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쪽에서 저편 책상으로 컵라면을 집어던졌다.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널브러져있는 책상에 한 가지를 보탠 셈. 물이 끓는 동안 컵라면 비닐을 건성건성 벗기면서 벤자민 화분에 시선을 둔다. 요즘들어 이파리를 계속 떨궈내는 벤자민이 안스럽다. 속상하다. 스무 번째 생일에 이 나무와 함께 무럭무럭 크라고 말한 사람이 생각나서 더욱 그렇다. 벤자민에 그 사람의 이름을 붙이고 자주 조곤조곤 말도 붙이고 흥얼흘얼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벤자민 화분에 향한 관심과 애정은 곧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이 아니었나 한다. 가령 얼마 전에 내 곁에서 떠나간(어쩌면 내가 떠나보낸) 그 사람이 문득 떠올랐었다. 대뜸 전화해서 시비를 걸었고 한참을 혼자서 잘잘못을 따져대다가 배터리가 다 돼서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곧장 마시던 커피를 화분에 들붓는 극악무도한 짓을 한 걸 보니 벤자민은 곧 그 사람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엊그제 고향집에 내려가면서 이 화분을 가져 가려고 했다.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고 화가나서 내 눈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것을 죽일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컸었다. 나무에다 뜨거운 커피를 부은 사건은 나의 성정에 대한 의혹을 가져다 주기 충분했기 때문에. 내 곁에 두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사할 것 같았다. 나도 안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만 먹고는 그러지는 못했다. 열흘 전에 분갈이를 한 이 화분의 무게가 만만치가 않았고 그 화분을 옮기는 수고로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 자체만 가져가려고 했는데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내 고향집으로 향하는 길에 이 녀석이 상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을 했다. 살리려고 가져가는데 가다가 죽이면 더 억울할 것 같았다. 그래도 가지고 있으면 뭔짓을 할지 모른다는 마음도 들었고 갈핑질팡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막상 집으로 가는 날에는 벤자민을 까마득하게 잊었다. 집 밖에까지 나갔다가 한 번은 지갑을 두고 와서 또 한 번은 휴대폰을 두고 와서 몇번이나 바삐 들락날락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곁에 두고 나의 변화나 벤자민의 변화를 지켜 본다. 나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갑작스럽게 그 사람이 그리워지면 울상짓다가... 경험으로 미루어 분노의 감정은 차츰 삭아지는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사실 나는 곧잘 흥분했다. 화가나는 일이 있으면 마음 속으로만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저 혼자 길길이 날뛰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먼저 흘러내리는 일도 많았다.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하고픈 말은 기어이 내뱉었다.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부끄러운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의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내 말만이 옳은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난다. 이내 나의 행동과 말이 미치게 후회스럽고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당시의 분노와 후회의 감정도 사그라든다. 나를 미워하던 마음도. 단순히 지나간 일에 대한 그리움이 다사로운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들,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그 공간들. 그래서 이유도 댈 수 없을 정도로 너그러워진다. 지금은 화를 내지만 언젠가는 나 자신이나 그 사람에 대해 너그러움을 가지기를 바랄 뿐이다. 진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