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


한 10년쯤 전에 이 알라딘 서재에 남자의 로망을 언급하며 권투와 샌드백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샌드백을 갖고 싶었다. 아니 언제든 시간 날 때마다 샌드백을 두드리며 운동을 하고 싶었다고 표현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10년 전 글에도 언급했었는데, 국민학교 시절 마당이 넓은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나무에 샌드백에 걸려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샌드백을 걸어놓을 수 있는 집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중에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파트에 사는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옥상에 샌드백을 걸어놓은 모습을 보았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권투선수였다고 했고, 그 친구도 권투를 배웠었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샌드백을 치면서 살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우리 집에는 샌드백을 걸어놓을만한 공간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샌드백을 갖고 싶어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오히려 철봉이나 바벨 등 다른 운동기구에 대한 욕심이 더 커졌다. 그리고 이혼 후 혼자 살게 되면서 실내철봉, 케틀벨, 바벨, 불가리안백 등 다양한 운동기구들을 사 모으고 있다. 집을 이사할 때마다 도와주러 온 후배들과 화물차 기사님들이 고개를 절레절래 저을 정도로 온갖 운동기구들과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지만, 책과 운동기구를 향한 소유욕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며칠 전 우연히 샌드백을 구입할 기회가 생겼다. 그 시작은 즐겨보던 유튜브 채널 '3분 운동과학'에서 만든 동영상에서 언급한 '펑셔널 샌드백'에 호기심이 생기면서였다. 바쁜 일상과 더위에도 어떻게든 조금씩만이라도 운동을 이어오고는 있는데, 요즘 큰 고민은 이거였다. 예전에 즐겨했고 좋아했던 동작들을 다시 시도하기에는 지금 내 몸은 근력도 부족하고 유연성도 부족했다. 단기간에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자칫 무리해서 시도하다가는 부상으로 이어져 오히려 긴 시간 운동을 못 할 수도 있었다. 지금 내 몸에 맞는 수준의 동작들은 너무 뻔하고 지겹게 느껴졌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동영상을 본 것이다. 


그래서 그 '펑셔널 샌드백'을 찾아보고 마음이 동해서 구입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가지 이유로 구매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가격이 비쌌다. 예상하긴 했었다. 어느 정도 가격은 이런 류의 운동 기구를 개발한 분들에게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구매 버튼을 누르기 위해 머리 속에서 이런 저런 요소들을 고려하여 계산기를 두드려봤을 때, 선뜻 누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포기하게 만들었던 두 번째 이유는 샌드백의 껍데기만 판매하고, 그 속을 채울 모래는 별도로 구매해서 직접 채워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모래가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래를 구매할 수 있는 곳의 링크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다만 샌드백 껍데기와 모래를 각자 배송 받아서 집에서 모래를 채워야 한다는 것에 너무 피로감이 느껴졌다. 만약 별도의 작업 공간이 있거나 밖에서 이 작업을 할 수 있다면 또 달랐을 지도 모른다. 우리 집은 좁고, 이 좁은 집에 책이 가득 차있고, 딱 잠 잘 공간을 제외하고 운동기구로 꽉 차있다. 여기서 샌드백에 모래를 채우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암튼 내 포기 결정은 합리적이었다기 보다는 감정적이었다 싶었는데, 막상 그렇게 포기하고 나니, 가격이 비싸보였던 것이 더 두드러져 보였다.


