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왔다!

꽤 오랫동안 한번에 많은 책을 사지 않았다. 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서너권 가량을 골라오는 정도가 한번에 산 걸로는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많았을 정도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씩 계속 늘어나는 책들이 쌓이고 쌓여 더 책을 놔둘 공간도 없었고,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랬다. 그런데 설 연휴를 앞두고 [듄] 신장판 발매 소식에 갑자기 마음이 동해버렸다. 이왕 질러보기로 마음 먹은 김에 보관함도 한 번 털어봤다. 그런데 보관함을 살펴보다가 너무 시간을 끄는 바람에 연휴 전에 배송받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놓쳐버렸다. 정확히는 주문을 다 끝낸 다음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배송 예정일이 연휴가 지나고 한참 후로 바뀌어 있었다. 그제서야 안내를 자세히 읽어보니, 한 20여분만 일찍 주문했어도 연휴 전에 받을 수 있었던 거였다. 뭐 어쩔수 없는 일. 연휴 동안 듄을 읽으려던 계획을 수정해 집에 쌓여 있던 책들 중 한 두 권 정도를 읽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지난 주에 연휴 전에 주문했던 책들이 도착했다. [듄] 6권을 포함해 총 13권이었다. 예전에는 여유가 생기면 한 번에 책을 주문하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동네 서점이나 중고서점에서 책을 소량으로 꾸준히 구매하는 것으로 습관이 바뀌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한 번에 10권 이상의 책을 주문했다. 암튼 크고 무거운 책 상자를 받아들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어서 상자를 열어 제일 먼저 듄 상자를 열었다. 책들과 박스는 외관상으로 별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책을 꺼내 보려니까 책들이 너무 꽉 끼어 있어서 잘 빠지지 않았다. 박스가 너무 작아서 책들이 너무 빡빡하게 들어찬 것 같았다. 이게 조금은 여유가 있어야 부드럽게 스르륵 책을 넣고 뺄 수 있을텐데, 이렇게 빡빡해서야 책을 넣고 뺄 때마다 힘이 들기도 하고, 잘못 힘을 주다가 책이 상하거나 박스가 찢어질까봐 걱정이 들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것 참! 이렇게 비싸게 책을 팔면서 이런 사소한 것들도 못 챙기나 싶다.

책을 꺼내느라 한참 애를 쓴 것 때문에 약간 기분이 상한 탓에, 책이 오면 바로 [듄] 부터 읽겠다는 생각이 바뀌었다. 듄을 장식용으로 책상 위에 잘 놔두고 나머지 책들도 여기저기 빈 공간에 잘 쌓아놓고 제일 먼저 [오 헨리 단편선]을 집어들었다. 큰 아이가 글을 쓰고 싶다고 한참 글쓰기 공부를 하더니 목표로 삼았던 예고 문창과에 합격한 후로 나는 적극적으로 아이에게 이런 저런 책을 골라주고 읽어야 한다고 권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아이가 주로 쓰는 단편소설과 꽁트에 도움이 될 책으로 가장 적당한 것은 단연 오 헨리의 단편들이라 생각했다. 나는 아마 국민학교 5학년 무렵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기가막힌 반전들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강했던지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당시 나보다 5살이 더 많아진 아이에게 오 헨리의 단편들을 바로 추천한 것이다. 두 달쯤 전에 중고서점에 오 헨리 단편집이 하나 있길래 아이에게 사 주고, 나중에 나도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 내가 다시 읽고 싶었던 단편이 이 판본에는 없었다.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엄청난 반전의 단편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막상 그게 없으니 너무 서운했다. 그래서 이번에 민음사에서 낸 판본으로 다시 구매했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그 단편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이번에도 찾을 수 있을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배송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그 단편을 찾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확실히 어릴 때의 기억에 비해 지금 읽어보니 그만큼의 강렬한 반전은 아니었다. 30년이 훨씬 넘은 시간 동안 내 생각이 많이 변한 탓이리라. 그래도 그 어린 시절에 감명깊게 읽었던 걸 다시 찾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얼른 다 읽고 아이에게 갖다 줘야겠다. 그리고 아이가 다 읽고 나면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는지, 인상적이었는지를 물어봐야겠다. 과연 아이는 뭐라고 답할지 궁금하다.

