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사실

현실은 바람대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어려서부터 늘 내가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는 다른 친구와 더 친했고, 내가 잘하고 싶었던 운동은 늘 일정한 수준에서 더 나아지지 못했다. 내가 짝사랑했던 아이는 다른 사람을 짝사랑했고, 내가 열심히 공부했던 과목은 점수가 늘 평균을 조금 넘길 뿐이었다. 그래도 가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성취감 혹은 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전학 온 친구가 먼저 다가와 준 덕분에 친해졌고, 생각지도 않았던 운동을 의외로 잘 해서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나를 지켜봤었다는 아이가 뒤늦은 고백을 편지로 전하기도 했고, 공부를 하지않아도 거의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던 과목도 있었다.

여기서 슬픈 사실은 늘 내가 원했던 것은 결국 얻지 못했고, 생각지 못했던 다른 것들은 다행히도 얻었다는 것. 이 슬픈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꽤 오래 만났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던 여성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이별을 선언했을 때 느꼈던 감정. 한창 사귀던 여성의 다이어리가 펼쳐진 페이지를 우연히 보았는데, 다른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는 걸 읽었을 때의 감정. 열정을 다 바쳐서 일을 했는데,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일이 완전히 망해버린 걸 깨달았을 때의 감정. 함께 일하며 호감을 쌓아가고 있던 동료에게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업무적 관계로만 선을 그어버린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꼈던 감정. 등등 나여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엄청 많다.

이건 일종의 패배감이다. 겉으로 보자면 나름 능력을 인정받는 중년의 남성으로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속에 있는 나는 수없이 많은 패배감이 차곡차곡 쌓인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부러움 혹은 질투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부러워한다. 그 감정이 좀 더 나가면 질투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예전의 나는 부러움과 질투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 바뀌었다. 더는 내가 바뀔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누구도 모든 것을 다 가질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질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도 부러움을 느끼는 것만은 어쩔수 없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면서, 내 보잘것 없는 삶의 흔적의 결과가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존중할 수 있었다. 이제 더는 누군가 가진 어떤 능력이 부러울 수는 있어도 그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부족하고 나약한 내가 좋다. 나라도 나를 좋아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텐데, 남은 인생 열심히 나를 좋아하며 살아야겠다.

세상에서 시간이 가장 느리게 흐르는 공간

얼마 전 애들과 저녁을 먹고 잠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애들 엄마와 단 둘이 머무는 시간이 생겼다. 이혼하고 혼자가 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짧은 시간이 무한한 것처럼, 그러니까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에서 시간이 가장 느리게 흐르는 공간이었다.

한 두해도 아니고 한 두번도 아닌데, 왜 그럴까? 그렇게도 긴 시간이 지났건만, 그렇게도 자주 마주치건만, 왜 나는 매번 애들 엄마와 마주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해야만 하는가. 아마 애들 엄마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와있는 날에는 일부러 늦게 들어오는 것이겠지. 일부러 서로 인사도 안 하고 모르는 척하는 것이겠지.

아, 다시 생각해보니 애들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한 두번 단 둘이 만난 적이 있긴 했었다. 다만 그건 전적으로 애들과 관련해서 꼭 나눌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만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이 단 둘이서 한 공간에 머물렀다.

짧지만 내겐 길었던 그 시간이 지나고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나는 긴 숨을 내쉬며 내 바보같고 한심한 태도를 자책했다. 아마 평생 달라지지 않으리라. 그리고 매번 이런 느낌, 이런 감정이겠지. 싫다! 정말. 나라는 인간.

바로 위에 나를 좋아해야겠다 라고 써놓고 이어서 진심으로 나라는 인간에 대한 싫은 감정을 토로하는 나. 그게 나다.

생신 선물

아직은 내 인생에서 고향 부산에서 살았던 기간이 조금 더 길지만, 이제 몇 년만 더 지나면 고향을 떠나 객지에 머무른 기간이 더 길어진다. 아, 군대에 있었던 기간을 고려하면 이미 비슷할 수도 있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끔 접했던 말, 너도 너같은 자식 새끼 낳아봐야 내 심정을 이해할거다. 이렇게 부모가 철부지 자식에게 말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참 가족(부모님과 동생)에게 정이 없는 무뚝뚝한 놈이었는데, 결혼 후 맺은 가족(아내와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몸에 배인 경상도 남자의 무뚝뚝함을 다 버리지는 못했겠지만, 나름 자상하고 친근한 남편이자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다. 원래 가족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쩔수 없고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분명 서운할 것이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며 머리가 굵어졌다는 걸 깨달으면서 자주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그때마다 부산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든다. 특히 늘 못난 아들 걱정을 한아름 안고 사는 우리 엄마.

난 어렸을 때 조금 개구진 면이 있긴 했지만, 비교적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 큰 사고를 친 이후로 부모님께는 늘 불효자로 살아왔다. 긴 시간 타지에 살면서 연락도 자주 드리지 못했고,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다. 음력 생신을 쇠는 두 분의 생신도 놓치기 일쑤였다. 그나마 아버지 생신은 여름 휴가와 시기가 가까워 그때 챙길 수 있지만, 엄마는 한창 일이 많고 바쁜 초겨울이라 정신없이 지내다 놓치는 일이 많았다.

사실 내 생일도 모르고 지나친 적도 있을 정도로 나는 생일을 챙기는 일에 관심이 없다라고 스스로 변명을 해보기도 하지만, 엄마 생신을 놓친 건 정말 잘못이긴 하다. 그렇지만 생신을 간신히 기억했다고 해도 뭔가 해줄 일은 마땅치 않다. 부산까지 다녀오는 일은 꿈도 못 꾸고, 늘 용돈을 보내드리는 걸로 때우고 말았다.

