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 불참한 죄
지난 주에 지역에서 일본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투기 건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획단에 들어가 몇 차례 회의를 함께 했다. 언제나 이런 류의 연대 단위 모임에 참여하면 가장 적극적으로 챙기는 사람들이 있고, 이름만 걸고 되도록 역할을 맡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워낙 이미 맡고 있는 일이 많은데 이런 류의 회의에 갈 때마다 또 일이 생겨서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한 발 빼려는 입장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큰 역할들을 자처하면 나는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가져가는 편이다.
이번에는 준비 단계 회의에는 빠짐 없이 참석했지만, 행사의 얼개를 짜는 중요한 회의 때 발전소 건으로 빠질 수 없는 일정이 생겨서 회의에 불참했다. 그 다음날 회의 결과를 보니 나에게 행사 전체를 진행하는 사회자 역할을 맡겼더라. 역시 회의에 빠지면 이런 역할을 떠맡게 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중에 이 행사를 준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분이 전화를 해서 결과를 다시 알려줬다. 회의 참석자들이 만장 일치로 나를 추천했다고. 사회를 그렇게 잘 보신다면서요? 라고 능청스럽게 묻더라. 내가 사회를 보면서 굉장히 어버버 했던 기자회견이 있기도 했고, 또 나름 잘 봤다고 자부할 만한 기자회견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그렇게 잘 본다고 소문날 수준은 절대 아니라서 당연히 과장이고 능청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뭐 회의에 빠진 죄이기도 하고, 다른 분들은 준비 단계에서 또 다른 역할들을 맡을텐데, 나는 당일 진행 정도는 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연쇄 수소폭발 사고에 관한 건은 내가 강의에서도 자주 다루는 내용이고, 지속적으로 정보들을 모으는 주제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번 알프스 성능과 삼중수소 논란 국면에서 과학과 괴담이라는 흑백 논리로 여러 논쟁이 불 붙었을 때 흥미롭게 양쪽 논리를 하나씩 따라잡으려 애쓰기도 했다. 또 이 주제로 여러 사람들과 충분히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왕 무엇인가 역할을 맡을 거라면 사회자 역할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체 준비를 총괄하는 담당자가 사회자 대본을 알아서 써달라고 하길래,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굳이 대본까지 쓰지 않아도 적절하게 필요한 내용을 끄집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행사 당일,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나는 일부러 내 목소리 톤을 높여서 활기찬 모드로 내 마음가짐을 바꿨다. 나는 종종 강의할 때, 노래를 부를 때, 이렇게 행사를 진행할 때 마이크를 잡으며 나 자신의 모드를 바꾸곤 한다. 이번엔 좀 활기차면서도 힘있는 진행이 필요한 순간이니 그에 맞는 마음 가짐으로 바꿔 세팅하는 시간을 가졌다.
발언자들의 발언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기도 하고, 강조점을 다시 짚어 보기도 하고, 어떤 단어나 표현을 되새기는 등이 진행자가 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이다. 그래서 발언자의 발언을 누구보다 주의 깊게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에 걸맞는 이야기나 소식 등으로 환기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지루하지 않게 구호도 외치고, 농담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날은 거의 최고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적절하게 진행을 이어갔다.(적어도 내 생각에는) 딱 두 번 정도 특정 단어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조금 당황하긴 했는데, 그냥 잘 넘겼다.
행사를 마치고 여러 선배들이 수고했다고, 잘 했다고 칭찬들을 해주셨다. 이 날 칭찬을 제법 많이 받았는데, 나와 그리 친하지 않은 분들도 일부러 와서 아는 척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선배가 마이크를 쥔 내 손이 떨렸던 점을 지적했다. 나는 강의를 하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마이크를 쥔 손이 떨리는 일을 종종 겪는다. 그 선배가 지적한 것처럼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는데, 손은 자주 떨린다. 이게 수전증이 아닌가 의심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갑자기 문득 손이 떨리는 건 내가 적절한 긴장과 흥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아까 약간 활달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드를 바꿨다고 표현했는데, 손이 떨리는 건, 이 일부러 바꾼 모드를 유지하기 위해 긴장과 흥분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걸 스스로 느꼈던 것은 사실 최근의 일이었다. 예전에 강의를 갔다가 듣고 계신 어르신들께서 너무 지루해 하시길래, 일부러 목소리 톤을 바꾸고 진행 방식도 완전히 바꾼 일이 있었다. 질문도 많이 하고, 어르신들의 질문과 답변과 지적 같은 것들에 적절하게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면서 좀 더 참여자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준비된 내 강의 내용 중간 중간에 이런 방식을 끼워넣곤 한다. 그런데 이 방식은 생각보다 에너지를 많이 쓰고, 그 적절한 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긴장감과 약간의 흥분이 필요했다. 거기에 나를 맞추다보니 목소리는 차분한데 몸이 떨리거나 손이 떨리더라.
