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묘지· 안개꽃· 5월· 시외버스· 하얀

 

            퇴계로에  와서도 그  山이   보인다.  3·1로까지  걸
        어가는데,  봄바람  맞으며 가는데,  산은  흔들리는 자
        기 그림자를 발목까지 담그고 자꾸 뭔가 게워낸다.
        흙덩어리인  자기를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를
        무등 태운 山 그림자가 시내까지 따라온다. 죽겠다!
        좀  봐줘.  그래도  온다.  뻐꾹새  울음의  半音 플랫에
        실려,   山이   가까이,  멀리,  그만  따라와!  해도,  市
        외곽 시립  공원  묘지  千여  구를 싣고 淸溪川까지 흘
        러온다.


                    廣州崔氏愛淑之墓         
                    陰曆  一九五四年  九月  十四日  生 
                    陰曆  一九八O年   四月  十八日  卒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수철이  아빠

             청계천   2가.   횡단보도를   바삐   교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그녀는   아이를   업
         고   나타났다.  그   山이   게워낸   異物質인 듯한  하얀
         안개꽃을   아이가   쥐고    흔들어댔다.    거기서   무슨 
         은방울  같은  소리가  났다.  맹인을  위한  신호  소리를
         들으며  쌩쌩(生生?)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먼저  넘어갔다.  사라지는가   했는데   그녀는  다시  자
         동차  부속품상  앞   잡상인들   틈에서   나왔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만
         두라고  했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이 땅으로
         보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두   손을  그었다.   지금  보
         다시피  우리는   서로의  발등을  밟고  있다고  나는  말
         했다.  뱃속에서  아기가  죽어간다고  그녀는  화를 냈다.
         이  에 오려면  으로  을  내려야  한다고  나는 말
         했다.  나는  적십자사   헌혈차를 피해 갔다.  그리고  뒤
         로   돌아서서  그녀에게   正色하고  말했다.  그대  앞에
         내   슬픔이 좀 과했나보오. 그대  앞에  나의 심령과학적
         자의식이.

 

저번 학기 시론 시간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월요일 단 하루에  7, 8, 9 교시 연강인데다가(쉬는 시간도 오분밖에 없고.)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정해진 과제와 발표가 있었다. 월요일 힘들게 수업 마치고 나면 그 압박감에서 헤어나오면서, 토요일까진 과제를 까마득히 잊고 지낸다. 일요일에는 해야하는데 하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월요일 당일, 다들 공강 시간에 전산실이든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미친 척하면서 자판을 두들긴다. 그러다 수업 시간에 만나면 비척거리고 있는 나의 사랑스런 동지들. 나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간혹 하다 하다 못하겠으면 아예 포기하고 마음을 비웠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서 한꺼번에 기말고사 지나고 과제를 제출하곤 했다.  

한 시간 발표 수업하고 오분 쉬고 또 두 시간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수업하신다. 사람은 생체 리듬이란 게 있다고 하는데 해거름 즈음이면 졸리기 시작한다. 세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곤욕인데가  선생님께 끊임없이 반응을 보여야하는 하는지라 고단하다. 또릿또릿한 눈망울에 눈이 마주치면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든가 하는 일도 은근히 고달프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셨을까?)

 마지막 시간이었을 거다. 강의실 벽면에 있는 시계를 힐끔힐끔하는 학생들이 늘고, 이제는 애처로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지만 일찍 끝내줄 기미는 좀체 보이질 않는다.

이런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선생님은 황지우의 시 <호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그리고 이 시<에서· 묘지· 안개꽃· 5월· 시외버스· 하얀> 프린트물을 나눠주셨다. 여섯시가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그쯤이면 수업 끝내주리라는 열망은 버리고  시체처럼 앉아있었을 때다. 

선생님은 먼저 <호명>을 읽어주셨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름 없는 그들의 죽음이 나열되는데, 왜, 어찌 죽어갔는지 말할 수 없는 시대의 광기가 섬뜩해졌다. 그렇게 은폐되었던 죽음, 그들의 죽음이 알려졌다가는 체제에 치명적일 그들의 죽음이 가슴을 쳤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서는 어머니와 자식의 몇 마디 대화에서의 여백 그러니까 그 침묵이 눈을 시리게 했다. 그러다가  <에서· 묘지· 안개꽃· 5월· 시외버스· 하얀>을 듣는데 눈물을 참지 못했다. 산 언저리에 묻혀있는 죽은 자, 미처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죽은 자, 불임의 시대에서 한 번만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하는 죽은 자, 그 죽은 자를 감지하는 화자. 그들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은폐되고 그러므로 그걸 까발릴 경우 불온할 수밖에 없다. 광기, 폭력 아래의 죽음. 제목이 의미상 연결되지 않고 분할되어 있는 것처럼 쉽게 말할 수 없는 그들의 죽음이 있었다.

남 앞에서는 좀체 울지 않는데도 고이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했다. 옆에서 졸고 있던 H는 훌쩍거리는 나 때문에 깨고 H옆에 있던 L은 울고 있는 내게 화장지를 건넬까 말까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들 말고도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머물러 있다는 걸 느끼고는, 울고 있는 내가 민망스럽고 창피해서 곁에 있는 H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H나 L도 웃고. 그때 선생님은 날 보더니 "Y야. 넌 이 시가 웃기니?"라고 말씀하신다. 시 읽는 데 몰입했던 분답게 전후 상황도 모르는 선생님이 야속했다. 이런 시를 들으면서 웃는 나를 경멸하고 있는 듯한 말투를 느꼈던 이유에서다.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ㅡ나 혼자 그렇다고 느꼈겠지만ㅡ 에 뭐라 말은 못하고 있고, H는 조그맣게 "Y 울었는데...."라고 말을 흐린다. 선생님께는 들리지 않고 그렇게 찝찝하게 수업을 마쳤다.

나는 곧장 과사무실에서 조교선생님에게 수업 시간에 시 들으면서 울었다는 얘기를 했고, 조교선생님은 뜻밖이라고 그러셨다. 아마 그러는 아이가 없을 거라고 하시면서. 또 그 얘길 아는 선배 Y한테 했는데 나중에 그 선배와 시론 선생님이 같이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선배는 내 얘길 했단다. 선생님이 불쾌해해서 내가 서운해했다고 하면서. 선생님은 그랬냐면서 자기가 그 때 시를 좀 잘 읽긴 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었던 거다.

나는 가끔씩 그렇게 분명한 시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제시대나 독재시대로. 만약 그렇다면 뭐가 뭔지도 잘 모르고 휘둘려서가는, 복잡하기만한 이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괴롭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 싸울 거리가 명확히 정해진 그 시대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을까? 나의 눈물이 제 감정에 겨운 동정심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또 내가 과연 그 시대의, 아픔의, 절망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보지 않고서 지나간 때를 그려낸, 그리고 있는 어떤 것을 보면서 놀랍게도 기시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창피한지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는 일, 순간적으로 찌릿찌릿 전율같은 통증을 느끼는 일, 그들의 입장에서 부르르 떨면서 분노하는 일. 이게 다 아닌가. 나는 무력하다. 무력한 나를 보는 일은 괴롭지만 그래도 이럴 때 적어도 내가 밉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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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04-10-09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님의 글도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그저 추천이나 한 번 누르고 갑니다.

빛 그림자 2004-10-09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감정에 겨워서 눈물을 찔끔거린다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거, 그리고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어요. 그래서 참 많이 속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