔하다
고, 자주 빨아도 아무 소용 없다고, 아무렇게나 걸
어 둔 성철이 작업복 팬티다. "성철아, 그래도 불알
과 자지는 쇳가루 흙먼지 못 들어가게 잘 닫아 둬
라. 사용자 잘 만나서 토끼 같은 새끼도 낳아야 하
고······." 아침부터 누런 팬티 하나 쳐다보며, 우린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고 또 웃어도 마음이 아프다.
서정홍 / 58년 개띠 / 보리
내게도 작업복 팬티가 있었다. 흔히 노가다 혹은 막노동이라고 말하는 건설현장에서 그날그날 일을 할 때였다. 대학 다닐때 용돈이나 좀 벌어버려고 친구 따라 한두번 갔던 이후로 혼자 살면서 생활비가 딱 떨어져서 라면 하나, 담배 한 갑 살 돈 조차 없어지면 며칠씩 막노동을 해서 밥 값을 벌어오기도 했다. 대게 막노동을 하는 아저씨들은 새벽에 집을 나올때부터 허름한 옷에 다 떨어져가는 운동화를 신고 오기도 하지만 비교적 젊은 층의 사람들은 작업복과 신발을 따로 가방에 넣어와서 현장에서 갈아입었다. 물론 여름에는 너도 나도 여벌옷을 두세벌씩 갖고 다닌다.
혼자 살면서 세탁기도 없어서 일주일에 한번씩 몰아서 빨래를 하곤 했는데, 손빨래를 두시간씩 하고나면 기진맥진하곤 했다. 빨래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옛날 마을 빨래터에 아낙들이 모여서 빨래를 하면서 서방 흉보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던 심정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암튼 빨래가 귀찮았던 나는 어떻게든 빨래를 줄이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했다. 막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옷이 정말 더러워진다. 그냥 더러워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옷이 빨리 상해서 오래입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유행이 한참 지나서 더이상 안 입는 옷, 오래 입어서 아주 낡은 옷 등이 작업복으로 선택된다. 이건 속옷의 경우도 마찬가진데, 일을 하고 오면 속옷도 평소보다 훨씬 더 더러워지고 빨리 상한다.(아마도 소금기가 많은 땀에 푹 절어 있어서?) 시인이 잘 표현했듯이 깨끗이 빨아도 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막노동을 나갈때만 입는 팬티를 낡은 것들 위주로 서너벌 정해놓고 입었다. 이른바 작업복 팬티인 것이다. 나는 성철이처럼 아예 빨지 않은 것은 아니고 서너벌을 갖고 교대로 입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훈련 나가서 일주일씩 속옷을 안갈아입고 버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본인이 그런 적이 한번도 없다면 적어도 그런 경우를 보거나 얘기를 들은 적은 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나는 유난히 팬티를 자주 잃어 버렸는데, 빨아서 널어놓으면 없어지곤 해서 처음에 7벌을 보급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 데, 자대에 배치 받은 이후로 3벌 이상을 갖고 있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상병을 달고 두어달 쯤 지나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만 하게 되었을 때, 무슨 훈련을 나가게 되었는데, 일주일을 야외에서 보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내가 가진 팬티가 단 두벌 뿐이었다. 하나는 입고 하나는 여벌로 군장속에 챙겨넣고 훈련을 떠났다. 훈련중에는 빨래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팬티를 갈아입을 수가 없었다. 여벌이 하나 밖에 없으니 한번 갈아입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훈련 중에 입을 것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부대 복귀후에 빨래를 하고 마를 동안 입을 것도 고려해야 했다. 훈련중에야 더러운 팬티를 입고 있어도 원래 훈련 중에는 그런 것이니 참을 수 있지만, 부대로 복귀한 이후에도 더러운 팬티를 입고 있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되도록이면 비교적 덜 더러운 상태의 팬티를 입고 복귀하고 싶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처음 입었던 팬티로 최대한 버텨야 했다. 3일인가 지났을 때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지금 갈아입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뒤집어 입는 것으로 스스로와 타협을 하고 하루나 이틀만 더 버티기로 했다. 5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정말 갈아입고 싶은 욕구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부대 복귀 행군은 죽을 만큼 힘들게 뻔했고, 그때 (땀때문에)팬티가 굉장히 더러워질 게 분명했다. 하루만 더 버티면 복귀 행군을 시작할 것이다. 이틀만 더 버티면 부대로 돌아가서 깨끗한 팬티를 입고 잘 수 있었다. 그날 낮잠을 잘 때 팬티를 벗어서 햇빛이 잘 드는 나무가지에 걸쳐 놓았다. 한시간쯤 후에 깨어나서 쨍쨍 내리쬐는 햇살에 빠짝 말라서 살균까지 된 뽀송뽀송한 팬티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렇게해서 복귀 할때까지 일주일 동안 팬티를 한번도 갈아입지 않고 단 한벌로 계속 버텼다. 햇빛에 말리는 방법은 도저히 팬티를 입고 잘 수 없어서 그냥 한번 벗어서 널어놓았을 뿐인데, 의외로 효과가 굉장했다. 그래서 다음번부터 훈련때마다 그 방법을 이용하게 되었다. 뒤집어입기와 햇빛에 말리기만 적절히 잘 이용하면 훈련내내 비가 오거나 눈이 오지 않는 한은 오랫동안 팬티를 갈아입지 않고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아마 여자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일 것이다. 만약 아내가 결혼 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나는 아직도 혼자 살고 있지 않았을까?

※ 예전 블로그의 글을 살짝 다듬어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