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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도 무게가 있습니다
이철수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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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본다. 그린 이가 담고자한 의도나 주제를 벗어나더라도, 내 나름의 느낌을 믿는다. 가끔은 무작스럽고 얼토당토않은 결론으로 치우칠망정 그 느낌을 쉽게 버리진 못한다. 남들과 똑 같이 읽어내는 건 쉽기에,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내가 받은 인상과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의 그것을 설명하려면 나의 감성과 논리는 한없이 모자라고 미숙할 뿐이라서 문제는 문제인 셈.

판화가 이철수에게는 아저씨란 호칭이 너무도 잘 어울릴 듯하다. 이문재의 <내가 만난 시와 시인>를 읽으면서 충북 청주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도종환 시인 얘기를 떠올렸다. 도종환이 이철수더러 칼잡이라고 부르는 격의 없는 터수라고 했고, 그를 욕심이 없고 순박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나온다.('30초 기억력'인지라 내 기억이 확실하진 않다.) 어찌됐든 도종환과 이철수가 그 지역에서 무슨무슨 장을 맡게 되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이제 그 일을 못한다고 했단다. 이유는 마을 이장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해서.

그래서겠다. 이철수를 만나게 되면 복닥대는 작은 방에서 밤새 겉치레 없이 진솔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또 판화하면 떠오르는 단순함, 여백, 표현의 절제가 판화가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진다. 판화가 이철수의 사람살이를 통해, '열심히 살아야 할텐데--- 그게 힘드네요.'하는 그의 마음을 통해, 그의 작품을 더더욱 신뢰하게 하고 여기서 사색하게되는 힘을 얻게 된다. 가령 이런 마음들.

마땅히 내 것이란 못된 소유욕으로 꾸역꾸역 욕심을 늘려 가는 사람들, 딱 그 만큼의 반성과 사색이 모자란 사람들, 게으르고 빈둥대고 얻으려고만 하는 사람들, 천박한 이기심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 같잖은 분별에 싸우기에만 급급한 사람들, 관념에 쌓인 선험적인 판단을 가진 사람들에 낀다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지만 이미 그런 사람들 속에 포함되어있는 나를 돌아본다.

더디 가더라도 바르게 가려는 사람들, 바지런히 자기 몫을 행하는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 일상적인 삶에 의미를 찾는 '한없는 자유'를 가진 사람들, 소나무 껍질의 더뎅이같이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현재를 이겨내는 진솔한 사람들, '우리가 사는 시절의 모순과 질곡'을 깨뜨리는 지극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이 사람들 속에서 나를 끊임없이 저저이 살펴보고 고운 마음으로 온전한 삶을 살길,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 있길 진정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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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 예술가의 초상
에밀 졸라 지음, 권유현 옮김 / 일빛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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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작품>을 읽기 전, 그리고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감정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문학을 학부생 때뿐만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여일하게 하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하는 고민 탓이었다. 휴학을 하겠다는 친구들, 그리고 전과를 한다는 친구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든 생각이었다. 어떻든 쉽게 결론나지 않을 답을 내리는 과정인 이즈음, 나는 사소한 일에 의기소침해지거나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절망감과 우울함을, 혹은 역시나 사소한 일에 우쭐하며 자만심을 갖게 되는 그런 우스운 극과 극의 감정들을 경험하고 있었던 거다.

그야말로 예술가와 시대와의 불화가 내용인 이 <작품>의 끝장을 덮고서 나는 어떤 새로운 힘을 느낀 것도 같다. 작중인물 클로드의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고나서 나는 찹찹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의 예술에의 몰입과 몰두, 즉 그 열정을 보면서 돌연 심기일전하고자 하는 다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습관처럼 마음을 다잡을 때마다, 벌이는 책장 정리를 감행했다. 정리하고 해봤자 책들을 다시 새롭게 나열하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책꽂이 정리 중 책 사이에 끼여 있던, 언젠가 내가 썼던 A4 두 장 분량의 '자기소개서'를 발견했다. 거기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내가 공부하는 문학이, 도대체 사회의 주변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에 대해 참으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작품을 쓰는 이들이나 문학을 연구, 비평하는 이들이 지구상에 굶주려 있는 아이에게 당장 빵 한 조각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문학은 지금 우리 주위에 굶주려 있는 것을 알려 줄 수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문학이 광속도의 이 시대에 소외되어있는 계층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온통 방황하며 혼란스러워할 때, 가슴에 울림을 주며 방향을 일깨워준 것도 바로 문학 작품임을 기억해 냈습니다. 문학은 인간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인간학'이므로 말입니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마따나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가 끝난 다음 시민사회의 구현과 함께 생겨난 것이 소설이므로, 소설이 바로 곧 인류사가 아니겠느냐는 말을 납득하고 난 후부터는 더욱이 소설이란 장르를 마음에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제 자신이 자랑스럽고 대견하고 기특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소 장황했다. 그렇지만 이게 국문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나의 꾸밈없는 진솔한 심정이 아니었나 싶다. 마냥 설쳐대는 건방이 될지언정, 혹은 멋모르고 나대는 치기가 될지언정 적어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내게는 중요했다. 이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내게 어떤 확신과 열정을 안겨다 줄 것이기에 말이다.

