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라
  이성호(lsungho2@yahoo.com)

잘 받았지요

잣이랑 쵸콜렛이랑 약 두통
풍성하니 고마움이 담겨 있어
함박 웃음을 피우고,

잘 먹고 더욱 건강에 힘쓰는
할베와 할메가 되어 야지요 ^^ ^^ ㅎㅎㅎ

수고 했어요.

배달해주신 분께 대신 감사를 전해주시요...

핸드폰으로 하니까
본인의 요구에 의하여 당분간
정지 시켰다고해서 인사를 못했지요....

2004 / 06 / 20

양희순 (hsyang1029@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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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水巖 > 1951년도의 스트라이크와 보습반

  •   초등학교 6학년생들의 스트라이크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원효로에 남정국민학교(초등학교) 였다.  이 학교는 일제시대에 일본 아이들만 다니던 학교여서 학교도 튼튼할뿐아니라  전 교사가 난방시설도 잘되어  있었다.  심지어  교실마다 도시락 덮히는 시설도 있었다.

  6.25 전쟁이 나고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다시 9월 28일 서울을 탈환을 했다가 1.4후퇴로 모두 피난갔다가 몰래 서울로 잠입해서 살던 서울 시민들,   그리다가 우리는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우리  학교는  시설이  좋와 미군들에게  빼앗기고  인근  ㄱ국민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그 서글프고 허탈한 생각은 말할 수 없이 컸다.

  ㄱ국민학교는 집에서 먼저 다니던 학교보다 조금  멀었지만  그런대로 다닐 수 있었던것은 먼저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과 친구들이 많었기떄문이다.  물론 피난가서 오지 않은 친구들도 많었다.

  ㄱ국민학교 원 학생들과 그곳  선생님들은  은근히 텃새도 부리고 우리들을 냉대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우리 선생님이 담임을 맡고 계셨고  친구들이  옹호도 해주고 해서 버틸 수 있었다.

  그시절의 에피소드 한 토막 -

  나는 그 시절에도 공부를 잘 했다.  담임선생님인 강○○선생님이  하루는 날 부르신다.

  왜그러시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선생님 사모님이  어디를 가셔서 집이 비니 집 좀 가서 지키라는거다.  공부 시간에 친구들은 공부를 하는데 나는 공부를 잘 하니까 몇 시간쯤  빼 먹어도 되니 집 좀 지키라는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선생님댁 지켜 드렸다.  그 후로 가끔  나는, 때로는 딴 친구와 함께 집 지키기 출장을  나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 강선생님이 발령이 나서 이웃 ㅎ국민학교로 가셨다.

  우리들은 눈 시울을 붉히면서  그때부터 천대받는 타교생이 되 버렸다.(우리들의 옹호자인 선생이 안계심으로 해서 느껴지는 자격지심일런지 모르나)

  그런데 며칠 지나자 또 친구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나 둘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자꾸 없어지게 되자 이들을 추적했다. 그리고 이들이 ㅎ국민학교로 전학 아닌 전학을 해서 다니는것을 알게 된 우리도 ㅎ국민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강선생님은 우리에게 호소도 하고 화도 내셨지만 우리는 막무가네로 강선생님 교실 뒷자리에서  공부를 했다. 

  1951년도?의 스트라이크 ! 

 우리는 거의 학교를 안 나가고 학적도 없는 학교로 가서 공부를 했다.

 학교도 빼앗기고 선생님도 빼앗긴? 우리들은 그렇게 ㄱ국민학교으로의 등교를 보이콭 하고 투쟁아닌 투쟁?을 했지만 결국은 강선생님의 간청과 호소로 어쩔수 없이 ㄱ국민학교에 되돌아가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앨범이라고 ?  4.6반판 크기의 사진 한장이 전부다.

 

  • 보습반과 훈육소를  아시나요 ?

  그렇게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을 치루었다.  전쟁중이라 학교별로 시험을 치룬게 아니라 국가고시나 다름없게 전국에  똑같은 문제로 시험을 봐서 그 시험 결과를 가지고 원하는 학교에 지원을 해서 들어가는  그런 제도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시험을 보았고 학교를 지원했고  그렇게 합격했고 더러는 떨어져서 2차학교, 또는 3차학교로 지원해서 들어갔다.

  나는 물론 1차 학교 그것도 최상류? 학교 3군데중 한 학교를 지원했고 합격했다.   그때 500점 만점에서 400점 이상이면 최 일류를 들어가고도 남는 그런 점수를 받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있게 된다.  졸업할때가 되어서 졸업을 시키고 중학시험을 치룰때가 되어서 그렇게 시험을 치루어서 합격을  시켰으나 막상 다녀야 할 중학교가  서울에는 없었다.

  9.28로 서울을 탈환했다가 중공군의 투입으로 1.4후퇴로 전부 피난갔다가 비공식적으로 흘러들어온 서울 시민, 서울은 그래서 공식상으로는 미수복지구였고 모든 학교는 부산 혹은 대구 등지에  본교가 내려가서 수업을 하였지만 막상 서울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정부에서  생각해  낸것이 급한데로 만든것이 보습반이다.