그런데 펑셔널 샌드백을 포기하고 나니 그냥 샌드백을 사서 비슷한 방식으로 운동을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펑셔널 샌드백의 장점은 여러가지 운동에 용이하도록 손잡이가 다양하게 부착되어 있단는 점인데, 이는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다른 도구들로 대체가 가능하다. 사실 펑셔널 샌드백으로 할 수 있는 대다수의 운동들은 불가리안 백이나 케틀벨 그리고 덤벨로도 할 수 있다. 각각의 동작에서 세부적으로 주동근의 범위와 자극의 강도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너무 무게에 욕심을 부리다가 불가리안 백을 무게를 내가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구매했고, 지금은 구매 당시보다 근력이 더 부족해져서 원하는 동작을 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암튼 그래서 샌드백을 사려고 검색해보다가 갑자기 중고물품을 거래하는 앱이 유행이라는 걸 떠올렸다. '당근마켓'이란 이름의 앱은 우리 아이들도 애들 엄마를 통해 종종 이용해봤을 정도로 유행이라고 했다. 나도 앱을 깔아놓긴 했지만, 이용해 본 적은 없었는데, 샌드백을 검색해보니, 마침 동네에 몇 개의 물건이 나와있었다. 몇 개는 아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스탠딩 샌드백이었는데, 샌드백이 아닌 공기를 채워놓은 풍선 같은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 나도 아이에게 그런 걸 사준 적이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다 하나를 발견했는데, 문틀에 철봉을 걸듯이 봉을 걸어놓고 거기에 샌드백을 매다는 방식이었다. 샌드백과 봉과 권투 글러브까지 판매한다고 적혀있었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했다.


나는 바로 연락을 했고, 판매자는 당장이라도 사러 오라고 했다. 대충 보기에도 제법 무게가 나가 보이길래, 대략 몇 킬로그램인지 물었더니, 재보지는 않았지만 20킬로그램 정도 될 것 같다고 답이 돌아왔다. 판매자가 지정한 위치는 산 중턱에 있는 아파트 단지였다. 우리 집에서 차로 약 20분 정도 거리(고질적으로 막히는 도로가 있어서 이를 감안해)였다. 차가 없는 내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그 정도 무게와 부피의 샌드백을 갖고 오는 것이 원활하지 않았다. 또 대중교통이 한 번에 연결되지 않아 적어도 2번 이상을 갈아타야 하고, 환승을 위해 걸어서 이동하는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운동한다고 생각하고 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주위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칠 것이 명백할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결국 차를 빌려서 가지러 가야 할 상황이었다. 주위에 차를 빌려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3명 정도 있었는데, 대부분 업무상 여러 번 차를 빌려 썼었고,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자꾸 부탁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결국 돈을 주고 공유카 서비스를 이용하는 걸로 마음을 먹었다. 주말에 가지러 가기로 약속을 정했는데, 하필 주말에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공유카들이 대부분 이미 예약이 잡혀 있었다. 꽤 거리가 있는 곳에 딱 1대가 남아 있었는데, 전기차였다. 샌드백만 갖고 오는 건 1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 차는 최저 이용시간이 2시간이었다. 내가 망설이는 동안 누군가 이 차를 예약해버리면 나는 무조건 샌드백을 어깨에 메고 먼 거리를 걸어와야 할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2시간을 예약해서 차를 몰고 샌드백을 가지러 갔다.