<작품> 속 클로드가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 비평가들과 대중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거나 혹은 그들을 비난해도, 괴팍한 성미를 드러내고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음에도 나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를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그의 예술가 친구들처럼 울컥하며 분노했고, 한 아내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로 충실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를 감히 이해하고 용서했다. 나는 어쩌면 대세에 비껴나길 바라는 내가, 세상에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을 나의 모습을 시리게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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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 치명적 유혹, 매혹당한 영혼들
이명옥 지음 / 다빈치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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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문외한 나임에도 마냥 좋은 화가가 있고, 작품이 있다. 그리 많은 작가와 작품을 접해보진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미술가의 작품을 보고 나서,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느낌을 갖는 것은 실로 매력적이다. 내 식대로 가치판단하기 바쁜 나지만, 내가 잘 모르고 있는 미술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일은 내가 작품을 느끼는 정도에 기여를 하므로 미술 서적을 가끔 읽는 편이다. 미술 서적이라고 말하고 나니, 뭐 대단한 책인 것 같지만, 내게 있어서 미술 서적이란 미술에 관해 담고 있는 그런 내가 이해하기 쉬운 책일 뿐이다.

<팜므 파탈>은 팜므 파탈을 주제로 쓰인 책이다. 팜므 파탈이란 여성상을 주제로 잡고, 그에 해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와 그녀들과 관련 있는 매혹적인 그림들과 함께 싣고 있다. 팜므 파탈은 '세기말 탐미주의와 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요부형 여성 이미지'를 말하는 것으로, 그때의 사람들은 그녀들을 '사랑에 빠진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숙명의 여인'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그녀들은 자신들의 매력을 이용해서 남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렇게 생각되기를 강요당한 게 아닐까, 한다. 남성들의 선택은 팜므 파탈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아름다운 그녀들은 자신이 가진 매력을 한껏 이용해서 기존의 체제가 만들어 놓은 관습과 도덕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려한다. 그녀들에게 있어 타고난 아름다움은 자기가 이루려는데 적극 활용 가능한 장점이자, 자신을 유지시켜나가고 지키기 위한 무기로 돌변할 수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남성을 악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사악하고 음탕한 요부일 따름이라고 정의내리기엔 매우 불합해 보이는 것이다. 일상성의 평온함과 안락한 질서 유지를 바라는 기존의 체계는, 남성성의 폭력은 그녀들이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부인하고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그렇지 않았거나, 혹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근대성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 성격을 지닌 여성들이 아니었는가 한다.

쪽마다 테두리를 만든 것이 내게는 매우 조잡해 보였다. 사소한 거에 트집을 잡는 것 일 테지만. 여하튼 저자가 그림에 대해 뭐라 뭐라, 작가에 대해 뭐라 뭐라 말한 내용은 흥미로웠다. 몰랐던 분야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감은 매번 흐뭇하다. 다만, 팜므 파탈이란 말이나 그 의미를 기계적이게 반복한다는 느낌도 들어 글을 읽어나가는 데 약간의 지겨움은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인들의 그림을 살펴보는 일은 즐거움을 한가득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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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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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소설은 하나같이 해학과 풍자의 건강한 유쾌함과 그 무엇이 진탕 버무려져있다. 범인들의 속되고 저속한 몸짓과 말로 웃음을 유발하되 건강하다. 단박에 웃게 만들지만, 건강한 웃음으로 하여금 돌이키고 생각해봤을 때, 종종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직 그의 작품을 꼼꼼히 다 읽어보지 못했기에 성급하게 말하는 감이 없진 않지만, <순정>을 통해 그의 문학의 특징이라 말할만한 것이 발견된다. 마치 판소리문학의 그 대중성을 엿보는 듯하다. 읽기 위해 보급되기 보다, 창자가 청자에게 들려주고 보여주었기에 쓰인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사물이나 온갖 대상을) 과장하고 열거하고 상투적으로 표현하고 그려주고 보여준다. 한 사람의 창가가 다수의 청자를 대상으로 들려주었기에 피치 못한 거다. 앞서 말한 방법들이 청자가 오로지 들으면서 인식해야했기에,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한들 과장하고 열거해 의미를 파악하게 하지 않으면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다. 들으면서 부족한 부분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한껏 보태어야만 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이야기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목소리를 반영한다. 그래서 단성적이 아니라 다성적이다. 여러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민중들의 목소리가 발현되는 순간이다. 이때 그의 이야기는 빛을 본다. 삶의 본질에서 한 치도 비껴서본 적인 없는 그 민중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한한 힘을 얻게 된다.

