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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녹음에 색과 향기가 진동하네”

- 전북 고창 선운사 -

‘선운사’ 는 사계절 볼 게 많은 곳이다. 시인 미당 서정주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사찰이기도 하거니와 봄 동백, 늦여름 상사화, 초가을 꽃무릇, 늦가을이면 단풍이 계절 따라 색깔을 달리하면 옷을 갈아입는다.



봄에는 비탈진 산자락에는 연분홍 진달래꽃과 샛노란 생강나무꽃이 만발하고 고용한 숲에는 제비꽃, 춘란, 산자고, 큰개불알풀, 개별꽃 등 야생화가 천국을 이룬다. 동백이 떨어져 땅바닥을 선홍빛 순홍으로 물들이면 벚꽃이 다음 바톤을 이어받는다. 절 앞 벚꽃이 하나 가득 자태를 뽐낼 때가 되면 춘백과 대숲이 한데 어울려 삼색 물감으로 생기를 북돋운다. 6월이면 비맞아 빠알간 몸매가 더 도드라지는 앵두가 방긋 인사한다.

늦여름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잔한 전설이 서린 상사화(相思花)가 무리지어 핀다. 상사화는 주변의 단풍나무, 신갈나무, 서어나무 등 낙엽활엽수와 조화를 이루며 연분홍 색을 더한다. 푸른 꽃대가 길게 올라와 새빨간 족두리 같은 꽃을 달고 무리지어 숲속에 늘어서 있는 광경은 황홀하고 신비스럽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부면 산사를 환하게 물들이는 꽃무릇이 피어난다. 짙푸른 숲그늘 속에 피지만 단박에 눈길을 끌 정도로 곱고 아름답다. 꽃무릇은 상사화를 꼭 닮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다르다. 상사화는 잎은 봄에, 꽃은 8월에 피지만 꽃무릇은 꽃이 지고 난 다음 잎이 핀다.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고 한참 녹음이 짙푸를 5월. 흔히 선운사하면 대웅전 뒤편의 동백숲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신록으로 덮인 여름도 경치가 그만이다. 매표소를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부도탑과 비석이다. 정갈한 전나무숲 한가운데 자리잡아 역사와 고승의 향기를 더한다. 절 옆으로는 계곡이 흐른다. 축축 늘어진 ‘수양벚꽃’ 나무들이 길손에게 손짓한다. 휘어진 가지와 푸른 잎새 하나까지 선명하게 비치는 물그림자. 키 낮은 고목들이 맑은 물에 반영돼 한 폭의 수채화를 이뤄낸다. 입구에 다다르면 목탁소리, 풍경소리가 눈보다 먼저 마음을 열게 한다.



절의 입구로 들어서면 ‘만세루’ 라는 스님들의 학당이 먼저 눈에 띈다. 지금으로 치면 대학 강의실쯤 되는데 대웅전을 가리면서 중앙에 위치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대부분의 절은 대웅전을 가운데 두고 부속 건물들이 양옆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대웅전의 단청 또한 독특한데 앞쪽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 사이사이에는 나한의 여러 가지 모습을 그린 그림이, 지붕 뒤쪽에 있는 열다섯 개의 공간에는 난, 매화, 연꽃 등의 식물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웅전에 도착해서 불상을 먼저 찾는 이는 없다. 말만 듣던 대웅전 뒤편의 동백나무 군락이 우선이다. 동백은 절 뒤편 산에서 꽃을 떨어뜨리고 짙푸른 잎사귀만 속내를 드러낸다. 더구나 철망으로 가려져 있어 일반인이 접근할 수조차 없다. 대신 앵두나무의 새하얀 꽃무리가 숲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양쪽에 화사한 꽃을 피운 오래된 배롱나무가 관광객을 맞는다.