올해는 다행히 미리 엄마 생신을 체크해두고 (당연히) 용돈도 보내드리는 것 외에 시집 두 편을 보내드렸다. 생신날 받으실 수 있게 배송했는데, 택배사 사정으로 이틀 뒤에 받으신 건 좀 아쉽지만, 엄마는 시집을 받고 무척 기뻐하셨다. 왜 진작 깨닫지 못 했을까? 왜 더 일찍 생각하지 못 했을까? 영원한 문학소녀인 엄마가 시집을 받고 정말 좋아하실거란 생각을.

멍청한 불효자가 뒤늦게라도 깨달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엄마는 마침 내가 보내드린 두 시인을 좋아하고 이 시집들이 나온 소식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어떻게 알고 보냈냐고 물었다. 나로서도 어떤 시집을 보낼지 긴 시간 고심하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시인을 골랐던 건데, 그게 맞아 떨어졌다니 다행이었다. 다음에 부산에 갈 때는 집에 있는 이 시인들의 다른 시집들을 가져가야겠다.

짧고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또 길어져 버렸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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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12-21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개를 끄덕이며 주욱 읽어내려오다가, 시집을 어머님께 선물했다는 대목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시집을 선물하는 감은빛님도 멋지지만 시를 읽으시는 어머님이라니요. 와 진짜 멋진 어머님이십니다. 나중에 제 딸이 엄마 생일선물로 엄마가 좋아할 거 같은 소설을 골라봤어라고 해준다면 너무 너무 행복할듯하네요. ^^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저는 제가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사실이기도 하고 의도적인 노력이기도 합니다. 저는 제가 좋다는 말을 많이 하고 다녀요. 말이란 참 이상해서 내가 참 맘에 들어 좋아라는 말을 자꾸 하면 정말로 내가 점점 더 괜찮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중요한건 내가 나를 좋아할 수록 내 주변의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 수 있게 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더 저 자신을 좋아하려 노력합니다. ^^

얄라알라 2021-12-21 21:48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께 결례가 되는 댓글일지 모르겠지만, 저도 감은빛님께서 마음 열어 쓰신 페이퍼 집중해서 읽다가, 어머님께서 시집 선물 기뻐하셨다는 대목, 홍삼이나 상품권이 아닌 시집을 선물하시는 아드님, 완전 멋지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람돌이님께서도 그 부분으로 댓글을 시작하셨네요^^

바람돌이 2021-12-21 21:50   좋아요 1 | URL
엥???? 결례는 무슨요. 감은빛님도 어머님도 멋지시다는 동의인데요. ㅎㅎ

얄라알라 2021-12-21 21:50   좋아요 0 | URL
오래 전, 인도에서 한국으로 공부하러 오신 분과 대화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분은 본인이 ‘말한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요기‘라고 자기 소개를 하시더군요.

당시엔 제가 어렸고, 그 분이 이상해보였어요.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말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바람돌이님 태도 저도 배워야겠습니다.

얄라알라 2021-12-21 22:0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속된말로 제가 바람돌이님 댓글에 ˝찌찌뽕 할래요...˝한 셈이라서 결례 이야기를..
저도 고개 끄덕끄덕 푹 빠져서 읽다가 ‘시집 기뻐하신 대목‘에서 깜짝 놀람이었거든요.
^^ 사실 저도 오늘 제 인생의 선생님께 선물 드리고 온 참인데, 꽤 종류가 다른 선물이어서 시집에 더 놀랐던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1-12-22 18:4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바람돌이님. 엄마에게 시집을 선물한 게 놀랄 일이 될지는 몰랐어요. 글에도 썼듯이 엄마는 영원한 문학소녀이셔서 지금도 시를 쓰시는 분이라 시집 선물이 가장 좋은 선물이 되거든요. 다만 취향의 문제가 남지만, 이번에는 잘 맞아떨어졌네요.

확실히 생각과 말은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자꾸 떠올리고, 입 밖으로 내어 말하다보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구요.

저도 바람돌이님을 따라 그렇게 말하고 다녀야겠어요. 제 지인들은 안 그래도 잘난 척하는 놈이 더 재수없어졌다고 하겠네요. ㅎㅎ

감은빛 2021-12-22 18:40   좋아요 0 | URL
북사랑님. 안녕하세요. 북사랑님도 역시 시집 선물에 놀라셨군요. 방금 바람돌이님께 말씀 드렸듯이 엄마에겐 가장 좋은 선물이 될거라 생각했어요.

제가 좀 무심한 편이라 엄마에겐 이제서야 했지만, 지인들에겐 오래 전부터 종종 시집을 선물하곤 했어요. 선물을 하긴 해야하는데 뭘 해야할지 모르겠을 때 시집만큼 좋은 선물이 없다고 생각해서요.

북사랑님께서 선생님께 드린 선물은 무었이었을지 궁금하네요.

희선 2021-12-22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는 건 잘 안 되고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죠 그런 거라도 있어서 사람은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마음은 가장 얻기 어렵기도 하네요 어머님한테 시집을 선물하시고 그걸 어머님이 좋아하시다니 두 분 다 멋집니다

저도 저를 좋아해야 할 텐데 하지만 잘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잘 하는 거 같은데...


희선

감은빛 2021-12-22 18:43   좋아요 1 | URL
희선님. 안녕하세요. 다른 사람들도 다 잘 하는 건 아닐거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요. 저도 예전에는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어떤 계기를 통해 점점 바뀌었던 것 같아요. 희선님께도 계기가 생길거라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