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톨스토이 단편집 Echo Book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병준 옮김 / 샘솟는기쁨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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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톨스토이가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삽니까?” 

 

고전문학이 다시 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고전문학은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 둔중하게 심장을 두드리는 작가정신이 심해처럼 가늠하기 힘든 깊이로 드리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읽어도 그때마다 감정이 살아나고 이야기가 새롭게 들려오는 거겠지요.

 

 

수년 동안 만나온 애인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런데 그(그녀)는 늘 새롭죠. 그(그녀)가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고전문학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이유도 그런 것 아닐까요?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오니 새롭게 보이는 것. SF 영화의 영향으로 스펙터클한 화면구성과 박진감 넘친 사건전개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고전문학을 읽어내려면 처음엔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애인에게 맞춰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과정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말문을 튼 애인과 놀랄 정도로 가까워지듯이 고전문학도 맛과 향취에 취하면 걷잡을 수 없지요.

 

 

평소 고전문학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고전문학이 주는 무게감과 톨스토이라는 작가의 아우라에 순간 멈칫했을 수 있습니다. 고전문학에 연전연패한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더더욱 명성이 주는 중압감에 주눅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런 부분을 섬세하게 짚어낸 작은 판형이 적절히 안도감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간단히 백에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꺼내 읽을 수 있을 정도니까 들고 다니는 부담이 확실히 적어졌습니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아스라한 풍경의 도판과 내용 정리와 사고를 이끌어내며 각각의 단편을 깔끔하게 갈무리한 QT가 한결 수월하게 이 책을 읽어내게 해주고 있습니다. 

 

 

단편 형식을 택한 것도 출판기획 면에서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수년 동안 이름 있는 출판사를 중심으로 고전문학이 장편의 전집형태로 묶여 나온 점을 감안할 때 장편 고전문학 시장이 겨냥한 독자들은 그 기간 동안 대부분 시장에 흡수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와중에 단편 시장이 소홀히 취급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 기획단계에서 이름난 단편을 발굴해내기가 쉽지 않은 게 직접적인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는 사이 단편 시장이 무주공산 처지로 전락했던 거지요. 그 틈새를 이 책이 파고들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출판계가 오랜 동안 장/단편 고전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진 형편에서 이 책이 고전 기독출판물의 출간 붐을 조성하는 마중물이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과거 1990년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나온 이후 그와 같이 묵직한 고전이 번역 출판되지 않은 현실에 못내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 책의 출간으로 기대감이 한껏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톨스토이라는 굵직한 작가의 단편집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로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리나》(1877) 등 불멸의 사실주의 작품을 남긴 톨스토이는 50대 초반에 회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에 실린 8편의 단편은 톨스토이가 50대에 쓴 소설로 평소 이야기를 민중의 언어로 사실감 넘치게 풀어간 성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린 그 예를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와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는 신앙에 대해 대담한 관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도 실제 대가를 치러야하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종교인들의 행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에서도 잘 차려입고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꾸며 말하는 호사가들을 경멸하는 풍조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저택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로 시작되는 단편은 그런 점에서 대단한 풍자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택에 모인 사람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지만 삶과 유리된 채 겉도는 그들의 말에서 당시 만연했을 무책임의 행태적 모순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파고들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신앙적 양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문학이 인생에서 전형을 획득하고 있다면 그건 시대를 막론하고 독자들을 자기성찰로 이끈다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젊은이는 경험해야 할 세계가 아직 많으니 섣불리 결단하지 말라거나 노인은 이미 충분히 즐겼으니 늘그막에 결단해서 식구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지금도 결단을 막는 유효적절한 장치로 사용하는 너와 나의 현실을 돌아보며 회개와 의식전환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톨스토이가 말하려던 바를 정확이 이해한 게 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함의가 문학적 형태로 돋을새김되어 어느 때보다 독자들을 깊은 성찰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이 단편의 가치가 시대를 건너 빛나고 있습니다.

 

 

책 제목과 같은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는 구도자적 관점에서 《천로역정》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회심한 톨스토이가 줄리어스의 입장에서 구도자인 유베날리우스를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자서전적 단편으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이 소설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영혼이 파괴된 인간 톨스토이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했던 행복과 평안이 어디서 기원하는지를 파노라마 같았을 자신의 인생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한 눈에 보이도록 그려주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단편에 불과하지만 마치 누군가의 인생 전반을 읽어낸 듯 그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이어 묵직한 소회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그건 이 소설이 기독교인이건 그렇지 않건 인생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며 추구할 바가 과연 돈과 권력, 향락이 전부인지를 성찰적으로 돌아보게 함으로써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가 닿을 곳에 대한 꿈을 꾸게 하며, 그렇게 피어난 결단의 열매가 얼마나 달콤한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 같은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구원받았다. … 죄인과 같은 나는 악하게 살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나처럼 사는 것을 보았다. … 마치 죄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나는 어떤 힘에 의해 그런 고통과 악의 삶에 못 박혔다. ... 이 모든 비극에서 나는 정확히 죄인과 같았다. … 그런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부터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생과 사가 악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절망 대신에 죽음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였다.”

