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水巖 > 1951년도의 스트라이크와 보습반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원효로에 남정국민학교(초등학교) 였다. 이 학교는 일제시대에 일본 아이들만 다니던 학교여서 학교도 튼튼할뿐아니라 전 교사가 난방시설도 잘되어 있었다. 심지어 교실마다 도시락 덮히는 시설도 있었다.
6.25 전쟁이 나고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다시 9월 28일 서울을 탈환을 했다가 1.4후퇴로 모두 피난갔다가 몰래 서울로 잠입해서 살던 서울 시민들, 그리다가 우리는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우리 학교는 시설이 좋와 미군들에게 빼앗기고 인근 ㄱ국민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그 서글프고 허탈한 생각은 말할 수 없이 컸다.
ㄱ국민학교는 집에서 먼저 다니던 학교보다 조금 멀었지만 그런대로 다닐 수 있었던것은 먼저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과 친구들이 많었기떄문이다. 물론 피난가서 오지 않은 친구들도 많었다.
ㄱ국민학교 원 학생들과 그곳 선생님들은 은근히 텃새도 부리고 우리들을 냉대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우리 선생님이 담임을 맡고 계셨고 친구들이 옹호도 해주고 해서 버틸 수 있었다.
그시절의 에피소드 한 토막 -
나는 그 시절에도 공부를 잘 했다. 담임선생님인 강○○선생님이 하루는 날 부르신다.
왜그러시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선생님 사모님이 어디를 가셔서 집이 비니 집 좀 가서 지키라는거다. 공부 시간에 친구들은 공부를 하는데 나는 공부를 잘 하니까 몇 시간쯤 빼 먹어도 되니 집 좀 지키라는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선생님댁 지켜 드렸다. 그 후로 가끔 나는, 때로는 딴 친구와 함께 집 지키기 출장을 나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 강선생님이 발령이 나서 이웃 ㅎ국민학교로 가셨다.
우리들은 눈 시울을 붉히면서 그때부터 천대받는 타교생이 되 버렸다.(우리들의 옹호자인 선생이 안계심으로 해서 느껴지는 자격지심일런지 모르나)
그런데 며칠 지나자 또 친구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나 둘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자꾸 없어지게 되자 이들을 추적했다. 그리고 이들이 ㅎ국민학교로 전학 아닌 전학을 해서 다니는것을 알게 된 우리도 ㅎ국민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강선생님은 우리에게 호소도 하고 화도 내셨지만 우리는 막무가네로 강선생님 교실 뒷자리에서 공부를 했다.
1951년도?의 스트라이크 !
우리는 거의 학교를 안 나가고 학적도 없는 학교로 가서 공부를 했다.
학교도 빼앗기고 선생님도 빼앗긴? 우리들은 그렇게 ㄱ국민학교으로의 등교를 보이콭 하고 투쟁아닌 투쟁?을 했지만 결국은 강선생님의 간청과 호소로 어쩔수 없이 ㄱ국민학교에 되돌아가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앨범이라고 ? 4.6반판 크기의 사진 한장이 전부다.
그렇게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을 치루었다. 전쟁중이라 학교별로 시험을 치룬게 아니라 국가고시나 다름없게 전국에 똑같은 문제로 시험을 봐서 그 시험 결과를 가지고 원하는 학교에 지원을 해서 들어가는 그런 제도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시험을 보았고 학교를 지원했고 그렇게 합격했고 더러는 떨어져서 2차학교, 또는 3차학교로 지원해서 들어갔다.
나는 물론 1차 학교 그것도 최상류? 학교 3군데중 한 학교를 지원했고 합격했다. 그때 500점 만점에서 400점 이상이면 최 일류를 들어가고도 남는 그런 점수를 받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있게 된다. 졸업할때가 되어서 졸업을 시키고 중학시험을 치룰때가 되어서 그렇게 시험을 치루어서 합격을 시켰으나 막상 다녀야 할 중학교가 서울에는 없었다.
9.28로 서울을 탈환했다가 중공군의 투입으로 1.4후퇴로 전부 피난갔다가 비공식적으로 흘러들어온 서울 시민, 서울은 그래서 공식상으로는 미수복지구였고 모든 학교는 부산 혹은 대구 등지에 본교가 내려가서 수업을 하였지만 막상 서울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정부에서 생각해 낸것이 급한데로 만든것이 보습반이다.
보습반이 무어냐고요?
우리들을 졸업시킨 초등학교에 보습반을 두어서 아이들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이지요.
우리들은 졸업했고 5학년은 6학년이 되었고, 갈곳없는 졸업생은 7학년쯤 되는 보습반
그렇게 해서 한 서너달 있었는지(확실한 시일은 기억은 안남) 자 서울에 중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그 이름도 괴상한 훈육소(訓育所)다.
서울에 네군데 ? 훈육소를 두고, 말하자면 종합중학교인데 왜 이런 해괴한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지방에서는 이때 종합중학교라고 불렀는데 말이다.
서부훈육소는 광화문에 있던 경기여중을 그렇게 불렀고, 우리들은 남부훈육소라해서 청파동 입구에 있던 신광여중에서 개소를 해서 1차든 2차든 3차든지간에 남쪽에 사는 애들은 모두 이 훈육소에 몰아 넣고 한반에 100여명이 넘게 집어 넣고 수업이라고 하는 그런 전시 학교에서 우리는 공부랍시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영어를 가르치던 예쁜 여자 선생님한테서 공부를 잘했다고 미군용 노트 한권 받고 기분 좋아 했다. 왜 기분 좋았냐고 ? 예쁜 여자 선생님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전쟁통에 여성에 대하여도 알었고 미군들이 또 무슨 짓들을 하고 다니는지 알었다. 우리보다 한 두살 위인 때로는 서너살 위인 친구도 있었는데 이들은 또 하우스뽀이라고 미군부대에서 심부름하던 아이들이 태반이였고 이 아이들은 또 모르는것이 없을 정도로 성에 해박한 지식?을 알고 있기도 했다. 모든 황홀한 이야기의 발상지는 얘네들에게서 나왔다.
보습반에서 훈육소로, 훈육소 생활 1년만에 우리들은 2학년이 되었고 나는 그때 우리학교가 서울에 개교를 했는데 그것이 참 혼란스럽게도 K중학교 서울 분교다.
원학교 제건물에 들어 온 학교는 분교가 되고, 피난간 부산에 있는 학교는 본교란다.
우리는 그나마 본 건물 분교에 귀환했지만 그렇지 못한 학교 학생들은 여전히 훈육소 학생으로 다녀야 했다.
그렇게해서 괴상한 명칭의 훈육소 훈육생 생활은 끝냈지만 우리들의 어려운 학교 생활은 또 이때로해서 시작되고 시험때 마다 쫓겨나는 수모를 받어가면서 중학교 본교 생활은 계속되고 있었다.
왜 쫓겨나도록 잘못을 저질르느냐고요 ? 잘못했죠. 잘못하고 말고요. 선생님 월급도 드리고 해야 하는데 등록금을 못냈으니 쫓겨나야지요. 그것도 시험때 쫓아내야만 효과가 두드러지지 않겠어요?
그렇게 해서 시험성적이 혹은 석차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고 체념할때 나의 학교 생활은 망그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