거래는 금방 끝났다. 판매자가 정한 시간보다 약 2분 정도 늦게 도착해(차가 막혀서 조금 늦는다고 연락했다.) 판매자와 가볍게 인사하자마자 돈을 건네고 샌드백과 봉과 종이가방(글러브와 봉을 문틀에 결합할 틀 등이 들어있는)을 받아 차에 실었다. 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며 1시간의 대여료를 그냥 날려버리는 것이 아까우니 어디 드라이브라도 다녀올까 생각해봤다. 주말이어서 차량이 많았고 드라이브를 하기엔 또 1시간이란 시간은 너무 부족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이 한강 공원이었고, 주차장에 잠시 차를 대놓고 쉬다가 돌아오자 싶었다. 그렇게 라디오를 들으며 한강을 향해 차를 몰았다. 생각보다 도로에 차가 많았다. 아주 오랜만에 운전을 해보는 것라 좀 달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강변북로에서 한강 공원으로 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차를 몰아 자유로로 향했다. 거기서부터는 좀 즉흥적으로 달리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서 반납 시간이 걱정되어 다시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최근에 새로 뚫린 도로를 달려서 늦지 않게 반납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샌드백을 사자마자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앞 베란다를 향한 문틀에 설치하려고 했는데, 못을 박으려고 했더니 못 대가리의 크기와 틀에 난 구멍의 크기가 맞지 않았다. 맞는 못을 사러 다시 나가야 했는데, 너무 더워서 그냥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간 나는 처음에 샌드백을 검색했던 의도대로 그 샌드백을 들고 여러가지 동작의 운동을 해봤다. 손잡이가 없어도 충분히 재밌게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나에게 맞는 운동은 양쪽 어깨에 샌드백을 번갈아가며 올리며 런지를 하는 동작이었다. 어디서 보거나 배운 것이 아니라 그냥 런지를 이렇게 해보면 재밌겠다고 즉흥적으로 떠올라서 한 것인데, 생각보다 운동 효과가 좋았다.


그리고 어제 잡화점에서 못을 사와서 샌드백을 설치했다. 봉을 설치하고, 그 봉에 샌드백을 걸면서 무게 때문에 봉이 떨어지거나 문틀이 파손되거나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으나, 봉에 매달려보고 내 몸무게를 버틸 정도라는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이제 곧바로 권투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쳐봤다. 와! 재밌었다. 더운 날씨에 이미 못을 박고 봉을 설치하고 샌드백을 거는 과정에서 땀을 많이 흘렸는데, 더위와 땀 따위는 잊어버리고 한참을 샌드백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리고는 발차기도 해봤다. 주위에 바벨과 케틀벨과 덤벨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던 걸 조금 치우고, 벽을 차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발차기를 해봤다. 어려서 태권도도 했었고, 고등학교 때는 태권도와 권투와 무에타이를 합친 것 같은 잡종의 운동도 배웠었는데, 그것도 다 옛날 일이라 이젠 발차기 동작이 어색하고 잘 되지는 않았다. 연습이 필요했다. 암튼 힘껏 발차기를 날려서 샌드백에 뻑 하고 맞는 느낌은 정말 좋았다.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샌드백은 봉에 걸려있는 고리에 걸었는데, 그 고리가 봉 사이에서 움직이며 샌드백이 양쪽으로 움직였다. 있는 힘껏 오른발로 발차기를 하면 샌드백에 덜컹 거리며 왼쪽으로 옮겨갔고, 이번에는 왼발로 차면 다시 오른쪽으로 옮겨왔다. 주먹으로 쳐도 마찬가지였다. 왼손 훅을 날리면 오른쪽으로 옮겨왔고, 다시 오른손 훅을 날리면 왼쪽으로 옮겨왔다. 예전에 여러번 반복해서 보곤 했던 영화 [겟썸](원제 never back down)의 주인공이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발로 차서 옆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장면이 떠올랐다.


저녁에 온라인 회의가 있어서 빨리 씻고,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고 접속할 생각이었는데, 지칠때까지 샌드백을 차고 두드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화가 울리는 걸 보면서 씻을 시간도 없다는 걸 깨달았고, 간단히 세수만 하고 노트북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상태로 셔츠 하나를 껴입고 회의에 임했다. 하체는 보이지 않으니 하의는 벗고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었다. 2시간 반 가량의 회의를 마치고 바로 씻으려다가 씻기 전에 다시 한 번 샌드백을 두들기고, 철봉에도 매달리고, 불가리안 백도 들어보고서야 씻었다. 그리고 늦은 저녁을 샌드위치로 때웠다.


