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났다. 어쩌다보니 양력으로 2020년 12월 말에 만나고 다시 음력 2020년 12월 말에 또 만났다. 그 친구랑 처음 만난 건 95년 봄이었으니 약 26년 가량 알고 지냈다. 가족을 제외하고 가끔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들 중에 가장 오래된 인연이다. 아, 어려서부터 친동생처럼 여겼던 38년된 인연이 한 명 있긴한데, 언젠가부터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아주 가끔 잊을만하면 한번쯤 연락을 하기도 하는데, 그도 나도 별 일 없이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성격은 아니라 자연스레 가끔 연락하는 사이조차 되지 못하고 말았다. 작년에 교통사고 이후 내가 먼저 연락해서 회복되면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던 것이 마지막 연락이었는데, 이후로 녀석도 나도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생각 난 김에 연휴에 녀석에게 전화나 한 번 해야겠다. 만약 부산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얼굴이나 한 번 봐야지.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흘렀네. 다시 친구 얘기로 돌아가서 아마 그 친구와 내가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가 되리라고는 그도 나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실은 우리는 서로 그닥 마음이 잘맞는 친구는 아니다. 확실히. 몇 가지 우연이 겹쳐 지금의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되짚어보면 신기하긴 하다. 우선 처음은 대학 동기. 아주 우연히도 그와 나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 같은 학번이 되었다. 정확히 처음 만난 시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초기에 과방에 자주 출입하는 편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초기엔 아웃사이더, 요즘 말로는 아싸라고 부르던가. 과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고 바깥을 겉도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입학도 하기 전 신입생 환영회에서부터 거의 모든 선배들과 친해졌고, 입학하자마자 학생회 선배들의 러브콜이라고 해야할까 부름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걸 받아서, 바로 학년대표가 된, 그야말로 인싸 중의 인싸였다. 이 인싸라는 단어를 최근에 알게되어 이 글에 쓰긴 하지만, 실은 인싸라는 말의 뜻이 잘 와닿지는 않는다. 암튼 초기에 나와 친하게 지낸 사이는 확실히 아니었다. 나중에 그가 말하길 동기들끼리 혹은 친한 선배들과 모여다니는 것이 하나도 좋아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관심 자체가 없었다고 했다.

그에 대한 첫 기억은 1학년 첫 엠티때 역시 동기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장면을 본 것이다. 다른 과는 어떤지 모르겟지만, 신기하게 우리 과 동기들은 대부분 초기부터 엄청 친해져서 첫 엠티를 갈 당시에는 대부분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물론 거기에 쉽게 끼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이 몇 명 있었고, 그 친구는 그런 아웃사이더 중 하나였다. 나는 학년대표라는 아무것도 아닌 감투를 썼다는 약간의 책임감에 그런 친구들에게 일부러 다가가 친한 척을 하곤 했고, 당연하겟지만, 그런 친구들은 나를 오히려 더 거부하며 멀리하기도 했다. 암튼 수많은 사건 사고(당시 내 기준으로 이전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러 종류의 사건들)들이 일어나 나를 패닉 상태에 빠뜨린 그 1학년 엠티에서 혼자 겉돌았던 녀석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우리 과는 여성이 훨씬 더 많고 남자동기가 소수였기 때문에 남자애들끼리 일부러 자주 어울리기도 했는데, 친분관계와 상관없이 동기라는 명분 때문에 억지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자주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다보면 친해지기 마련인 법. 결국 시간이 흘러 그 친구와 나는 친해지긴 했다. 그 친구는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왔다. 즉, 나보다 1학년 위였다는 이야기. 게다가 알고보니 같은 국민학교를 잠시 다녔었다. 즉, 내게는 국민학교 선배라는 이야기. 그런데 이미 학년 초에 재수까지는 말을 놓고, 삼수부터는 말을 높이자고 합의를 해서 이미 반말을 하던 사이였다. 이제와서 다시 선배라고 깍듯하게 존대를 하기는 어색한 노릇이 아닌가. 아마 어느 술자리에서 내가 그를 향해 ˝왜? 국민학교 선배도 선배는 선배니 이제부터라도 선배라고 불러줄까?˝ 라고 물었었고,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아니라고 답했었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물었던 이유는 동기 중에 그의 고등학교 후배가 또 있었는데, 그 역시 처음에는 서로 출신학교를 몰랐기에 말을 놓고 지냈었다가 나중에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걸 알게되었고(사실 관계를 따지자면 이 부분이 미묘할 수 있는데, 몰랐다고 하는 건 후배인 녀석의 입장이고, 분명 처음 소개할 때 출신 고등학교를 언급했기에 알고도 일부러 모른 척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친구의 입장), 그럼에도 그 후배가 그에게 선배로서 존대하지 않는 것을 기분 나빠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는 고등학교 후배는 바로 직전 출신학교이고, 동문으로 서로 계속 엮이는 처지라 기분이 나빴지만, 내 경우에는 아주 오래 전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 시절까지도 그는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국민학교 때 갑자기 전학가기 전까지 살았던) 동네에 살고 있었다.(아마 지금도 그의 부모님께서는 계속 그 동네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언젠가 한 번 그의 집에 놀러가느라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골목길들을 지난 적이 있었다. 그의 집은 어렸을 때 내가 살던 집과 무척 가까웠다. 어쩌면 둘 다 서로 기억은 못하지만 그 시절 서로 마주쳤을 확률이 높다. 그런 인연이 내겐 그가 약간 특별하게 느껴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학년을 마치고 난 겨울, 삼수생과 재수생들이 차례로 군대에 입대했다. 그 친구는 다른 재수생 동기 한 명과 입대날짜와 입대 장소가 같았다. 12월이었는지, 1월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추운 겨울이었다. 동기 남자애들 몇 명이 논산까지 함께 따라가 술을 마셨다. 싸구려 여인숙에서 모두가 취한 그날 밤 그는 내게 어떤 부탁을 했다. 나는 그때 그가 나를 다른 동기들 보다 조금 더 친한 관계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가 입대하고 1년이 조금 지난 후 나도 입대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내가 제대한 후였으니, 그가 입대한 시점으로부터 3년 하고도 몇 달이 더 지나서였다. 그는 휴학하고 바로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고 바로 복학했지만, 나는 휴학하고 1학기가 지나서 입대헸고, 제대 후 1학기를 쉬고 복학했기 때문에 그가 3학년일 때, 나는 2학년이었다. 그래서 이후 학창시절 동안 그와 얽힌 기억은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다. 동기들끼리 어울리는 술자리에서 술을 마신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그 친구는 술을 좋아하지도, 그리 잘 마시는 편도 아니었으니 술자리의 기억이라는 게 그닥 인상적인 것이 없을 수 밖에.

