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였다. 여의도 어디서였던 것 같은데,노란 잎을 안고 있는 은행나무가 쭉 늘어선 길이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였다. 이어 나뭇잎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들어서니 우수수 낙엽이 비가 되어 내린다. 떨어져 땅 위에 누운 잎들은 흡사 푹신하게 깔린 양탄자처럼 보였다. 잠시 그 나무 밑에 앉아 지난 여름날의 추억이라도 꺼내 보면서 낙엽 비를 맞고 싶었다.
그러나 잠시 후,그 가을 정취에 흠뻑 젖어 있는 나의 시야로 들어선 건 나무를 흔들고 있는 환경미화원이었다. 흡사 막간을 이용해 무대 장치를 서둘러 바꾸고 있는 듯 보였다. 매일 매일 쌓이는 낙엽을 쓸어 담기보다는 한꺼번에 잎을 떨어뜨려 주는 것이 수고를 던다고 생각했으리라. 수북하게 쌓였던 낙엽은 성급한 그 아저씨 손길에 의해 말끔하게 치워져버렸다.
서울시는 올해,풍성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낙엽과 열매의 거리’ 51곳(총 114㎞)을 11월 중순까지 운영하기로 했단다. 떨어진 잎을 쓸지 않고 수북이 살려 도심 ‘가을 숲’으로 만드는 곳이다. 단풍잎 비를 맞으며 ‘낙엽의 거리’를 살포시 걸어보라는 배려다.
촘촘한 일상,쉽게 떠나지 못했던 가을 여행이 늘 아쉬웠는데 올해는 고교 시절까지 다녔던 정동교회,남다른 추억이 낙엽처럼 깔려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정다운 이와 꼭 걸어보리라. 소슬바람과 더불어 호젓한 삼청동 길도 좋겠다. 그 어디쯤엔가 분위기 있는 작은 찻집 하나 있다면,나무가 보이는 창가에서 차 한 잔 마시고 싶다.
찻잔에 뽀얗게 서리는 김 속에 멀지 않아 낙엽과 열매의 거리로 들어설 나를 본다. 복잡한 도심처럼 삭막한 삶인지라 여렸던 심성은 거친 나무등걸처럼 메마르고 갈라졌다. 공해와 소음 속에서처럼 감당하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늘 가슴 깊은 곳에 생채기 하나 안고 사는 듯 아렸다. 살아 있는 자로서의 약속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힘겨웠나. 그러나 그 모두 것을 이겨낸 뒤 얻은 보람이라는 열매를 안고,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또 다른 빛깔로 물든 아름다운 가을 나무 같은 나의 모습이기를 소망한다. 선홍빛,황금빛 낙엽 비 내리는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차가운 거리 위에 누운 낙엽이 전해준 마지막 가을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힘겨웠지만 열심히 살았노라는….
이진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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