  보습반이 무어냐고요? 

  우리들을 졸업시킨  초등학교에 보습반을 두어서 아이들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이지요.

  우리들은 졸업했고 5학년은 6학년이 되었고,  갈곳없는 졸업생은 7학년쯤 되는 보습반            

  그렇게 해서 한 서너달 있었는지(확실한 시일은 기억은 안남) 자 서울에 중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그 이름도 괴상한 훈육소(訓育所)다.

  서울에 네군데 ? 훈육소를 두고, 말하자면 종합중학교인데 왜 이런 해괴한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지방에서는 이때 종합중학교라고 불렀는데 말이다.

  서부훈육소는 광화문에 있던 경기여중을 그렇게 불렀고,  우리들은 남부훈육소라해서 청파동 입구에 있던 신광여중에서 개소를 해서 1차든 2차든 3차든지간에 남쪽에 사는 애들은 모두 이 훈육소에 몰아 넣고 한반에 100여명이 넘게 집어 넣고 수업이라고 하는 그런 전시 학교에서 우리는 공부랍시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영어를 가르치던 예쁜 여자 선생님한테서 공부를 잘했다고 미군용 노트 한권 받고 기분 좋아 했다.  왜 기분 좋았냐고 ?  예쁜 여자 선생님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전쟁통에 여성에 대하여도 알었고 미군들이 또 무슨 짓들을 하고 다니는지 알었다.  우리보다 한 두살 위인 때로는 서너살 위인 친구도 있었는데 이들은 또 하우스뽀이라고 미군부대에서 심부름하던 아이들이 태반이였고 이 아이들은 또 모르는것이 없을 정도로 성에 해박한 지식?을 알고 있기도 했다.  모든 황홀한 이야기의 발상지는 얘네들에게서 나왔다.

  보습반에서  훈육소로,  훈육소 생활 1년만에 우리들은 2학년이 되었고 나는 그때 우리학교가 서울에 개교를 했는데 그것이 참 혼란스럽게도 K중학교 서울 분교다. 

  원학교 제건물에  들어 온 학교는 분교가 되고, 피난간 부산에 있는 학교는  본교란다.

  우리는 그나마 본 건물 분교에 귀환했지만 그렇지 못한 학교 학생들은 여전히 훈육소 학생으로 다녀야 했다. 

  그렇게해서 괴상한 명칭의 훈육소 훈육생 생활은 끝냈지만 우리들의 어려운 학교 생활은 또 이때로해서 시작되고 시험때 마다 쫓겨나는 수모를 받어가면서 중학교 본교 생활은 계속되고 있었다.

  왜 쫓겨나도록 잘못을 저질르느냐고요 ?  잘못했죠. 잘못하고 말고요. 선생님 월급도 드리고 해야 하는데 등록금을 못냈으니 쫓겨나야지요.  그것도 시험때 쫓아내야만 효과가 두드러지지 않겠어요?

  그렇게 해서 시험성적이 혹은 석차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고 체념할때 나의 학교 생활은 망그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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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水巖 > 6.28을 아시나요?

출처 I 냉정과 열정 사이 > 최민식- 인간

      <  6.28을  아시나요 ? >

   -  6.25도  모르는  세상인데  6.28을  아냐고 ?  -

  전에는 6.28도 있었고,   6.28이  되면  무슨  이야기도  신문에  나오더니  이제는 정말  역사  속에 파 묻어버린 이야기가  되었다.  남의  나라  6.28을  알고 이야기해도  우리나라에  있었던 6.28은 모르고들  있다.

  1950년 6월 25일, 나는  통일이  되는 줄  알었다. 공산군도  몰랐고 38선이  묺어졌다고 하니 그러면 통일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철없는 국민학교 5학년때 이야기다.

  6월  28일,  한강물은 흙탕물로 넘실거렸다.  언제  비가  왔었는지 모르나 그렇게  기억된다. 

  한강은  매년 원효로를 잠기게  했고  우리  집은  옛날  할아버지의  별장이였던 관계로  집이  좀  높고 한강물이  잘  보였다.

  그날  6월  28일날  아침,   우리집에  손님  한분이  찾어  왔다.  내가  2학년때  담임 이시던  김○○ 선생님이였다.  이  선생님은  이북에  고향이 계신  분으로  월남하여  서울에서  결혼도  하시고  사셨는데  6.25전쟁이  나고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니까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사모님은  친정으로  보내고  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피신을  온 터였다.

  그  당시는  완고한  집안이라고 하나 한때 선생님이였던분이  위기에 빠지셨다고하니 그럼 저희 집에 계시라고 하였는데  저녁때가  되니 불안하셨는지  댁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는  북한공산군이  서울을 진주하고  학교엘  나오라고하여 학교에도  다니고 무슨  무슨  노래도  배우고 하다가 폭격이  심해지고  해서 외가집으로 어디로 피난을 했다. 

