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안도현 얘기가 나왔다. 그와 친분이 있음직한 선생님은 아동문학 얘기 중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 불리는 안도현의 <<연어>>를 읽어봤느냐고 내게 묻는다. 선생님은 단순히 수업 도중 자기 얘기를 계속 해나가기 위해 그냥 내게 질문한 거였는데 내가 그 흐름을 깨버렸다. 물론 나는 별다른 의식없이 말한 거였지만. 읽었냐고 물어서 "아니요."라고 대답한 것까진 좋았는데 "안도현을 안 좋아하는데요."라고 대답해버렸다. 에잇. 선생님은 얼마나 사람을 안 좋아하면 책까지 안 읽냐고 되묻는다. 그것도 얼굴에 금을 긋고.

또다시 순간적으로 나온 말. 그의 시를 꼼꼼히 읽어봤고(양심에 손을 얹고 사실 그랬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초기 시는 괜찮았지만 그뒤로 이러저런 동화니 산문이니 뭐니 하곤 낸 글들이 마음에 안든다고. 민들레 꽃씨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 최악이었다고 말이다. (근데 내가 언제부터 이 선생님 수업 시간에 말을 많이 했던가.) 선생님은 그럼 좋아하는 시인을 묻는다. 시를 읽어봐야 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최승자 나희덕 오규원 최승호 김선우---" 끝이 없다. 좋아하는 시인이 아니라 알고 있는 시인을 대라고 착각한 것처럼. 혼자 주절주절대다가 한도 끝도 없을까봐 "좋아하는 시인은 많아요." 하고 마무리짓는다. 선생님은 못마땅한 표정이 눈에 훤히 보이시고 그래도 <<연어>>는 괜찮다고 읽어보라고 하신다. (괜찮든가, 말든가.) 언제 한 번 안도현을 초청해서 말해봐야겠다고 하신다. 우리 학과 학생 중에 무지하게 당신 싫어하는 학생이 있다고.  

사실은 안도현의 시를 그렇게 찬찬히 꼼꼼히 읽어보진 않았다. 외려 설렁설렁 대충대충 읽어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겠다. 그의 시를 읽고 환호성을 질러댄 일도 없고(원래 감탄이 많은 사람이라 무덤덤한 반응은 드물다.) 그의 시 중 특정한 어떤 시를 기억해내지도 못하고---. 또한 <<민들레처럼>>같은 책은 대중적인 인기에 편승해 쉽게 쓰여졌고 또 쉽게 잊혀질 그런 책을 낸 사람이라 내가 그를 안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이런 것들은 싫어할 만한 근거라고 하기엔 빈약하다. 싫어하려면 싫어하는 이유가 또렷해야지.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의 글이 싫다고 말하려면, 그 사람이 쓴 글을 우선 읽어보고서 조목조목 싫은 이유를 대야지 그것도 아니면서 두리뭉실 싫다고 내질러 놓기만 하는 거. 그 사람을 무엇이라 규정해버리는 거. 이런 걸 내가 참 싫어하면서도 실제로 자신이 그러고 있을 때를 발견할 때의 놀라움. 아마도 대중적인 인기를 받고 있는 누군가를 별로라고 말할 때, 그렇게 말하는 자기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지 하는 생각도 했다. 언론에서든 아니면 지인들이 어떤 책이 좋다고 읽어보라 하면, 그 책만은 어떻게든 안 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도 그런 데 연유하는 게 아닐까.

어떤 무엇에 대해 그것이 어떠어떠하다는 규정은 폭력이다. 그 어떤 무엇이 가지고 있는 다른 특성을 배제하고 다른 고유함은 철저히 무시할 수 있기에. 그 규정이 터무니없는 근거를 제시할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떠어떠하다는 단호함이 그것이 가진 고유성을 여실히 드러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되어야할 텐데, 진정 이것이 필요할 텐데, 그런 점에서 나는 자꾸 어긋나고만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무어라 말을 해놓으면 고대로 따라가는 일이 수월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의식하고 애쓰는 일. 그리고 뭔가 합당한 이유를 내는 일. 물론 이러려면 품이 많이 들겠지만 그렇더라도 어떠랴. 이게 바른 것이 맞닿아있음이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단호하되 왜 그런지를 말할 수 있길. 단순하게 싫은 감정만 앞서진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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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04-11-22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학생일 때,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연애를 하게 된 선배한테 안도현의 시집 <외로고 높고 쓸쓸한>을 선물 받았더랬어요. 그 선배랑 연애하는 게 너무 지겨웠고, 군대 가자마자 잘 됐다 쫑을 냈고, 그러다보니, 덩달아 안도현은 쳐다도 보지 않았어요. 근데, 이상하게도 그 제목은 오래 남아요.

사춘기 감성이나 자극하는 시도 아닌 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마당에, 그래도 안도현의 시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좀 편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도 미덕은 아닐까요? 시인 안도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왠지 변명 모드가 되어버리는군요.

어제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보다가, 네루다와 로르까를 외워대는 체와, 네루다를 불쑥 대는 트럭 운전사 아저씨를 보면서, 조금 부러웠어요. 그냥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좀 편안하게 만날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제게도 시는 너무 어려기만 하거든요...

빛 그림자 2004-11-2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정말 그래요. 금방 세 시간 연강인 시인론 수업을 마쳤는데(예전에 말한 그 선생님의 다른 수업이요.) 그중 한 시간은 황동규에 관해서였어요. 영화 '편지'였나? 어쨌든 거기서 그 <즐거운 편지>가 나오잖아요. 영화와 더불어 덩달아 유명해진 그 시. 처음에 그 시를 접하곤 그 시가 삶에 대한 통찰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시적 깊이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딱 소녀적 감수성 취향의 시라고 비판해댔죠. 어쩌면 그런 비판보다 친구들이 노트에 적어서 좋다 좋다 하니까 꼴난 반발심에 별로라고 말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떻든 그 시덕분에 시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것 같아요. 분명하게요. 왜냐면 정말 어렵거든요, 시는. 하지만 것보다 제게 더 문제되는 건 제멋대로 터무니없이 판단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제 눈이고요. 늘 마음만 앞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