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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독서 - 책을 읽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ㅣ 여행자의 독서 1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친구 중에 나를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김도사’라고 부르는 녀석이 있다.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것 같다. 예측할 수 없이 갑자기 어딘가로 떠나곤 했던 날들 때문일 것이다. 내 여행은 늘 갑작스러웠다. 따분한 일상에 지치면 어김없이 떠나고 싶어진다. 나는 계획 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떠나는 것을 좋아했다. 술을 한 잔 마시다가 문득 기분이 동하면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서 새벽부터 훌쩍 나서서, 한 열흘쯤 여기저기 헤매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과거형으로 표현한 이유는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그 방랑의 시간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영화 <비포 썬라이즈>를 보면,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우연히 여행 중에 만나서 하루 종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서로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아도 전혀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그들의 만남과 대화가 참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연한 여행을 통해 만난 사람과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여행을 통해 사랑에 빠진 특별한 인연들. 어느 여행에선 매력적인 여성을 만났고, 또 어느 여행에서는 마애불을 만나기도 했다. 언젠가는 그림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어느 날엔가는 책을 만나기도 했다.
어느 날 밤 훌쩍 떠나고 싶은 맘을 억제할 수 없었다. 꼭 어디를 가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지도책을 펼쳐들었다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기도 하며, 어디를 갈지 고민했는데, 마침 온라인에 접속 중이던 문학동호회에서 지인이 순천으로 오라는 제의를 해왔다. 평소에 그의 글을 좋아했던 지라, 날이 밝는 대로 버스에 올랐다. 순천대 문창과를 다니는 아리따운 여성이었다. 그의 소개로 곽재구 시인과 잠시 말씀을 나누기도 했다. 순천대를 여기저기 돌아보며 일상의 이야기, 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저녁에는 그의 집이 있는 여수로 옮겨갔다. 돌산공원에서 돌산대교를 내려다보며 뜨거운 문학에 대한 열정들을 토해냈다. 글만 읽었을 때에도 참 섬세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만나서 한나절을 함께 보내고 보니, 사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고, 삶에 대한 확고한 자기 생각도 맘에 들었다. 밤이 되어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다. 그 역시도 아쉬움이 남은 듯 보였지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지는 못했다. 왠지 다음을 기약하는 순간, 지금 느꼈던 이 설레임이 다 사라져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와 헤어지고 후회로 밤을 보낸 다음날 여수 여기저기를 떠돌며 몇 번이나 다시 연락을 해볼까 망설였지만, 결국 발길을 돌려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끔 여수나 순천을 떠올릴 때면, 돌산대교를 내려다보며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리곤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고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몽골의 사막에서 특별한 인연을 만났다. 한국과 일본의 환경단체에서 몽골로 ‘사막화 방지 운동’의 일환으로 생태투어를 갔다. 단순한 참가자가 아닌, 진행요원쯤 되는 역할로 갔기 때문에 이런저런 고생을 좀 했다. 울란바토르에서 며칠 간의 일정을 마치고, 하루 종일 초원을 가로질러 사막을 향해 달렸다. 저녁이 되어 하라호름의 게르(몽골 천막)에 짐을 풀었다. 저녁을 먹고 일본 학생들과 함께 사막을 걸으러 출발했다. 사막은 여름이라도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했는데, 나는 미처 긴 옷을 챙기지 못했다. 그냥 반바지에 반팔티셔츠 차림으로 따라 나섰다. 한참을 걸어서 마침내 풀 한포기 없는 사막에 들어서서 밤하늘의 별들과 저 멀리 지평선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간간히 일본 친구들과 더듬더듬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추웠다.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포를 두르거나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추위를 견뎠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며칠 동안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일본 여학생이었다. 너무 추워 보인다고, 괜찮다면 모포를 함께 쓰자고 제안했다. 나는 입이 얼어서 말도 잘 안나오는 상태에서 겨우 좋다고 대답했다. 한참동안 그에게 안겨있었다. 그의 체온과 모포 덕분에 얼었던 몸이 비로소 풀렸다. 나는 덕분에 살았다고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수줍은 듯 웃었다. 우리는 일본과 한국의 밤하늘과 별자리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고, 또 환경오염과 사막화 현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재미있었다. 처음으로 밟아본 사막에서 다른 언어를 쓰는 여성과 서로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런 상황들이 묘한 설레임이 되어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울란바토르나 바양고비에서도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서로 마음이 없었다면 이런 인연으로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꽤 오랜 시간동안 사막을 서성이다가 다함께 돌아가는 길. 우리는 여전히 모포를 나눠쓰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서로의 보폭을 신경 쓰며, 발을 맞춰 함께 걷고 있었다. 이 밤을 보내고 나면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가서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고 각자의 나라라 돌아가게 된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면 지금 밖에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게르에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사박사박 메마른 땅을 밟는 발소리만이 우리를 따라왔다. 잘 자라는 인사와 웃음을 마지막으로 각자의 게르로 돌아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두 명의 특별한 인연을 떠올렸다. 보는 순간 푹 빠져들게 만드는 작가의 사진들을 보면서, 강렬하고도 매혹적인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시베리아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사막에서는 생텍쥐페리를 읽었다는 저자의 글을 하나하나 꼼꼼히 곱씹으며, 내 지나온 여행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게 되었다. 작가에게 한동안 잊고 살았던 방랑의 기억을 되돌아보게 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