선운사에서 오솔길을 따라 무작정 걷다보면 도솔암이 나온다. 3.2㎞ 정도의 숲길은 호젓하기 그지없다. 시인 정찬주는 ‘인간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기분’ 이라고 칭송했다. 청정도량으로 이어지는 사색의 숲길이다. 느티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팽나무 등이 섞인 숲은 활엽수림이라 신록이 참 좋다. 고개를 들면 연하디 연한잎새가 햇빛을 머금고 아롱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고목이 비스듬히 고개 숙여 땡볕을 막아준다. 길옆으로 흐르는 개울에도 울울창창한 숲이 담겨 있다. 바람 한자락에 세속의 번뇌가 흩어진다.

도솔암 부근에는 수령 600년의 장사송(長沙松)이 있다. 우산처럼 가지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 보통 소나무와는 딴판이다. 그 옆에는 진흥굴(眞興窟)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왕비와 공주를 데리고 출가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잠시 장사송과 진흥굴 앞의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힌다. 살갗을 살짝 건드리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서 솔 향기가 진동한다.

도솔암은 깎아지른 기암절벽 사이에 들어서 있다.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의 뜻으로 선운이나 도솔이나 모두 참선한다는 뜻이다. 선운사가 여행객들로 부산스러운 반면 행락철에도 호젓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도솔암 옆으로 내원궁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오른쪽으로 바위계단을 100여 개 올라가면 내원궁이 암벽 위에 날아갈 듯 걸쳐 있다. 내원궁 서편의 거대한 암벽인 칠송대에는 키가 17m나 되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동양 최대의 불상으로 보물 1200호.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가슴 한가운데에 배꼽과 같은 돌출부가 있는데 여기에 예로부터 신비한 비결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전라남도 이서구가 배꼽을 열어 보니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뇌성벽락이 치자 두려워 책을 도로 넣고 봉했다고 한다. 동학군이 이를 꺼냈고 동학교도 손화중이 새 세상을 다짐하는 맹약문을 써넣었다고 한다.

도솔암을 되집어나와 도솔계곡을 따라 선운산 정상인 낙조대를 올라가는 길은 철제 계단길이다. 낑낑거리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올랐다. 해발 335m밖에 되지 않지만 영광 칠산 앞바다와 곰소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해바다로 장엄하게 떨어지는 붉은 햇덩이, 낙조대에 올라야 선운산이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서녘 바다는 온갖 시름을 어루만지듯 온통 붉은 비단의 물결로 뒤덮는다.

지금 선운사엘 가자. 비록 동백은 그 빛을 바랬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낙조로 붉게 물든 산사, 바람 한 자락 휭하니 불어올 때마다 심금을 울리는 풍경소리에 세속의 모든 번뇌가 사그라진다.

<장원수기자 jang7445@khan.co.kr>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정읍에서 고창, 흥덕으로 빠져 선운사로 갔지만,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 IC에서 빠지면 선운사까지 가는 이정표가 있다.

먹거리 = 풍천장어와 작설차, 복분자를 선운사의 3대 별미로 꼽는다. 선운사 입구에는 한 집 건너 두 집 꼴로 발에 차이는 곳이 풍천장어 식당이다. 대략 40여 곳이 모여 있다. 내장과 뼈를 발라내고 양념을 한 뒤 숯불에 구워낸다. 1만4천 원짜리 장어정식을 주문하면 장어 1마리가 양념구이로 나온다. 신덕식당(063-562-1533) 연기식당(063-562-1537) 동백식당(063-562-0160) 등이 유명하다. 복분자술은 선운사 주변에서 나는 복분자(산딸기)를 발효시켜 만든 과일주. 복분자영농조합(063-561-2032)에서 만든다. 선물세트 1만5천원 ∼ 4만6천원. 작성 날짜 : 200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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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4-07-16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운사 골짜기에 서정주님 시를 생각하고, 선운사 입구에서 복분자 술 마시면서 요강이 어쩌구 저쩌구 하였지.

청포도사랑 2004-07-16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운사?
복분자 술과 장어 요리를 먹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