노래방에서도 자주 그랬다. 거의 가수나 마찬가지인 지인들 사이에서 한동안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며 아주 많이 불러서 자신 있는 노래만 한 두개 선택해서 부르곤 했는데, 그게 스스로도 참 못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두성을 배웠고, 조금 자신이 생겨서 힘있게, 자신있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 내 목소리가 아닌 두성으로 만들어 낸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려면 몸이 떨릴 정도로 힘을 써야 했다. 손이 떨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래서 강의 중에 문득 내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 날 강의는 잘 된 것이라고 여긴다. 대체로 참여자들의 평도 좋은 경우가 많다. 지난 주에 그 기자회견 사회를 보다가 손이 떨린 것도(실은 몸도 떨렸었다.) 그런 맥락이었는데, 그걸 지적한 선배에게 이 내용을 다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언젠가 설명할 날이 오겠지.
아는 척
가끔 보면 세상 만사를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일이던 자기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잘난 척 설명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약팍하게 얕은 지식만 가졌을 뿐이면서 다 아는 것처럼 구는 태도를 보면 황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어쩌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만약 나라면, 부끄러워서 절대 저렇게 뻔뻔하게 굴지 못할 텐데.
그런 류의 사람들이 일이나 시사 상식 같은 내용에 대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면, 그건 그 정도로 들어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아주 틀린 말이 아닌 때들도 있고, 꼭 그 말이 다 맞지는 않다고 해도, 들어줄 만한 수준인 경우들이 있으니까. 일에 대해서도 내가 참고할 만한 어떤 정보 수준으로 참고 들어줄 수 있다. 분명한 건, 내가 그들보다 훨씬 더 일을 잘 한다는 사실이고, 그건 주위 사람들의 태도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못 참겠는 경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자기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할 때이다. 그러니까 '갑' 이라는 어떤 사람에 대해 '을'이라는 사람과 '병'이라는 사람이 대화하는데, 그 을과 병 두 사람이 아무리 친해도 갑의 삶에 대해 전부를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 그 전제를 깔고 대화를 해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을은 단정적인 말투를 쓰는 버릇이 있고, 평소 자신이 갑에 대해 많이 안다고 믿는 편이며, 갑의 여러 말투와 행동들이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믿고 있고, 그 내용을 여과 없이 병에게 전한다. 듣는 병은 생각한다. 을이 아무리 갑과 친하다고 해도, 을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면을 자신이 알고 있는데, 을의 주장과는 맞지 않는 면이 많은 것이다. 게다가 을이 자주 쓰는 그 단정적인 말투는 자꾸 거슬린다. 을이 본 갑의 어떤 면과 병이 본 갑의 어떤 면은 분명히 다르고, 각자가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다. 을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을의 시선에서 본 갑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결코 갑의 전체라고 환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병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대화 자리에는 없지만, 정 이라는 사람과 무 라는 사람이 본 갑의 모습도 또 다를 것이다. 물론 비슷한 어떤 면을 발견하고, 비슷한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것이 갑의 개성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면이 갑의 전부라고 말하기에는 성급한 것이다.
이를테면 갑의 가족인 자 라는 사람과 축 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 두 사람이 알고 있는 갑의 모습은 을이나, 병이나, 정이나, 무와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같은 가족이라도 갑의 부모가 보는 모습과 배우자가 보는 모습과 자녀가 보는 모습은 또 천차만별일 수 있다.
최근 한 선배가 또 다른 선배와의 작은 갈등을 이야기하면서 너무나도 단정적으로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는 아마도 다른 자리에서 나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런 일은 여러 번 있었고, 그런 일화들이 나중에 시간이 지나 내 귀에 들려오기도 했다. 암튼 그 사람이 표현한 그 단정적인 내용은 내가 보기에는 촛점이 맞지 않는 다른 이야기였다.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이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겉으로만 보고 오해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 자신은 본인이 그 사람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고 오판한 것이고, 그런 오판은 자만심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였다면 그 사람이 내게 했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행동이나 말만 전달하면서 그 사람이 혹시 이런 이유로 나에게 이런 일을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물었을 것이다. 비난하듯 단정적으로 표현한 그 선배의 태도와 내가 조심스럽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접근하는 내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예전에 좀 어리고, 생각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저런 실수를 가끔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제 정신이 박힌 상태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실수다. 어떤 이유로 분노가 극에 치달았거나, 어떤 다른 감정이 극한에 도달했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최근 한 지인이 이혼 소송 때문에 무척 힘들다고 내게 개인적인 상담을 해왔다. 내가 벌써 이혼한 지 7년이나 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분은 내가 부럽다고 했다. 이혼 후에도 아이들과 잘 지내는 모습, 이혼 하고도 계속 교류하고 일상에 크게 지장을 받지 않는 모습 등이. 나는 속으로 이혼에도 여러 모습들이 있을 거라고.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저분한 소송에 휘말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암튼 그 분의 소송에 대해 내가 크게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잘 들어주고 최대한 열심히 공감해주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 지점에서 열심히 노력했다. 마지막에 그 분이 그 상대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언성은 높이며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막 물었다. 그 말이 내게는 남자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들렸다. 남자라고 다 같지 않다. 실은 나 역시 그 분의 이야기만 듣고, 그 전 남편(아직 이혼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전 남편이라고 쓴다.)을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였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테니까.
징검다리 연휴 라고 해야 하나? 월요일인데 너무나도 피곤했고, 매장에는 손님이 없었다. 다른 할 일은 많았으나,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몇 시간을 알라딘에서 보냈다. 내일 푹 쉬고 다음날부터 힘을 내서 열심히 일을 해야지. 할 일이 많다. 집중력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