샌드백 덕분에 다 늙어서 격투가가 된 것 마냥 다시 격투기 연습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계획을 세웠다. 일단 다 굳어 버린 다리를 다시 찢어야 하고, 이젠 다 잊어버린 권투 동작들도 다시 반복 연습해서 익숙해지게 만들어야겠다. 예전에 친구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보여줬던 발차기 동작들을 하려면 아마 연습을 많이 해야 할거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더위에 지쳐 아무 의욕이 없던 일상에 갑자기 새로운 활력이 생겨서 기분이 좋다. 뭔가 즐기고 집중할 일이 생긴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고작 샌드백 하나 구매했을 뿐인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 맨 처음 생각했던 펑셔널 샌드백을 샀으면 지금처럼 걸어서 두드리고 찰 수 없었을테니, 지금과는 또 완전 다른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새로운 운동들을 할 수 있어서 나름의 활력이 되었겠지만, 지금처럼 격투기를 다시 연습해 볼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삶은 에측할 수 없는 것이다.


폭염과 강의


어제 아침에는 에너지자립마을에 강의를 하러 갔다. 하필 아침부터 엄청 더운 날이라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갔다. 거의 1년 전인 작년 7월 초에도 강의를 했었다. 작년에도 올해도 에너지 강의 기획과 진행을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1개의 강의를 하는 걸로 끝났는데, 올해는 3개의 강의를 기획해줬고, 그 중 2개를 내가 맡고, 마지막 강의에 주택 단열 분야 전문가를 섭외했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작년에 강의를 들었던 분들이 또 들을테니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준비했다. 특히 코로나19 국면에서 감염병과 기후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들을 넣었고, 미국과 캐나다의 폭염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폭염으로 인한 피해들을 정리했다. 


사실 갑자기 확진자가 늘면서 사회적거리두기 단계가 4단계로 격상하는 등의 분위기 때문에 강의가 연기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강의실에는 간격을 벌려 최소한의 인원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온라인으로 연결해 강의를 하기로 했다고 전달받았다. 아침에 일찍 도착해서 보니 책상 사이 간격을 벌려 6개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더라. 그리고 사전에 신청 받은 사람들만 참석했다.


더운 날 폭염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다루니 듣는 주민들의 공감도 무척 컸다. 내 예상처럼 작년에 강의를 들었던 분들이 계셨고, 그 중 한 분이 작년하고 다른 내용으로, 그것도 관심이 클 수 밖에 없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줘서 너무 좋다고 말씀을 해주셨다. 그 말씀을 들으며 그걸 준비하느라 잠 못자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여성 분이 말을 걸었다. 강의실 맨 앞에 앉아서 제일 집중해서 듣던 분이었다. 강의 막판에 후쿠시마 핵 사고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 정부와 도쿄 전력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다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고 하셨다. 자신이 일본에서 왔다는 말씀은 뒤에 덧붙였다. 아! 일본에서 오신 이주 여성이셨구나. 일본이 급하게 법을 바꿔 방사선 측정 결과를 온라인에 올리지 못하게 한 부분을 비판하면서 과거 소련과 우리나라의 독재자와 비교하기까지 했는데, 그 분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발언이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점심 시간에 강의를 마쳤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주최측과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다음 강의 이야기나 새로운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 이야기도 했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땡볕에 길을 나섰다. 더워도 너무 더웠다. 내 강의를 들은 분들은 정말 공감을 안 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1년


소제목을 써 놓고 나니 브라운아이즈의 노래가 떠오른다. 이 노래가 티비에서 자주 나왔을 무렵 나는 사귀던 여성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중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여성은 이 사람이 유일했는데, 그때의 복잡한 심경에 이 노래 가사가 많이 인상적이서 자주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아, 노래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고, 이제 몇 십분만 지나면, 아니 이 글을 다 두드려서 등록하기 버튼을 누르면 아마도 날짜가 바뀌어 있을테니, 이 글이 등록되는 시점은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정말 벌써 라는 단어가 너무 공감이 될 정도로 시간이 살같이 흘렀다. 병실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누군가 다가와 빨대를 물려주어 목을 축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시간들이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 같은데 말이다.


