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능력
좀 더 젊었을 때는 머리 회전이 빨라 뭐든 바로 이해하고, 정리하는 능력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라 여겼다. 그리고 내가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잘못이었다는 걸 작년부터 계속 깨달아가는 중이다.
요즘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능력은 공감능력이다. 그리고 나는 공감능력이 부족한 편인라 여긴다. 아마 두 달쯤 전에 어느 회의 자리에서 업무 관계에서 소통이 어려운 사람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라는 얘길 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이 늦어지거나,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자체에 대해 의견을 냈으나, 새로 임원으로 합류할 예정인 한 분이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힘드시겠어요. 얼마나 답답할까!" 그 분의 그 말과 표정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한마디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실제로 나는 답답하고 힘들었고,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남성은 어쩌고 여성은 어쩌고 하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분이 여성이라는 점이 그 상황에서 그 말을 하신 것과 얼마나 상관관계가 있을까? 평소에도 다른 여성분들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남성은 글쎄 그다지 자주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일터인 공용 사무실에 내 책상 맞은편에는 이웃 협동조합 사무국장님이 계신다. 내가 여기 활동을 시작할 때도 계셨으니 벌써 5년 넘게 마주보고 앉아 일하고 있다. 이 분은 50대 여성이신데, 각종 행정업무와 회계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다. 본인 표현으로 간단한 서류도 어려워한다. 물론 말씀은 그리하셔도 몇 년간 조합의 업무를 혼자 해내왔으니, 다소 약한척하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우리 두 사람은 평소 이런저런 업무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고나, 불평하는 경우가 많다. 그 보다 더 나가서 서로 도와주거나, 상대가 어려워하는 분야를 쉽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 분도 나에게 공감능력의 중요성을 많이 일깨워준 분이시다.
3월 초에 일년 중 가장 큰 행사이자, 가장 어렵고 힘든 행사인 총회를 마쳤다. 해마다 안 힘들었던 총회 준비는 없었지만, 올해가 유난히 더 힘들었다.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 힘든 총회를 마치고 조합원들 중에서 수고 많았다고, 고생했다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한 마디씩 건넨 분들은 모두 여성분들이셨다. 아, 물론 남성 중에도 수고했다고 말을 건넨 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내 느낌에 진심으로 내 어려움을 함께한다는 느낌을 받는 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형식적인 인사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평소 나와 친한 사람들 뿐이었다.
이렇게 공감능력의 관점으로만 보면 확실히 여성은 뛰어나고, 남성은 열등하다. 그리고 이 뛰어난 공감능력을 발휘하는 능력자들이 여러 영역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계신다. 특히 활동가들 중에서도 50대 여성 활동가들이 많다. 이 분들의 공감 능력에 나는 오늘도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여유가 뭔가요?
작년에는 1,2,3월 3달 동안 3개 법인의 총회 준비를 했다. 그 중 연합회 1개 법인 총회 준비는 각 회원조합의 임원진 5명 가량이 자주 모여서 함께 준비했고, 또 다른 연합회 1개 법인의 경우 나 혼자서 모든 준비를 해야했다. 그리고 우리 조합의 경우 임원들과 실무자가 1명 더 붙어서 함께 준비했다. 하지만 작년에 나는 혼자 3개 법인의 총회 준비를 다 했다고 말하고 다니곤 했는데, 그 이유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작업인 총회 자료집을 나 혼자 준비했기 때문이다.
