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용인에 있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친구는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며 그를 죽이고 싶다고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무서울 수 있는가에 대해 격분을 한다. 그리고 그렇더라도 무자비한 살의를 갖은 자신이 의아스럽다고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사람을 하나 둘 잃어가는 일이라고도 덧붙인다.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절실한 욕망과 알량한 도덕심 등을 이유로 실제로 저질러 버리지 못하는 절망감 사이에서 친구는 더없이 힘들단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순하고 선한 사람에게 마구 대한다. 이기적으로 손해라고는 눈꼽만큼도 받지 않으려하고 타인과의 선을 명확히 긋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너그러워진다. 착하다고 만만하게 보는 것일까. 착하기 때문에 무한한 배려를 요구하는 걸까. 무리한 요구를 너무도 뻔뻔스레 하는 사람은 알고 있을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에 기분이 상하게 되고 어쩔 때는 깊은 상처가 된다는 것을. 상처도 고통도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살의 충동을 갖게 되는 일은 그 자체로 당혹스럽다. 말이야 쉽게 "죽여버렸으면 좋겠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행하기는 드물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이 사그라지게 마련이고, 그 섬뜩한 뒷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해서 살의를 실행에 옮기는 일은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만큼 어렵다. 사람으로서 할 짓 안 할 짓, 해도 될 짓과 하면 안될 짓이라는 큰 틀 안에 이것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고 자신이 인식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감히'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알량한 도덕심이라고 해도 좋고 단순히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도 해도 좋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시시때때로 품었다가도 자신을 다독여가기도 하고 잊어버리려고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 육체적인 죽임만이 살인이랴. 저주스런 살의를 갖게 되는 마음을 접는 건, 그 마음 안에서 이미 그 상대를 죽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 너는 없다, 이미. 이보다 더 무서운 죽임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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