지난 1년이 내 삶에서 가장 변화가 많았던 시기였다. 죽을 뻔 했다가 살았다는 의사의 말처럼 그만큼의 극적인 상황이 지나갔으니, 변화가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과거와 달리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보고, 좀 더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나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려고 마음 먹었다.


젊은 시절부터 머리칼을 길러보고 싶었던 걸, 시도할 때마다 머리가 자라는 특정한 시기(소위 말해 거지 시기라 불리는)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짧게 자르기를 반복했었는데, 이번에는 지난 1년간 한번도 머리칼을 자르지 않고 길렀다. 요며칠 날씨가 너무 더워서 머리칼이 목을 덮고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머리를 묶고 있으면 또 괜찮으니 아직 후회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언제까지 기를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 것 같다.


수염도 그렇다. 나는 환경단체 활동가였기에 주위에 종종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성 활동가들이 있었다. 나도 가끔 수염을 기른 채 지내기도 했는데, 수염을 일정한 길이로 다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깎아버리곤 했다. 이번에는 사고 이후 휴직 기간동안 수염을 기르기 시작해서 이렇게 저렇게 내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로 수염을 다듬어 볼 시간 여유가 충분했다. 그리고 일터에 복귀하고 나서 초기에 "산적 같다."고 거부감을 나타내곤 했던 여러 사람들도 이젠 이 얼굴에 익숙해졌는지 별 말을 하지 않거나, 잘 어울린다고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물론 내 직속상관은 여전히 불편해하는 눈치인데, 최근에는 "도인 같다." 고 말하는 걸로 역시 태도를 바꾸기는 했다.


머리칼을 기르는 것과 수염을 기르는 것은 마침 일을 쉬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해보겠어 라는 생각이 있어서 감행한 것이었다. 앞으로 남은 평생 이럴 기회는 다시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일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일이 많을 때는 내 몸보다 일이 우선이라 40시간 이상씩 잠 안 자고 일을 하기도 했었고, 일이 마무리가 안되면 다른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스스로 견디질 못하는 편이었는데, 그런 강박적인 생각도 오래 일을 쉬면서 사라졌다. 이젠 일이 잘되면 잘되는대로, 잘 안 풀리면 또 그런 상황에 맞게 시간 계획을 조절하면서 일을 하고, 그래도 생각대로 일이 안 된 것에 대해서는 예전처럼 자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전적인 요인과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탈모가 심했다. 10년 전 사진과 지금 사진을 보면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외모가 많이 변했다. 아니 늙어 버렸다. 주위에서 자주 탈모약을 먹어 보라고 권할 때마다 어차피 집안 어른들의 머리 스타일을 보아 나도 피할 수 없는 길일텐데, 뭐하러 약 까지 먹어야 하나 생각하며, 그냥 생긴대로 살다 죽겠지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는 탈모약을 꼬박꼬박 먹는 내 모습을 본다. 확실히 예전과 달라졌다는 증거다. 다만 처방전을 써준 의사도 약은 남성 호르몬을 막아주는 역할만 할 뿐, 주 원인인 스트레스는 본인이 알아서 잘 해결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약 한 달쯤 전부터 그러니까 사고 11개월째부터 얼굴에 신경쪽 통증이 심해졌다. 통증은 간헐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며, 가끔 아주 심해졌다가 조금 약해지기를 반복했다. 다친 상처 부위 주위로는 신경이 끊어져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만지면 남의 살처럼 느껴지는 그 기분은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가장자리부터 일부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만져보면 내 살을 누르고 있구나 느껴지는 것이다. 이 당연한 현상이 내게는 너무 큰 사건처럼 느껴졌다. 이제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는구나. 앞으로 평생 감각 없이 남의 살인 것처럼 살아야 할 줄 알았는데. 