마감 스트레스

지난 주 금요일까지 소식지 원고 하나를 넘기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원래 다른 사람이 쓰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분에게 다른 급한 업무가 생겼고, 원고의 주제가 내가 잘 아는 내용이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큼 잘 쓸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내가 쓰겠다고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맡지 않아도 될 원고를 덜컥 맡아놓고 정작 다른 일이 바빠서 계속 그 원고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착실히 머리 속으로 글의 얼개를 구상해놓고는 있었다. 자리에 앉아 두드리기 시작하면 3시간 정도면 충분히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수요일과 목요일에 갑자기 몸이 좀 안 좋았다. 날씨 영향도 있었고, 업무 복귀 후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인지 금방 피곤해지고 회복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금요일 오후까지 원고를 쓰지 못하고 퇴근하면서 주말동안 완성해서 월요일 아침 출근하면 바로 열어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금요일 저녁에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토요일 밤이었다. 토요일 하루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정말 겨울잠을 자듯 먹지도 않고, 화장실 한 번 가지도 않고 약 20시간 동안 잠만 잤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원고 마감에 대해 떠올렸다.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3시간이면 충분할텐데, 빨리 끝내놓고 마음 편히 주말을 즐기자고 머리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대로 생각만 했다. 내 몸은 이불 밖으로 나가는 걸 거부하고 누워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24시간 이상 아무것도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음악을 틀어놓고 이불 속에서 잠시 뒹굴거리다가 나와서 간단히 먹을 거리를 준비했다. 먹기 전에는 잠시 몸을 움직여 근육을 긴장시켰다. 제대로 운동할만큼 여유는 없으니 간단히 몸을 풀어서 온 몸의 근육을 깨우는 정도로 만족했다. 배를 채우고는 책을 조금 읽다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 기어들어갔다. 잠시 누워서 SNS와 유튜브 등을 보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렇게 자고도 또 잠이 오다니. 정말 겨울잠이라도 자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어차피 오늘 안에만 해결하면 될 일. 조금 여유를 부렸다. 시간이 흘러 늦은 오후가 되었다. 이제는 원고를 써야했다. 써야했는데, 써야..... 아! 왜 이렇게 몸을 움직이가 싫은 건지.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금방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책상 앞으로 가질 못하는 건지. 왜 이불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또 잠이 들었고, 꿈 속에서 나는 이불 속에 누워서 원고 마감 걱정을 하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그 꿈 속에서도, 그러니까 꿈 속에서 꾸는 그 꿈의 나는 또 이불 속에 누워서 원고 마감을 걱정하며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되는데 라고 혼자말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어! 이거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같은 건데. 이거 영화 [인셉션] 처럼 꿈 속의 꿈 속의 꿈 이런 식으로 무한 반복되는 건가 하고 꿈 속에서 생각했다.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꿈에서 깼다. 이제 일요일 저녁이었다. 이쯤되면 정말 일어나서 빨리 글을 써놓고 다시 누우면 될 것을. 나는 그러면서도 이불 속에 계속 머물렀다.

결국 어떻게든 글을 완성해서 월요일 아침이 되기 전에 원고를 보내는 것은 성공했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이것보다 더 잘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자만에 가득찬 생각을 떠올리며 출근했다. 주말은 정말 잠만 자고, 원고 걱정만 하다 시간을 다 보냈다. 꿈 속의 나는 끝없이 걱정과 잠을 반복했다. 그렇게 계속 꿈속의 꿈으로 들어가다보면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 상태에 빠진다면 내 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식물인간처럼 되어 버리는 걸까? 이런 허튼 생각들을 하면서 월요일 아침을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 잤는데도 몸은 여전히 피곤했고, 머리는 멍했다. 또 바쁜 한 주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머리가 지끈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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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4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6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2-24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고 일어나기 힘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꿈속에서도 잠이 오고 잘 일어나지 못해요 실제와 꿈이 섞이고, 어떤 때는 꿈인지 제가 생각한 건지 모를 때도 있어요 감은빛 님은 꿈속의 꿈을 자꾸 꿔서 잠을 많이 잤다 해도 피곤했던가 봅니다

읽고 싶은 책이 잘 빠지지 않아서 아쉬웠겠습니다 그런 건 책이 잘 빠지게 만들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힘을 줘서 빼면 빠지겠지요 책 즐겁게 보시기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1-02-25 22:12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경우 많아요. 희선님. 그게 꿈이었는지, 꿈에선 깬 후에 상상했던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요.

cyrus 2021-02-24 11: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이상하면서도 재미있는 꿈을 꿨어요. 꿈속의 제가 혼자 등산을 하고 있었어요. 하산하는 도중에 책이 잔뜩 꽂힌 책장들을 발견했어요. 저는 야외 도서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책을 그냥 가져갈 수 있게(!) 만든 책장이었어요. 책장에 붙여진 조항에 두 권의 책을 가져갈 수 있다고 적혀 있어요. 그런데 그 순간 욕심이 생겼어요. 왜냐하면 책장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분량이 두껍고 가격이 비싼 책들을 막 골랐는데, 어느새 내 손에 쥔 책들이 사라지고 없는 거예요. 그런 와중에 저는 사라진 책을 찾는 동시에 새로운 책을 찾으려고 계속 책장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예전에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꿈을 몇 번 꾼 적 있어요. 그런 꿈을 꾼 날에 저는 항상 헌책방에 갔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헌책방에 가고 싶은 유혹을 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무의식 속에 책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욕구를 최대한 줄이고 방에 있는 책이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어요.. ^^;;

감은빛 2021-02-25 22:14   좋아요 1 | URL
사람의 욕심이란 건 참 무서워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책 욕심이 클 수 밖에 없겠죠.

저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두껍고 비싼 책들 위주로 열심히 챙겼을 것 같아요. ㅎㅎ

붕붕툐툐 2021-02-2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왤케 공감가요? 하고 놀면 좋을 것을 늘 끝까지 끝까지 미루다가-그 사이 노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어정쩡하게 스트레스만 받다가-하는 패턴. 지금 제가 딱 그런 거 같아요... 새학기 준비 할 거 많은데, 놀 시간도 이제 별로 안 남아서 둘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는데, 지금까진 역시 계속 놀고 있어요..ㅋㅋㅋㅋㅋ

감은빛 2021-02-25 22:20   좋아요 1 | URL
이렇게 격하게 공감해주시다니! ㅎㅎ

저는 늘 저렇게 살아와서 이젠 나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한심해하는 것도 지쳤어요. 그냥 저렇게 살다 죽어야 할 것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