3월 초에 우리 조합 총회를 마쳤고, 어제 연합회 총회를 마쳤다. 올해는 2개 법인의 총회를 준비했는데, 작년에는 총회 자료집을 혼자 정리했기 때문에 혼자 준비했다고 다소 과장해서 표현했지만, 올해는 정말 혼자 2개 법인의 총회를 준비했다. 실무자가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a부터 z까지 뭐 하나 내 손이 가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었고, 나는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간 상태로 3달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일터에 동료가 들어와 함께 일하고 있다. 곧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청년인턴제도를 통해 20대의 활동가도 합류할 예정이다. 어제 연합회 총회를 마치고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다시는 이렇게 혼자 다 떠안고 죽을 힘을 다해 일하지 않겠다. 만약 그래야 할 상황이 또 생긴다면 그냥 포기하거나 떠나버릴거라고. 다시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정신을 좀 차리고 살아야겠다. 하고 싶었던 운동도 다시 하고, 공부하고 싶었던 외국어도 다시 배우고, 기타도 다시 튕기고, 제일 하고 싶었던 일, 책도 다시 많이 읽어야겠다.
금주와 금연
불규칙적으로, 비정기적으로 나타나는 관절 통증 때문에 병원에 다녀왔다. 어떤 날엔 손가락 관절, 어떤 날엔 손목, 또 어떤 날엔 발목과 무릎, 어떤 날엔 어깨, 어떤 날엔 골반 통증이 느껴지곤 했다. 제일 잦은 건 손가락, 손목, 무릎이었다. 작년 언젠가부터 아픈 날도 있고, 괜찮은 날도 있었지만, 이제 괜찮아졌네 하고 한동안 나았다 싶은 느낌은 없이 계속 이어졌다.
병원에 가기 전에 나는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의심했는데, 증상이 살짝 다른 면도 있었지만, 대체로 겹치는 면이 더 많다 싶었다. 의사 선생님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래서 혈액 검사를 받았다. 무릎과 손목, 손가락 등 관절의 모양과 움직임을 꼼꼼하게 살핀 의사는 외관 상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음성이었다. 즉, 류머티스성 관절염이 아닌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그 외엔 이렇게 온 몸의 관절이 불규칙하게 여기저기 아팠다가 괜찮아지는 증상이 뭐가 있을까? 다시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데, 어쩌면 이 증상이 뭔지 답을 찾지 못하는 건 아닐까? 평생 따라다니는 통증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겁이 나기도 한다.
지난 번에 병원을 찾은 후로 의사 선생님이 술을 마시지 말것과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을 요청했다. 담배는 많이 줄여서 이젠 평소엔 거의 피우지 않고, 가끔 술 자리에서 한 두대 피우고 말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술이 문제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꽤나 자주 술을 마시고, 그 술 기운에 정서적 위로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어쨌거나 병원을 안 갔으면 몰라도, 갔으면 의사 선생님 말씀을 따라서 하루라도 빨리 이 통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3월은 여기저기 총회가 많고, 중요한 술자리도 많았다. 하루는 친한 후배가 활동하는 협동조합 총회에 갔다가 뒤풀이를 가지 않고 그냥 떠났는데, 후배가 깜짝 놀라며 진짜 많이 아픈거냐고 물었다. 어지간히 아픈 걸로 술을 마다할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만 아픔이 커서가 아니라 괜찮은듯하다가도 다시 나타나면서 계속 이어지는 이 통증이 지긋지긋해서였다.
그렇게 술의 유혹을 잘 뿌리치며 며칠을 버텼는데, 하루는 어이없이 답답한 공무원들의 태도 때문에 완전히 뚜껑이 열려버려서 도저히 술을 마시지 않고는 기분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결국 자주 만나는 술친구를 호출했고,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로 나왔다. 그날 술을 마시고 담배도 얻어 피웠으니, 금주와 금연은 며칠가지 않아 깨져버렸다.
뭐 가급적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되, 어쩔수 없는 경우에는 가볍게 술과 담배를 해주는 것이 아예 한 잔도, 한 개비도 안된다는 강박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것 보다 낫지 않을까? 어쨌든 의사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하고 다시 처방을 받아야겠다.
그 와중에 강양구 기자의 페이스북에서 술에 대한 책 소식을 접했다. 어째 이 책을 읽으면 더 술이 땡길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