그의 소설은 전복과 모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순정>에서는 범속한 무리들은 결코 가지지 못한 기이한 출생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치도'란 인물을 정면에 내세운다. 고대소설에서의 전형적인 영웅구조 이야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성석제는 이것마저 한껏 비튼다. 단연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출생 부분이다. 이치도의 어미가 이치도의 태몽을 말하는 내용에서 범속함을 뛰어넘으면서 그 범속함의 터울에 갇히는 인간을 만난다. 이치도가 천부적으로 가진 재능이 남들을 이롭게 하지 못하면서 해를 끼치는 훔치는 일로 설정한 부분도 주목해야할 바가 아닌가 싶다. 그는 남에게 호감을 주는 타고난 인물 생김새와, 이야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남들이 그 이야기에 솔깃하게 해서 듣게 하는 무구한 힘에 끈기까지를 갖추고 있고,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민첩함을 자랑할 수 있는 능력도 그가 타고난 재능이다. 이같은 재능은 작품의 한 주인공이, 그것도 영웅의 일대기를 답습하고 있어 무진 거창할 듯하지만, 그 실상은 세상에 뒤쳐진 사람들의, 중심부에 서지 못한 주변부의 인물들 대변하기도 하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힐 터. 이치도를 비롯한 단순하지 않는 특이한 성격의 인물들이 제 한 몸 불살라 독자를 웃기게 하는 것처럼 보임은 작가의 능청스러움 덕이다. 그네들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연민과 인간애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한다. 그런데 <순정> 이 작품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인물들의 그야말로 씨알도 안 먹힐 어색하고 작위적인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여성의 수난사가 읽는 내내 불편했다는 정도이다.

여담인데, 현대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 성석제에게 강연회를 부탁하면 으레 성석제는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한다. '그래도 돼요? 저, 하나도 안 재밌는데요. 저 정말 하나도 재미없는데 그래도 되나요?'하고. 그러고보면 내가 생각하는 성석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싶다. 여러 사람들과 모인 각종 모임에서(특히 술자리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그런 걸쭉한 입담으로 많은 사람들을 웃어 제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너무도 당연히 가졌던 것 같다. 여하튼 그에게 말하고 싶다. 다소 싱겁지만, 그래도 투정처럼 묻고 싶다. '그래도 돼요? 이렇게 웃겨도 되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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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 제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해경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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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가끔은 옆에 있던 애먼 사람을 때려가며 유별나게 웃어 제치기도 했다. 결코 짧지 않은 분량이며, 작가가 말하는 게 하도 장황하고 어수선해서 다소 거치적거치적하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쉬지 않고 단번에 읽어내려 가게 하는 힘은 바로 재미에 있더라. 작품을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서 시종일관 경쾌함이 있었다. 작중인물 '그'나 서술자는 세상을 빈정거리기도 하고 배배 꽈서 은근한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짐작과는 너무도 다르게 굴러가는 우리네 인생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소설이다. (소설이기에 바로 세상이나 인생을 담고 있으리라. 당연히.)

소설 속의 그, 그는 소설을 쓰지 못하기에 시방 위기의 남자이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기에 걱정 또한 없었던, 흘러가는 시간에 자신을 방관하고 있으면 무사하고 태평할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안일의 시간들도 제몫이 될 수 없었다. 그와 동명이인이었던 L의 소설을 감격 받으며 읽은 기억을 들추어내며 갈팡질팡하다가 아내가 소설을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행여 자신의 본색이 소설에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소설 쓰기를 다짐하는 그. 아내의 말대로 '목숨 걸고' 써보려고 해도 통 잡히지 않고, 소설과 허구와의 문제로 고민하고, 기억대로 글을 써보고자한다. 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던 소설 쓰기는 지지부진하다. 그러면서 겪게 되는 여러 일들. 아니 사건들보다는 소설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그의 내면풍경은 자못 인상적이다. 어쩌면 글을 쓰고싶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고민해봤음직한 아니면,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작품 속에 나오는 L처럼 '소설가가 아닌 나는 없다는 걸 깨닫'는 다면, 그러니까 글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전존재가 바스러질 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는 글이 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좀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상황이 온다는 건 장담할 수 없으니, 혹시 그런 상황이 오면 절망의 나락에서 헤매이고만 있을 수 으니 그냥 글이 쓰고 싶을 때는 써보는 거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게,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따위는 집어치우련다. 뭔가 끄적여보고 싶은데,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고 말하며 되지도 않을 피해의식에 싸여있을 이유는 하등 없을 테니. 뭔가 끄적여보고 싶다는 건, 적어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거니까 되려 그것을 감사하려고 한다. 쓰다가 영 아니다 싶으면 접으면 되는 거고. 언젠가 Y에게 동시대의 그럴 듯한 작가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면 어쭙잖은 소설 쓰기를 멎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렇다. 그래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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