 

 

이 글은 톨스토이가 1884년에 발표한 신앙고백의 일부입니다. 그의 회심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의 거듭남, 거기서 비롯된 행복과 기쁨, 이에 더해 악하게 살았던 과거의 내 전철을 밟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는 이후 내내 작품 속에 녹여냈습니다. 8편의 단편은 그런 톨스토이의 환희와 격정을 문학이라는 도구를 빗대어 첨가물을 전혀 가미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문호가 인생 후반부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물었다면 우리도 언젠가 한 번만이라도 그런 질문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 뭐 있어!” 하고 쉽게 처리할 만큼 우리 인생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겠습니까. 모처럼 만난 고전 단편에서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잠시 잊은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일에 휩쓸려 목적 없이 살아가는 직장인들에게 우선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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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항상 결심만 할까 - 게으름과 딴짓을 다스리는 의지력의 모든 것
켈리 맥고니걸 지음, 신예경 옮김 / 알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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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난 결심한 대로 살지 못할까?

삼일 만에 퍼지는 당신을 위한 급 회생 처방

 

 

‘불광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미쳐야한다는 것입니다. 조금하다 지치면 다른 것을 기웃거리고 이것 찔끔 저것 찔끔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린 대부분 무언가 하려하면 결심부터 하고 봅니다. 결심을 해야 그 일에 대한 추진력이 생기고 전과 달리 그 일에 힘을 쏟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자주 결심만 할 뿐 결심한 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생긴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 삼일이라도 힘을 쏟았으면 그게 어디냐는 말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될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벼운 결심이라도 결심 한 사람의 입장에서 가벼운 결심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견 대담하게 결심하고 덤볐는데 삼일도 못돼 결심이 꺾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알리지 않은 결심이라도 며칠 동안 자신의 의지박약을 탓하며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가 본질적으로 불행한 기억이나 나쁜 기억은 빨리 잊으려는 심리기제를 갖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심리가 없다면 아마도 자존감에 심한 상처를 입거나 우울증에 걸리는 등의 곤란을 겼을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 궁금합니다. ‘주변에서도 그렇고 내 경우를 봐도 결심한 대로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의지력은 특정인의 전유물인지 모르겠어?’ 하는 그런 생각 말이죠.

 

 

아마도 최근에 또는 기억 속에 여러 번 작심삼일을 경험한 분이라면 그 생각에 맞장구를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사는 동안 결심한 대로 이룬 것 보다 결심만으로 그친 경우가 많았던 데서 더더욱 그런 생각에 동의하실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의지력은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수준 높은 어떤 이들이 지닌 놀라운 특성이라고 치부하고 보는 거지요. 경험에 의지해 그렇게 믿어버린다고 사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결심했다 좌절하고 다시 결심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세월은 흘러가고 당신 앞엔 별로 내세울 것 없는 훈장 몇 개만 남아있게 될 뿐입니다. 일견 모든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밟으며 살고 있다고 보면 그리 손해나는 선택도 아닐 것 같습니다.

 

 

미국 텍사스의 한 대학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절대 흰 곰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심리학 교수가 그렇게 학생들에게 주문한 후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평소대로라면 친구 만날 생각과 주말에 누구와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느라 부산했을 학생들이 생각하지 말라고 한 흰 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느라 진땀을 빼야했습니다. 교수는 실험을 통해 우울증과 중독 등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병리현상을 날카롭게 포착했습니다. 의지력이란 통제하려고 하면 더더욱 그 반대의 결과를 낸다는 역설이 그것입니다.

 

 

 

 

 

교수의 지시니 만큼 학생들은 흰곰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그것이 가능하기도 했습니다. 시간 지나자 느닷없이 흰곰 생각이 큰 폭으로 자리잡아갔고 나중엔 아예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꽉 차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안을 떨쳐내려고 하면 할수록 불안 증세에 더욱 시달린다든지, 중독 증상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 게 도리어 더더욱 그 중독에 빨려 들어가는 현상 모두 집착이 만들어낸 반동효과라는 게 실험 결론이었습니다.

