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진리의 출발은 불안과 공포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단다. 이말을 Y에게서 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나 지금 불안해 하고 있는데...' 딱히 나를 꼬집어 한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오로지 나를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사물은 배경이다. 상대와 나만이 주체다. (왜? 그와 나 둘만 휘황한 빛을 받고 있다고 하시지?) 명백한 착각.(옳소!) 그렇지만, 그래서 더욱이나 그 사람이 고맙다. 그리고 특별하게 여겨진다. (뭔가 통하는 게 있을 것만 같아서.)
사람들은 자주 불안해한다. 특히나 자기가 생각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당하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기존의 질서와 체제와 관습에서의 일탈을 두려워하는, 변화를 겁 내는 사람들. 어쩌면 그것보다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불안하다는 말이 더 잘 들어맞는다. Y는, 이럴 때 하이데거가 말하는 의미의 비본래적인 가치로 무장하면 불안이 사라진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그대로 걸어가리라 마음 먹는 일에서 불안스런 마음이 놀랍게도 없어진다고.
난 어떤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우선 흥미있어 한다. 다음엔? 설득시키기 바쁘다. 그래도 내 말에 수긍하지 않으면 흥분한다. 더 나아가면? 감정을 싣고 싸우게 된다고 해야 하나? 이성을 꼭 붙들고 사는 사람인지라 상대에 대한 애정은 마땅히 전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딱히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사실은 그건 일찍이 내팽겨쳐 버리고 단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돌변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 흥분의 이유란 것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휩쓸려갈까봐 불안해서일까? 아니면 나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서일까? 나의 말만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고, 단순히 그 사람의 말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어서가 이유에 더 근접한다. 상대의 말은 적어도 내게만은 폭력이고, 내가 여기에 이것마저 놓아 버리면 나의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다는 같은 절실함이 크다. 나는 작고 미약하니까. 가진 게 참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내게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불안은 이런 거다. 남들이 정해 놓은 길을 고대로 따라가면서 안전하고 수월한 너른 길로 전환해버릴까봐. 여기에 행여나 혹할까봐. 내가 하려는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결국에는 스스로마저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를까봐. 나는 불안하고 공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