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이 심하면서 고집이 세다. 이런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남의 말에 개의치 않고 제멋대로이다. 감정 자체가 자유자재다. 귀가 얇은 사람처럼 다른 사람에 의한 변화보다는 제마음의 변화가 관건이다.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욕을 하더라도 제가 신경쓰지 말아야겠다 싶으면 놀랍게도 아무렇지도 않다. 의지적이다. 자아가 매우 강하다.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려내야할 치부도 아니다. 다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 들인다. 내가 어떻게 생겨먹은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앞에 한 말밖에 전하지 못한다. 잘 모르겠다는 무책임한 말. 그렇지만 진실한 마음이 담긴 말이라서 그렇다.

검질긴 나의 성미로 하여금 보는 이에 따라 유하게도 독하게도 본다. 그들이 어떻게 보든 나는 나를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오늘은 예전과 다른 나를 발견한 날.

나의 감정을 저 꼭대기까지 올려놨다가  저 끄트머리까지 추락시키는 능력이 있다, B는. 이제는 휘둘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도 소용없다.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경우가 생겨 버렸다. 예전부터 그랬을 수도 있지만오늘에서야 확실히 알아버렸다.

"뭐 하면서 지내니?"

뭐라고 말해야 하나. '알다시피 새학기가 시작 돼서 하는 일없이 분주해요.'라고 말해야 하나, 구체적으로 '도서관 대출실에서 일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누구 누구의 책을 읽고 있다고 혹은 어떤 데 관심을 갖게 돼서 공부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그 짧은 시간에 대답을 찾아본다. 길게 얘기하지 않는 이상 어느 대답도 단편적일 수 없겠구나하고 생각한다. 바삐 나갈 준비를 하면서 예의상 묻는 말에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게 아닌가 하기도 했다. 생각만 많은 채로 입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대답하기 싫은 거지? 말해 줄 필요가 없다는 거지?" B의 특유한 말투는 나를 주둑들게 한다. 상대를 비꼬면서 어떻게 하면 더 기분이 나쁠까를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제 맘에 차지 않으면 그 사람의 위치에 상관없이 맞받아치지만 그러지 않는다. 더없이 불쾌해야할 말씨지만 나는 불쾌하지 않다. 단지 주눅이 들어 말이 잘 안 나오니 내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하고 싶다.

"다 만만하니? 아님 막막하니?" 자꾸만 밖으로 나갈 듯 하다가 묻는다. 

"절/대/ 만만하지 않아요. 막막하고 두렵고 염려 돼요." 똑똑히 '절대'란 말을 끊어 말한다. 고작 나온 말이다. 무슨 선문답을 하고 있는 걸까? 근황을 묻고 '무엇'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거다. B가 의도한 '무엇'과 B의 말끝에 곧장 튀어나온 나의 대답 속에 담겨있을 '무엇'은 동일하다는 사실. 내가 휘황찬란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나의 진심을 봐줄 거란 믿음. 아무도 모르게 울고 있는 나를 B만은 봐줄 거란 믿음. 그렇지만 B의 말 한마디에 또 변할 그 위태위태한 믿음. 

나를 의지하게 해주는 말을 남기고 정말 떠난다. 나가면서 이러저러한 말 끝에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면서 '적극 추천'이라 말한다. 이말이 자꾸 멤돈다. 즐거워진다.   

언제부터일까? 학교 오기 전에 웹상에서 알게된 그때부터일까?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사소한 나의 태도와 말들을 기억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일까? 보름달, 화성, 맛 없는 커피, 새벽, 여행, 메일, 단 한 번의 답신, 가수, 염주, 등, 깨진 유리잔, 사회과학서적, 옆자리, 두부전골, 밀가루 음식, 사전, 오해, 서명... B와 관련된 세세한 기억들이 휙휙 지나가고 또 채우고를 반복한다.

아무도 하지 못했던(못하리라 믿었던) 나의 마음을 단숨에, 뜻하지 않고, 별 노력없이 휘저어버리는 B.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내게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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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04-09-02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궁금하네요. 빛그림자님의 단단한 마음을 뚫고 들어간 그가...

빛 그림자 2004-09-0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을 만나고 나면 늘 어깨가 뻐끈거려요. 평소와는 달리 긴장하고 주눅들고 안 그러려고 할수록 말을 버벅대는 실수를 연발하거나 아무말도 못하게 되고... 안지도 꽤 오래됐는데 늘 처음 만나는 것같은 인상을 주는 성격이에요, 그 사람은. 낯가림은 없는 편인데도 자꾸 불편하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많이 못하고 있고요. 이런 계획을 세웠답니다. 언제 날잡아서 같이 술 먹는 거예요. 그리고 잔뜩 취해서 꼬장부리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터뜨려버리는 거예요. 그런 날이 오긴 오려나. 피...
 