   그 당시에는 폭탄을 손으로  집어던지는지 한강 다리를 끊으려고 던지는 폭탄이 용산구 일대가 온통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우리  집도 밑에 재목점으로 세준  그  터에  시한  폭탄이 떨어져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직경 5.60cm나  되는 돌덩이가 한개는 안채  지붕위에,  두개는 마당에, 또  두개는 사랑  지붕위에 또 한개는 사랑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그  선생님의 이야기, -   김○○선생님은  이북에서 월남해서 온  원죄?때문에 무슨  무슨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험을 모면을  했는데  서울이  회복되고  나서  부역죄로 또 잡혀들어가  고생을 하게 되었다.

  더  비극적인것은  그런 일때문에  이혼까지  당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우리 5학년 담임선생님이던 홍○○선생님은  김선생님의  손위 처남이였는데  김선생님이 부역한  일을  용서할 수 없다고  이혼을 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다.  홍선생님은 그리고  일약  군문에 자원하여  어느날 육군 대위가  되어  돌아  온것을 뵐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김선생님이 이혼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누가  친일을 했느니  부역을  했느니 하면 좀 동정이 생긴다.  6.25  당시  서울에 있던  사람들, 고관 대작이  아니면  전부  서울에 있었는데  과연  이 어른들이  부역을  안하고  숨었던  분이  몇이나  될지 모른다.  민초들은  매일  끌려나가  끊어진  한강다리를  보수한답시고  잡혀  나갔고  우리들은  겁 먹은채  학교에  나가  무슨  장군님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  모두가  엄밀하게  말하면  부역이다.

  6.28 !  서울이  적에게  함락당한  날이다.  그리고  우리의  비극도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비극은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혼한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고  가족이  뭉그러진  사람도  있고  풍지박산된  가족도  있다.

  이제는  적에게  적개심을  갖으면  안되게  가르쳐야  한다는 퍼런? 기와집 어느분의  말씀이  보도되는 그런 때이다.  그래서  서해  교전으로  목숨을  바친 윤영하 소령등  6명의  희생은  그져  가족만의  비극인양  높은  분들은 추도식에  나타나지도  않고  그  가족들은  이런  놈의  나라에서  살기  싫다고  이민을  기획한단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  저녁  놀 같은  세상에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6.25보다  6.28이  더  가슴에  닿는  날이기도  하다.

  한강다리가  폭격  당하던날,  그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끔찍했고  사면은  온통  깜깜한채로  몇시간?을 암흑속에서  엎드려서,  엄마 손,  동생  손을  잡은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그 검은  연기가,  화약 냄새 가득한  연기가 살어지도록 있었던  기억.

  집안은  몇십년  묶은  굴뚝에서 떨어져  나간  끄림으로  해서  화약  냄새에  섞여  메케했고 서서히 사러지는 검은 연기가  하얀  연기로 변해질때  얼굴은 온통 시꺼멓고 우리  모두는  공포와  끝간데  없는  불안으로  짐을  꾸려 시내에  사시던  외가댁으로  피난을  갔다.  거기도 근처에 폭격이  있자  길  건너 편  이모한테로, 그곳엔 또 이모댁  시집 친척까지 얽히고  설켜  적도 3개월을  그렇게 보냈다. 모두는 모두에게  의지하고 살었다. 그때 이종형은 날라온  파편을  맞어 팔에  박히고 또  누구는  다리에  맞고 피를  철철  흘리면  누구는 구급함에서 약을 꺼내와 치료를 해주고  붕대를  감어주고......

  9.28은  그런  사연을 뒤로하고  찾어  왔다. 

  6.28을  아십니까?    그럼  6.25는  아십니까?   그러면  2002년 6월 29일에  있었던  서해  교전은  아십니까?

  주적에게  적개심을  가져서는 안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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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4-07-0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그래서 모교도 없이 초등학교를 졸업했지. 모교에서 우리 회차는 빠져 버리고 남의 학교를 빌어서 졸업한 우리들, 그래도 어느 핸가는 회차도 빠진 모교에 가서 동창회도 한번 한적이 있었구요. 청포도사랑님, 우리 억울한 연대, 가엽게 학교 다니던 생각 나네요.
적에게 적개심 갖지 마세요. 예수님 말씀같은 말씀을 퍼어런 기와집, 불그스레한 양반의 말씀, 하나님 말씀인가요? 장로님!!

청포도사랑 2004-07-0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선생님!
아직도 2.8 청춘갔구려!!!
그때 그시절을 자세히 기억 할수있다니 부럽소이다.
 
 전출처 : 水巖 > [퍼온글] TURTLE 그리는 법!!

..이번엔 turtle입니다....

제가 올린것을 기본으로 하여...많은 응용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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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水巖 > [퍼온글] horse그리는 법

..이번엔....말입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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