작년 여름은 병실에서 보내느라 휴가를 즐기지 못했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마찬가지로 휴가를 즐기기는 틀린 것 같다. 아이들과 어디 놀러 갈까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4차 대유행이 번지고 있다는데, 겁나서 어디 나가질 못하겠다. 올림픽을 강행한다는 일본의 상황도 우려스럽고, 백신 접종률이 높고, 사망률이 낮다는 이유로 방역조치를 전면 철폐하겠다는 영국의 상황도 걱정이 된다. 과연 우리는 이 유례없는 시기를 잘 이겨나갈 수 있을까? 우리가 역사책에서 흑사병 창궐 부분을 몇 개의 문장으로 배웠듯이, 이후 세대들은 역사 책에서 이 시기를 배울까? 요즘은 영상이 남아있으니 이후에는 영상자료로 역사를 배울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지금의 인류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


코로나도 기후 위기도 모두 인류가 지혜를 모아 잘 극복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을 겪고 있을 많은 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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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7-17 0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오랜만에 남기시는 글이 희망과 위로의 내용이라 너무 좋네요~ 긴 터널을 지나오셔서 이젠 샌드백도 맘껏 치시게 되었다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더 좋아질거고~ 좋은 일만 많으실 거예요~^^

감은빛 2021-07-20 09:40   좋아요 1 | URL
툐툐님.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이렇게 반겨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늘 마음 써주시고, 응원해주시는 것도 감사합니다!
샌드백이 생각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 해소에 좋더라구요.
왜 진작 저걸 살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더라구요.
물론 이것도 한 때일거예요.
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시들해지겠지요.
처음 실내철봉을 샀던 때에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매달려 놀았으니까요. ㅎㅎ

samadhi(眞我) 2021-07-17 01: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이 긴 글을 쓰고 다듬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을지. 점점 회복되고 강건해(?)지기까지 하신다니 다행이네요. 무엇보다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10여 년 전에 복싱을 배웠는데 정말 재밌더라구요. 그 역동성, 땀이 뚝뚝 떨어지고 끊임없이 가볍게 뛰면서 원투원투... 그 재미난 걸 한 달 밖에 못 배우고 말았지만요. 동양챔피언 출신 관장이 치근덕대서 ㅠㅠ
지금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늘 마음만 복싱 생각 합니다. 가장 재밌었던 운동이에요. 남편 때문에 알게 된 아웃복서, 토머스 헌즈에게 반했죠.

몸도 마음도 더 튼튼해지고 자신을 더 아끼는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참, 잘 아시겠지만 노푸가 머리카락에 좋습니다. 이미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지만요. 노푸는 환경에도 좋고요. 저는 천연비누 하나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씻은지 5년 넘었네요. 제가 그리 하다보니 남편도 2년 전부터(우리 남편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을 때 제가 길들였죠. 제가 머리를 감겨줘야 하니 제 뜻에 따라야 했던 거지요^^) 노푸했어요. 다만 지독한 곱슬이라 린스는 꼭 써야겠대서 그건 봐주고 있어요. 처음 비누로 머리 감으면 뻑뻑함을 견디기 힘들지만 곧 익숙해집니다.

감은빛 2021-07-20 09:48   좋아요 2 | URL
진아님. 이렇게 긴 댓글로 응원해주시고, 노하우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일단 저도 샴푸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환경운동가의 삶을 시작했던 20년 전부터 어떻게하면 샴푸를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실천해왔어요.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식초나 EM발효액을 이용한 시간이 무척 길었습니다만,
냄새와 번거로움 때문에 불편했죠.
저도 천연비누를 한동안 이용했는데,
그건 머리결이 너무 뻣뻣해져서 좋지 않았어요.