어제 용인에 있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친구는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며 그를 죽이고 싶다고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무서울 수 있는가에 대해 격분을 한다. 그리고 그렇더라도 무자비한 살의를 갖은 자신이 의아스럽다고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사람을 하나 둘 잃어가는 일이라고도 덧붙인다.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절실한 욕망과 알량한 도덕심 등을 이유로 실제로 저질러 버리지 못하는 절망감 사이에서 친구는 더없이 힘들단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순하고 선한 사람에게 마구 대한다. 이기적으로 손해라고는 눈꼽만큼도 받지 않으려하고 타인과의 선을 명확히 긋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너그러워진다. 착하다고 만만하게 보는 것일까. 착하기 때문에 무한한 배려를 요구하는 걸까. 무리한 요구를 너무도 뻔뻔스레 하는 사람은 알고 있을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에 기분이 상하게 되고 어쩔 때는 깊은 상처가 된다는 것을. 상처도 고통도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살의 충동을 갖게 되는 일은 그 자체로 당혹스럽다. 말이야 쉽게 "죽여버렸으면 좋겠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행하기는 드물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이 사그라지게 마련이고, 그 섬뜩한 뒷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해서 살의를 실행에 옮기는 일은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만큼 어렵다. 사람으로서 할 짓 안 할 짓, 해도 될 짓과 하면 안될 짓이라는 큰 틀 안에 이것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고 자신이 인식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감히'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알량한 도덕심이라고 해도 좋고 단순히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도 해도 좋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시시때때로 품었다가도 자신을 다독여가기도 하고 잊어버리려고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 육체적인 죽임만이 살인이랴. 저주스런 살의를 갖게 되는 마음을 접는 건, 그 마음 안에서 이미 그 상대를 죽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 너는 없다, 이미. 이보다 더 무서운 죽임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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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있는 거니? 너의 소식이 몹시나도 궁금하다... 몸은 건강한 건지...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 건지...밥은 잘 먹는 건지...

네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단다... 친구로서 배신감만을 남기로 훌쩍 이 곳으로 떠나온 나...

네게 정말 미안한 마음때문에 메일 보내는 것도 정말 조심스러웠단다...

난 아직도 어두운 길에서 나의 갈 길을 몰라 자꾸만...자꾸만...넘어지고 있단다...

요즘들어 계속 생각하는 건...

내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 했었던가? 그래...난 항상 방향만을 추구해 왔던거야....그래서...계속 시간만 흘려보냈던거지... 미련스럽게도...방향 못지 않게 속도도 중요하단 사실을 난...이제서야 깨달아버렸던거야... 지난 1년이...2년이...내게 중요한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하면 할수록...

난 이곳에서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면서..방향잡는 법을 배우고 있단다...

나의 헛된 망상과 허상이 방향의 중심을 이끌고 있었던 터라..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어긋난 길로만 가게되고...속도는 느려지고...난 지쳐가고...

이젠 순수한 마음으로...가식의 탈을 벗고...한 걸음 한 걸을 나아가기로 했단다... 비록 허무하게 시간은 흘러가 버렸고...그로 인해...내 몸과 마음은 흐트러졌지만...이 일을 계기로 내 새로운 인생을 살련다...

Y야...네가 많이 그립고..그립단다...너의 귀여운 웃음과....잠을 무척이나 좋아하던...그리고... 모든게 그립단다...

정말 보고싶구나...한국에 돌아가면...

나의 친구...널 힘들게 한 내가..감히 널 친구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넌 나의 하나뿐인..진정한 나의 벗이였어... 너의 모든 계획과 다짐들이 모두 이루어지길 바라며...

이스라엘 키부츠 야헬에서...

 

이스라엘로 갑작스럽게 떠났던 내 친구. 그 친구가 두 번째로 메일을 보내왔다. 줄곧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상심한 마음을 숨기고 있었던 나는 괴로웠다. 순간 순간 미워한다고 내뱉고 자주 보고도 싶어서 서러운 눈물을 꽤나 쏟았었다. 그랬음에도 친구가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보낸 첫번 째 메일을 읽고서 답신을 하지 못한 건 나의 모난 성격 탓이었다. 괜찮다는 척을 하려면 시종일관 그래야할 테지만 변덕이 죽끓 듯 나의 태도는 뭔가에 휘둘려있었다. 그래서 친구한테 이런 상처를 줬던 걸까? 녀석이 떠날 때 나한테 미안해하는 거 모르지 않는데 왜 눈물이라도 철철 흘리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있는 듯한 나의 태도. 나는 그즈음 다른 친구들에게 이 친구 소식을 전하면서 배신감 느껴진다고 말했었다. 분명 배신감이라고 또박또박.  

