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샌다
일요일을 제외하면 저녁이나 밤 시간을 집에서 지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개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에 보니 베란다 쪽 벽과 천장이 젖어 있었고, 곰팡이가 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며칠 지나 다른 쪽 벽에도 곰팡이가 생겼다. 그리고 다시 하루 이틀이 지나 방문 쪽 벽이 젖어 있는 걸 깨달았고, 곧 물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 베란다 쪽 창틀 위 천장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정신 없이 바쁜 와중이라 벽과 천장이 젖어 있음을 느꼈을 때까지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뭘 해야하는 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손을 썼으면 이렇게 나빠지지 않았을텐데. 지난 주 갑자기 상황이 급박하게 나빠졌다. 곰팡이가 생긴 벽면은 시커멓고 큰 둥근 자국이 여러개 생겼다.
다행이 물이 새긴하지만,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수준이라 걸레만 받쳐놓아도 괜찮았다. 암튼 주말 이틀 동안 계속 위층을 찾아갔지만, 계속 사람이 없었다. 월요일 아침에도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물이 새니 연락을 달라."는 내용과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를 현관문에 붙여두고 출근했다. 저녁 늦게 아니 밤 늦게 연락이 왔다. 위층 거주자인 세입자에게 연락을 받은 위층 집주인인 듯 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고 조치하겠다고 했다.
위층에서 물이 새는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주면 좋겠지만, 만약 해결이 안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조금 들고, 지금 벽에 생긴 물 자국과 곰팡이 자국 등은 어떻게 할지도 고민이다. 무척 보기 싫어서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집이 언덕 꼭대기이고, 옛날 집이라 단열이 거의 안 되어 있어 춥고 덥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마음에 드는 점들도 있어서 가능하면 돈을 좀 모을때까지 오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아주 낡은 보일러가 말썽을 부렸고, 물이 새는 일을 겪고 나니 오래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집에 문제가 생기면 사실 세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차라리 내 집이면 내 돈 들여서 제대로 고칠 수 있을텐데. 남의 집 보일러를 거액을 주고 바꿀 수도 없고, 큰 돈 들여서 단열 공사를 할 수도 없다. 무려 18년이나 된 수명이 벌써 지난 보일러를 사용하는 것도, 단열이 안되는 방에서 바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온도 때문에 겨울엔 추위로, 여름엔 더위로 고생하는 것도 다 세입자의 몫이다. 이렇게 물이 새도 집주인은 그저 "위층에 연락해서 빨리 해결해라."는 말 뿐, 한 번 와서 보지도 않더라.
결혼 직후부터 집주인들과 갈등을 많이 겪었다. 결혼 후 처음 얻었던 집에서도 보일러 문제가 터졌었다. 15년도 넘은 낡은 보일러가 당시 한겨울 가장 추운 날 작동하지 않았다. 맨 바닥은 거의 얼음과 같은 상태여서 당시 갓난 아기였던 큰 아이를 도저히 바닥에 누일 수 없어서 애들엄마와 내가 밤새 번갈아가면 안고 있었다. 다음날 보일러 기사가 와서 수명이 지난 보일러라고 지금 고쳐도 임시방편이니 보일러를 갈아야 한다고 했지만, 집주인 아줌마는 멀쩡한 보일러를 우리가 고장난 거라고 오히려 목청을 높였다. 결국 경찰까지 부르는 소동 끝에 우리는 한 겨울에 그 집을 나와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4년 쯤 후였던가. 또 다른 집에서는 수도에서 녹물이 심하게 나왔다. 오랫동안 비어있었던 집이라고 했다. 문제는 분명 집을 보러왔을 때는 녹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사를 여러번 다녔던 경험 때문에 분명 확인했었다. 우리가 집을 보러 가기 전에 누군가를 시켜 미리 수도를 틀어놓았던 것이 분명했다. 암튼 우리는 곧바로 녹물 문제를 해결해달라 했지만, 집주인과 부동산은 계속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저녁에 아이를 씻기려면 미리 물을 5분 이상 틀어놓아야 녹물이 아닌 물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녹물을 틀어놓는 시간이 조금씩 줄긴 했지만, 매번 흘려버려야 하는 녹물이 나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3달이 지났다. 그동안 수십번을 집주인과 전화로 싸우고, 부동산 사장과도 얼굴 붉히며 난리가 났었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하고, 변호사 친구의 도움을 받아 내용증명을 보내고, 법정에서 만나자고 집주인에게 통보했다. 사실 소송으로 가더라도 별로 승산이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그렇게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집주인은 그제서야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지만, 내가 다 거절했다. 다음엔 변호사를 통해 연락할거다. 지난 3달 동안 우리가 입은 피해와 고통도 다 청구할테니 기다리시라고 했다. 지난 3달간 그렇게 피해다니고 연락이 안되던 집주인은 곧바로 우릴 찾아왔다.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돌아가라고 했다. 손해배상을 얼마나 청구할지 변호사 자문을 받는 중이니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결국 집주인은 곧바로 수도 배관 교체 공사를 약속하고, 그동안 입은 불편에 대해 소액의 보상을 약속했다.
그 다음 집에서는 베란다에 물이 새는 문제와 집주인의 위장전입 문제가 있었고, 계약 기간 만료 3개월 전에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통보가 있었다. 우린 계약금을 주면 이사갈 집을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이 집주인이 계약금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우리가 들어올 때도 미리 계약금을 걸었고, 그 돈으로 이전 세입자가 이사갈 집을 구한 거라고, 우리나라 임대 체계가 다 그렇게 돌아가는 걸 모르냐고 아무리 입 아프게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조건 자기는 줄 수 없다는 태도였다. 결국 전화로 언성을 높이고 싸우다가, 이번에도 변호사 친구의 도움으로 내용증명을 보낸 후에야 해결되었다.
그렇게 여러번 집주인들과 악연을 맺은 후에 나는 어지간하면 싸우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방식을 선택하며 살았다. 무조건 세입자는 약자일 수 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번 겨울 보일러가 고장났을 때, 보일러 기사님이 18년 된 보일러라고 확인해줬을 때, 오래전 그 15년 이상 되었다는 보일러가 생각났다. 그땐 갓난 아기가 있어서 다급한 마음이었겠지만, 지금은 별로 화가 나거나 큰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오는 주말에는 좀 문제가 되겠지만, 어쨌거나 고장날 때마다 고치고, 그 비용을 청구하면 될 일이다. 꼭 낡은 보일러를 갈아달라고 집주인과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고장날 때마다 불편할 뿐이다. 암튼 천장과 벽에서 새는 물이 빨리 해결되길 바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주말에 아이들이 다녀가고 혼자 남았을 때, [라라랜드]를 봤다. 아마 세번째던가? 아니 네번째인거 같기도 하다. 고가도로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시작 장면과 중간쯤 그 유명한 탭댄스 장면과 맨 마지막 장면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니 시작 장면과 탭댄스 장면은 그저 연출이 참 잘 된 장면이라 생각나는 것이지만, 맨 마지막 장면은 라이언 고슬링의 감정 때문에 잊을 수가 없다. 그 감정에 푹 빠져들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속 반복해서 돌려보고 있었다. 피아노 연주와 이루지 못했던 바람과 그의 눈빛.
이유를 찾는 것은,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겠지. 어쩌면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는데, 실수가 있었던 것일까? 몇 번을 같은 장면을 돌려보며 나는 어느새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마 알 수 없겠지만, 어쩌면 후회한다해도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겠지만, 다 알고 있어도 어쩔수 없이 자꾸만 괴롭고, 슬프고, 아프고, 아쉬워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