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남해금산에 오른다. 해질녁 남해는 붉게 젖어 있고 섬들은 안개에 점점이 가라앉고 있다. 부처가 온 날이었다. 사람들은 보리암 탑 둘레를 왼쪽으로 끊임없이 돌았다. 나도 무리에 섞여 그렇게 돌았다. 그것은 중심을 세우는 일이며 곧 신을 지향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이라니. 내게 과연 그런 게 있었던가. 있다면 변함없이 모든 이미지와 만물이 그것이다. 

   해가 지고 구불구불 연등이 켜진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바닷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대가 있는 세상의 깊은 것으로 내려왔다. 

   방랑 서른 여덟 해다. 그 동안 나는 이 말을 붙잡고 살아왔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떠돌아 다닐 수 있는 저 위대한 독립의 탁발 정신!

 

   그런데 나는 왜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그렇게 걷고 있었던 걸까?

 

   검불을 쓰고 사막의 화염 속을 지나온 곳 같다. 하지만 객사하지 않았다. 때로 세상의 아름다운 퐁경을 홀로 목격하기도 했다. 그 숱한 낮과 밤 사이의 이미지들- 먼데 섬들. 제 스스로 타 버리는 황금빛 꽃들. 어느 무덥던 오후 창가에 앉아 있던 낯 모르는 여인의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답던 옆모습. 모래와 폭풍. 뜨거운 여름 숲. 다시 서쪽으로 날아가는 저녁 새. 장미가 핀 검은 담장 아에서 들려 오던 어린아이의 고달픈 울음소리. 지루한 밤비. 이국의 눈 내리는 아침 카페테리아에 앉아 겨울의 연인에게 쓰던 편지. 그리고 또한 미처 말하지 못했거나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것들.

   쓰려고 했다면 아마 좀더 썼을 것이다. 그러나 1996년 봄부터 나는 차츰 일념(一念)을 잃어 갔다. 그 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내가 쓰는 말과 글도 점점 왕겨처럼 느껴졌다.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황겨가 날려 가는 꿈은 밤마다 계속됐다. 그리하여 나는 더 자주 떠나 있게 되었다. 사물과 이미지와 언어가 하나로 일치되는 꿈을 꾸며. 하지만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꼭지점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정삼각형의 팽팽한 긴장 안에서만 삶이 보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만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뿔싸. 그것은 마음만 먹는다면 튼튼한 아이 셋을 생산할 수 있는 세월이다. 기껏 내가 가진 언어의 껍질을 날려 보내고 생에 대한 정념과 그 그립던 일념을 회복하는 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다니.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다. 어차피 경과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들은 그러므로 그 경과를 뜻하고 있다. 

   오직 전심전력하는 마음으로 써야겠다. 누가 말했듯 작가는 신분적인 존재가 아니라 분명 행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내가 그토록 갈구하는 자유가 생겨난다. 이런 <자유>가.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하여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1996년 초여름

                                                                윤대녕      

 

책 속지에 '정혜욱 님 1997. 7. 10. 윤 대녕.'이라는 글. 그리고 포스트 잇에 붙여진 말. "...그래도 책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니? 괜찮은 책 나오면 보내줄께. 글 열심히 쓰길 바래." 

내가 자주 가는 헌책방에서 새로 들어온, '연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혜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선물한 책이었다. 책을 살 때 이 글을 발견하지 못했었고, 시험 기간에 틈틈이 읽으면서도 보지 못했고, 지금 '작가의 후기'를 옮기면서 이제야 발견했다. 기분이 묘하다. 다른 사람의 흔적을 보는 일은. 두 사람의 추억을 은밀히 훔쳐보는 듯한 죄책감이 든다면,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어떻든 지금 정혜욱이라는 사람. 이 사람은 여전히 글을 쓰고 있을까?

시험 준비를 하면서, 과제를 하면서 단편 하나 하나씩 짬짬이 읽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시험을 마치고 밀린 과제는 며칠 더 미뤄놓고 약간은 여유로운 이 때, "와와"하고 탄성을 질러가면서 읽은 윤대녕의 이 작품집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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