아마 그때부터였겠다. 눈물겹도록 보고 싶은데도 그렇지 않다고, 미운 마음은 친구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 얼마 후에 사그라들었는데도 여전히 밉다고. 속으로 끊임없이 말했다. '니가 미워.'  '니가 보고 싶지 않아.' 어쩌면 그 친구가 이스라엘에 머물기로한 육개월의 시간을 견뎌내는, 견뎌낼 나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볼썽사나운 명백히 못난 그 방법을 거둬들인다.

나도 네게 미안했다고 그리고 많이 그립다고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길고 긴 메일 속에 친구의 안부와 일상과 생활을 묻고 나의 일상과 나의 생활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같이 겪었던 수많은 추억을 끄집어내고, 또 이따금씩 방향을 못 잡아  헷갈리고 혼란스러운 우리의 이때에 대해서도. 그동안 마음이 없었음을 인정한다. 그동안. 그토록 절실하면서도 그러면 하루 하루가 힘들까봐 왜곡하고 부정해오던 진실. 나는 정말 마음을 잃고 살았던 거다. 이제 그 마음을 되찾음과 동시에 친구에게 거리를 좁히며 거침없이 다가간다. 사랑하는 내 친구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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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남해금산에 오른다. 해질녁 남해는 붉게 젖어 있고 섬들은 안개에 점점이 가라앉고 있다. 부처가 온 날이었다. 사람들은 보리암 탑 둘레를 왼쪽으로 끊임없이 돌았다. 나도 무리에 섞여 그렇게 돌았다. 그것은 중심을 세우는 일이며 곧 신을 지향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이라니. 내게 과연 그런 게 있었던가. 있다면 변함없이 모든 이미지와 만물이 그것이다. 

   해가 지고 구불구불 연등이 켜진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바닷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대가 있는 세상의 깊은 것으로 내려왔다. 

   방랑 서른 여덟 해다. 그 동안 나는 이 말을 붙잡고 살아왔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떠돌아 다닐 수 있는 저 위대한 독립의 탁발 정신!

 

   그런데 나는 왜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그렇게 걷고 있었던 걸까?

 

   검불을 쓰고 사막의 화염 속을 지나온 곳 같다. 하지만 객사하지 않았다. 때로 세상의 아름다운 퐁경을 홀로 목격하기도 했다. 그 숱한 낮과 밤 사이의 이미지들- 먼데 섬들. 제 스스로 타 버리는 황금빛 꽃들. 어느 무덥던 오후 창가에 앉아 있던 낯 모르는 여인의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답던 옆모습. 모래와 폭풍. 뜨거운 여름 숲. 다시 서쪽으로 날아가는 저녁 새. 장미가 핀 검은 담장 아에서 들려 오던 어린아이의 고달픈 울음소리. 지루한 밤비. 이국의 눈 내리는 아침 카페테리아에 앉아 겨울의 연인에게 쓰던 편지. 그리고 또한 미처 말하지 못했거나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것들.

   쓰려고 했다면 아마 좀더 썼을 것이다. 그러나 1996년 봄부터 나는 차츰 일념(一念)을 잃어 갔다. 그 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내가 쓰는 말과 글도 점점 왕겨처럼 느껴졌다.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황겨가 날려 가는 꿈은 밤마다 계속됐다. 그리하여 나는 더 자주 떠나 있게 되었다. 사물과 이미지와 언어가 하나로 일치되는 꿈을 꾸며. 하지만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꼭지점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정삼각형의 팽팽한 긴장 안에서만 삶이 보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만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뿔싸. 그것은 마음만 먹는다면 튼튼한 아이 셋을 생산할 수 있는 세월이다. 기껏 내가 가진 언어의 껍질을 날려 보내고 생에 대한 정념과 그 그립던 일념을 회복하는 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다니.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다. 어차피 경과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들은 그러므로 그 경과를 뜻하고 있다. 

   오직 전심전력하는 마음으로 써야겠다. 누가 말했듯 작가는 신분적인 존재가 아니라 분명 행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내가 그토록 갈구하는 자유가 생겨난다. 이런 <자유>가.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하여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1996년 초여름

                                                                윤대녕      

 

책 속지에 '정혜욱 님 1997. 7. 10. 윤 대녕.'이라는 글. 그리고 포스트 잇에 붙여진 말. "...그래도 책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니? 괜찮은 책 나오면 보내줄께. 글 열심히 쓰길 바래." 

내가 자주 가는 헌책방에서 새로 들어온, '연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혜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선물한 책이었다. 책을 살 때 이 글을 발견하지 못했었고, 시험 기간에 틈틈이 읽으면서도 보지 못했고, 지금 '작가의 후기'를 옮기면서 이제야 발견했다. 기분이 묘하다. 다른 사람의 흔적을 보는 일은. 두 사람의 추억을 은밀히 훔쳐보는 듯한 죄책감이 든다면,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어떻든 지금 정혜욱이라는 사람. 이 사람은 여전히 글을 쓰고 있을까?