그는 나보다 먼저 졸업해서 서울에 직장을 구해 올라갔다. 나는 나중에 부산에서 활동하던 환경단체를 그만두고 혼자 무일푼으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장 서울로 올라갔다. 좁고 더러운 고시원에 짐을 풀고, 미아리 근처 보습학원 강사 자리를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한 나는 그 친구가 무척 부러웠다. 정장 입고 출퇴근하는 직장인에 번듯한 집을 구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그의 집에 두어번 놀러갔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 혼자 살았던 그는 나중에 여동생 중 한 명이 올라와 같이 지냈고, 더 나중에는 그 여동생이 부산으로 돌아가고 막내인 남동생이 올라와서 함께 살기도 했다. 내가 놀러갔던 그 시절에 그 친구는 혼자 살다가 여동생이 막 올라온 시기였다. 그때 나는 언제 돈을 모아서 서울에 방 한칸을 구할 수 있을까 하고 다소 막막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고시원을 벗어나는 일이 정말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미아리 보습학원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평택으로 가서 활동을 시작했다가 여자친구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는 동안 그와는 자주 소통하지는 못 했던 것 같다. 그 사이 그도 처음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고 뭔가를 하고 지냈었다. 아마 그는 약간 뜬금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내가 결혼식 사회를 부탁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했었다. 자신없어 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내 기대 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결혼식을 잘 진행했다. 신랑에게 팔굽혀펴기를 하라고 명령해줘서, 나로서도 약간 긴장을 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꽤 오래 서로 왕래가 없었다. 그 친구는 부산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경기도 어디선가 지낸다고 했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갔다가 또 어느 순간 경기도로 올라와있었다. 나는 나대로 시민단체 활동과 육아와 집안 일과 돈 버는 일 등으로 바쁜 날들을 지내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이 별로 없었다. 그와 다시 친해진 건 한참 시간이 지나서 내가 이혼하고 혼자 나와 살게된 이후의 일이다. 그게 아마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던 것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어느 지하 맥주집에서 맛있는 수제맥주를 발견하고 연거푸 맥주잔을 비웠다. 아마 거의 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아니 생각해보면 거의 늘 그랬다. 그는 비교적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나마 나에게는 조금 말하는 편이었다. 만나면 주로 떠드는 사람은 나였다. 친구는 대개 내 이야기를 무척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듣곤 했었다. 그의 반응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나는 살고 있다고. 그러나 실은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각자의 삶을 돌아보면 누구 하나 평범한 삶이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어느 날 이 친구를 통해 내 단점을 깨달았다. 나는 아주 친한 관계에서 가끔 너무 내 위주로 사람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격없이 대한다는 것이 어쩌면 상대에게는 실례이거나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내 주위엔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여러 명이어서 그들과 그렇게 지내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었다. 친한 사이라도 서로 생각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고, 서로의 취향이나 고민이 제각각일 수 밖에 없으니 역시나 벽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를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 친하게 지내는 관계로 그를 비롯한 다른 친한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문득 술자리에서 신나게 떠들다가도 잠시 멈춰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혼자 떠드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내가 너무 오버해서 뭔가를 강요하거나 곤란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살면서 짝사랑하는 여성, 여자친구, 애인, 아내 이렇게 사랑하는 이성에 대한 고민만 많았지, (나이 차를 떠나서) 친구라 여길 수 있는 동성에 대해 어떤 생각이나 고민을 해 본적은 거의 없었다. 그냥 친하고 편한 관계라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나를 그 정도 친하고 편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는 게 당연한데도 말이다.