결국 제가 선택한 방법은 아무것도 안 쓰고 그냥 물로만 감는 거예요.
대신 오랫동안 꼼꼼하게 잘 헹궈야 하고, 매일 머리를 감아줘야 해요.
좀 게을러져서 하루나 이틀 정도 머리 감기를 미뤘다간,
그냥 물로만 감아서는 잘 해결이 안 되더라구요.
그땐 다시 식초나 비누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저는 세탁세제도 거의 안 쓰고 세탁볼 여러개를 활용하고,
조금 때가 탄 옷은 미리 빨래비누로 지워서 세탁기에 넣어요.
당연히 주방세제도 거의 안 씁니다.
예전에 부지런했던 시절에는 쌀뜨물을 주로 이용했고,
요즘은 EM발효액과 생협에서 판매하는 고체 세제를 조금씩 이용합니다.
기름기가 없는 그릇들은 그냥 물로만 씻어도 깨끗해져요.

감은빛 2021-07-20 09:51   좋아요 2 | URL
음 쓰다보니 이거 무슨 환경을 위한 실천 간증대회처럼 되어 버렸네요. 죄송해요!

권투를 재밌게 배우셨는데, 그 놈의 나쁜 관장 때문에 그만두게 된 사연을
읽으니 너무 속상하네요.
집에서 거울 보시면서 쉐도우 복싱 연습도 하시고,
만약 공간이 허락한다면 저처럼 샌드백을 들여놓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어디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는 것도 불안하잖아요.
필요한 스킬은 동영상으로 배우고, 혼자 운동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samadhi(眞我) 2021-07-20 09:55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저는 감은빛님처럼 하지는 못해요. 사실 물로만 감는게 진짜 노푸인줄 알지만. (아는 선배도 그렇게 하더라구요.) 근데 그렇게까지 할 자신이 없어서. 냄새날까봐요.

권투는 ㅠㅠ 무릎 때문에 하지 못합니다. 걷는 것보다 달리기가 더 좋은데도 가볍게 뛰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요. 대학 때 춘 탈춤 때문에 ㅠㅠ 무릎이 나빠져서. 사실 요가도 무리라서 줌수업만 겨우 하고 있어요.

붕붕툐툐 2021-07-20 17:23   좋아요 1 | URL
우와~ 여기서 노푸족 친구들(?)을 만나니 너무 반가워요~ 저도 물로만 감는데, 말리는데 훨씬 에너지가 많이 들긴 하지만 만족합니다!ㅎㅎ

samadhi(眞我) 2021-07-20 17:24   좋아요 1 | URL
노푸계 들어야겠네요. ㅎㅎㅎ

감은빛 2021-07-28 17:45   좋아요 2 | URL
와! 툐툐님도 물로만 감으시는군요!
제 주위에 샴푸 안 쓰는 여성들이 몇 있지만,
그들도 그냥 물로만 감는 건 안 된다고 하던데.

진아님. 정말 우리 노푸 모임 하나 만들까요? ㅎㅎ

붕붕툐툐 2021-07-28 17:51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내고 있답니다! 하하핫!!

희선 2021-07-22 0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해 사고가 나고 한해가 지났군요 길면서도 짧은 한해 같은 느낌이 듭니다 처음에는 시간이 아주 안 갔겠습니다 한해가 흘러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지나와서 지금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하고 싶은 운동도 하시게 됐네요 어릴 때부터 갖고 싶어하던 샌드백도 갖게 되셨군요 운동하시는 게 즐거워 보입니다

지난주보다 이번주가 더 덥네요 감은빛 님 더위 조심하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감은빛 2021-07-28 17:47   좋아요 1 | URL
희선님. 안녕하세요.
올해 더위는 참 견디기 힘드네요.
물론 2018년 더위도 견디기 힘들긴 했는데,
그땐 코로나가 없었죠.
저녁 늦게까지 지인들과 시원한 생맥주 마시며
놀다 들어갔기 때문에
더위도 열대야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는데,
올해는 코로나로 사람들도 못 만나고
에어컨도 없는 집에만 박혀 있으려니 정말 힘드네요. ㅠㅠ

희선님께서도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