시험 준비를 하면서, 과제를 하면서 단편 하나 하나씩 짬짬이 읽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시험을 마치고 밀린 과제는 며칠 더 미뤄놓고 약간은 여유로운 이 때, "와와"하고 탄성을 질러가면서 읽은 윤대녕의 이 작품집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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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쪽에서 저편 책상으로 컵라면을 집어던졌다.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널브러져있는 책상에 한 가지를 보탠 셈. 물이 끓는 동안 컵라면 비닐을 건성건성 벗기면서 벤자민 화분에 시선을 둔다. 요즘들어 이파리를 계속 떨궈내는 벤자민이 안스럽다. 속상하다. 스무 번째 생일에 이 나무와 함께 무럭무럭 크라고 말한 사람이 생각나서 더욱 그렇다. 벤자민에 그 사람의 이름을 붙이고 자주 조곤조곤 말도 붙이고 흥얼흘얼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벤자민 화분에 향한 관심과 애정은 곧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이 아니었나 한다. 가령 얼마 전에 내 곁에서 떠나간(어쩌면 내가 떠나보낸) 그 사람이 문득 떠올랐었다. 대뜸 전화해서 시비를 걸었고 한참을 혼자서 잘잘못을 따져대다가 배터리가 다 돼서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곧장 마시던 커피를 화분에 들붓는 극악무도한 짓을 한 걸 보니 벤자민은 곧 그 사람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엊그제 고향집에 내려가면서 이 화분을 가져 가려고 했다.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고 화가나서 내 눈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것을 죽일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컸었다. 나무에다 뜨거운 커피를 부은 사건은 나의 성정에 대한 의혹을 가져다 주기 충분했기 때문에. 내 곁에 두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사할 것 같았다.  나도 안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만 먹고는 그러지는 못했다. 열흘 전에 분갈이를 한 이 화분의 무게가 만만치가 않았고 그 화분을 옮기는 수고로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 자체만 가져가려고 했는데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내 고향집으로 향하는 길에 이 녀석이 상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을 했다. 살리려고 가져가는데 가다가 죽이면 더 억울할 것 같았다. 그래도 가지고 있으면 뭔짓을 할지 모른다는 마음도 들었고 갈핑질팡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막상 집으로 가는 날에는 벤자민을 까마득하게 잊었다. 집 밖에까지 나갔다가 한 번은 지갑을 두고 와서 또 한 번은 휴대폰을 두고 와서 몇번이나 바삐 들락날락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곁에 두고 나의 변화나 벤자민의 변화를 지켜 본다. 나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갑작스럽게 그 사람이 그리워지면 울상짓다가... 경험으로 미루어 분노의 감정은 차츰 삭아지는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사실 나는 곧잘 흥분했다. 화가나는 일이 있으면 마음 속으로만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저 혼자 길길이 날뛰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먼저 흘러내리는 일도 많았다.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하고픈 말은 기어이 내뱉었다.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부끄러운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의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내 말만이 옳은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난다. 이내 나의 행동과 말이 미치게 후회스럽고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당시의 분노와 후회의 감정도 사그라든다. 나를 미워하던 마음도. 단순히 지나간 일에 대한 그리움이 다사로운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들,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그 공간들. 그래서 이유도 댈 수 없을 정도로 너그러워진다. 지금은 화를 내지만 언젠가는 나 자신이나 그 사람에 대해 너그러움을 가지기를 바랄 뿐이다. 진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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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9-0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시절에는 둥글둥글함에 병적일 정도의 혐오감을 가졌었답니다. 주위에 견고한 벽을 쌓기도 하고 높은 곳에, 혹은 낮은 곳에 작은 창을 만들어두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만 빼꼼이 고개를 내밀었었죠. 한살 두살 먹다보니, 나 아닌 생명체와 부대끼며 살다보니 모서리가 깎이고 날도 무뎌지고 때론 없던 넉살까지 어설프게 생겨나 이 변화들에 희한해하며 재밌어하며 즐기고 있어요..^^;; 음.. 벤자민은 고무나무 종류 중에서 가장 무던하고 튼튼한 녀석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너무 튼튼해서 때론 홀대받기도 하죠. 꼭 속깊고 무던한 오랜 친구 같다고나 할까요. 사실 저희집에도 못난이 벤자민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쁜 모습으로 자라지 않을 것 같아 은근히 시들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이런 바람을 하는 제가 너무 무섭더군요. 그래서 열심히 물 주고 먼지도 닦고 해요.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푸른잎이 무성합니다. 님의 속깊은 친구, 벤자민도 님의 변화를 지켜 보고 있겠죠.^^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