언젠가 그 친구가 결혼한다면 이번에는 내가 사회를 봐야지 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 친구는 너무나도 당연히 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친구에게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그럴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지만, 어쩌면 우리 둘 서로 티격태격하며 까칠한 독거노인으로 늙어갈 확률이 높아보인다.

음, 늙어서도 이렇게 티격태격 댈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좀 끔찍하다. 나이 들면서는 서로 좀 안 만나는 관계로의 전환을 모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애쓰며,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지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이 안타까운 상황을 모면해보고자 한다. 아, 생각해보니 이 글 너무 끔찍한 느낌인데, 올리지 말까 싶기도 하지만, 두드리느라 애쓴 시간이 아까워 일단 등록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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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02-1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이 친구들 사이에서 감초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그런 친구가 있어야지 친구들이 모이고 친구 관계가 오래 이어지는 것 같아요. 제 고향 친구를 소환하면 5인 5색이라서 만나면 늘 티격태격 해요. 나이가 들면서 더 완고해지는 것 같아요. 요즘 친구관계에서도 균형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중요성을 일깨우는 글을 써주신 것 같아서 공감이 컸습니다.

감은빛 2021-02-14 00:45   좋아요 2 | URL
이렇게 공감해주시니 무척 고맙습니다!
어쩌면 만나면 티격태격하는 그런 관계가 오히려 더 건강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이 들때도 있어요.
기분이 나빠도 내색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요.

특별히 제가 감초같은 존재라서라기 보다는 그저 제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참 좋아합니다. ㅎㅎ

붕붕툐툐 2021-02-11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티격태격하는 친구가 있는거 참 좋아 보이는데요? 저도 요즘 동성친구 관계에 대한 고민이 좀 많은데, 친구 얘기 써주셔서 감사해요~ 진짜 이성 관계는 고민과 노력을 많이 들이는데 비해 동성 친구에겐 그러지 못했던 것 같네요~ 그래서 친구가 없나봅니다. 핫핫!!! 요즘은 진짜 북플 친구님들이 저의 최애 친구님들~😻
쓴게 아까워 등록 누르는 그 마음 너무 공감가요!!ㅎㅎㅎㅎ

감은빛 2021-02-14 00:48   좋아요 2 | URL
실은 누구에게나 제일 어려운 고민은 인간관계 고민인 것 같아요. 친구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정말 중요한 존재고 그 친구로 인한 고민을 안 할 수는 없겠죠. 그리고 그 친구라는 틀은 꼭 서로 얼굴을 보고 직접 만나는 관계라 규정할 수도 없는 시대이구요. 그러니 알라딘 서재에서 이렇게 소통하는 분들도 분명 소중한 친구들이죠. ㅎㅎ

쓰다가 분명 이게 아닌데 싶어서 그냥 올리지 말까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만큼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 결국은 등록 버튼을 누르게 되더라구요.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

희선 2021-02-13 0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친구분하고 연락하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오래 그 관계가 이어졌네요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거 좋은 거지요 앞으로도 그런 사이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요 제가 그렇군요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거네요 말보다 글로 말하기... 저는 편지 써서 친구가 없나 싶네요 이제 편지 쓰기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희선

감은빛 2021-02-14 00:50   좋아요 3 | URL
네, 희선님. 글에도 그렇게 썼는데, 지금까지도 이렇게 연락하고 친하게 지낼 거라고는 서로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쩌다 그렇게 되었네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관계에서 정말 중요하고 꼭 필요한 덕목이죠. 희선님이야말로 친구분들 사이에서 꼭 필요한 중요한 존재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