 

 

'흰곰 생각 실험'으로 불리는 그 실험의 별리현상에 대해 이 책은 집착을 포기하고 화해하라하고 처방하고 있습니다. 통제하려다가 오히려 말려드는 역설에 또 다른 역설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버리면 그런 생각과 감정 또한 나를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살다보면 닥친 일의 크기보다는 그 일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년 전에 전 대략 3개월 동안 눈만 감았을 뿐 의식이 또렷한 상태로 잠자리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처음 며칠은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이내 바로 잡힐 거고 전과 같이 푹 잘 날이 올 거라고 단순하게 처리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부터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같은 상태를 불면증이라고 자체 진단한 전 불면증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각종 처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몸을 피곤하게 하려고 초저녁 운동을 시작한 건 물론 와인이 도움 된다는 말에 잠자리에 들기 직전 한 두 모금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지기는커녕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 석 달이 다 되었습니다. 당연히 피곤한 몸은 둘째 치고 이러다가 큰 일 날 것 같은 생각에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처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습니다. 아마도 어떤 프로젝트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냥 체념한 채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프로젝트 때문이건 체념 때문이건 불면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린 게 주효했습니다. 불면의 밤을 3개월을 보내고 나서 또 다시 한 달이 흐르고 나서야 ‘어?, 불면증이 사라졌어’하고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어떤 현상을 뿌리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오히려 원하지 않은 결과로 귀착된 셈입니다. 치료는 불면증 자체를 잊은 데서 왔습니다.

 

 

불안의 근원 - 장정아

 

 

저자의 처방은 보다 적극적입니다. 한쪽으로는 버리되 또 다른 한쪽으로는 화해하라는 양동작전으로 저자의 처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보통 사람이 의지력이 박약한 반면 특정인들은 대단한 의지력을 갖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결심과 좌절에 대한 생각의 차이와 그 차이로부터 비롯된 훈련의 결과로 생각 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의지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누구든 훈련에 의해 의지력을 키울 수 있을 뿐더러 보다 나은 선택을 한 후 그것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지력을 키우는 첫 단추는 결과를 보면 결심만 하고 끝내는 나의 현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편적으로 어려운 일은 하지 않고 불편한 상대는 피하고 싶어 하는 회피기제를 갖고 있습니다. “올핸 틀림없이 다이어트를 하겠어!”, “반드시 담배를 끊을 거야!” 하는 등등의 새해 결심을 야심차게 해놓고 실천 계획을 빼곡히 세워 며칠 동안 시작에 불을 당기듯 화려하게 팡파르를 울리지만 그것도 잠시 고작 삼일, 길게는 한 달 정도에서 멈추는 행동을 반복하고 보면 다시는 결심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심한 경우 자책은 물론 자신에 대해 경멸조의 태도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징벌적으로 전 보다 더 먹는다든지, 더 많이 피우는 등의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런 행태는 나만 의지가 박약하다거나 의지력은 다른 누군가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믿는 데서 비롯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결심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경멸 또한 사람의 보편적인 습성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린 평생을 게으름과 의지박약과 싸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에서 훈련에 대한 의지가 싹틀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의지력을 키우는 다양한 훈련방식을 제시하기에 앞서 다양한 사례와 실험을 먼저 소개함으로써 언제고 맞닥뜨릴지 모를 좌절이 본인 특유의 현상이 아니니만큼 용기를 가지라고 설득합니다. 아무리 좋은 훈련이라도 중간 중간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실패가 전적으로 내 잘못이라고 치부하면 훈련은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실패 뒤에 놓인 성공을 보기 위해선 적어도 잠깐의 실패가 앞선 이들이 이미 겪은 과정이라는 점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의지력 훈련에 돌입하기에 앞서 다양한 실패 사례를 적시한 것에 대단한 함의가 있습니다.

 

 

이 책의 각 장은 성과에 도달하는 과정을 핵심개념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충족하는 과학적 결과, 이어 개인적 적용이라는 순서를 밟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는 같은 실패에 좌절함 없이 과학적 결과를 믿고 자신에 대해 기꺼이 투자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가 대표팀 감독을 지낸 히딩크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로 선수들을 독려하곤 했습니다. 피하기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닌 것처럼 피할 수 없다고 해서 힘겹게 그 과정을 밟아갈 필요 또한 없습니다. 어떤 마음자세를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훈련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게 인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가면 언젠가 바란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이 실패와 좌절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새 도전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불태우게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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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으로부터 자유 - 아주 사소하고 사적인, 김수경 카툰우화집
김수경 지음 / 강같은평화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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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처럼 일거에 세상을 깨우는 빛 : 〈비판으로부터 자유〉

 

 

세상을 살면서 이해받지 못하는 것만큼 가슴앓이를 많이 해야 하는 것도 없을 듯싶다. 타인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남을 앞서려거나, 심한 경우 남을 짓밟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타인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면 설명은 변명으로, 항변은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인 것이 요즘 세상이다. 그런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책, 〈비판으로부터 자유〉를 쓰고 그린 김수경은 자신 또한 그러한 상황에 직면했음을 밝히면서 "하나님이 이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다급히 알고 싶어졌다"고 그때의 심경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당시 저자가 맞닥뜨린 고통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을까? 소제목을 통해 잠시 들여다보자. "내 인생에도 일어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다." "꼬리표를 달고 살고 있었다." 소제목을 보면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앞뒤사면이 꼼짝없이 막힌 상황이다. 이 경우 그저 막막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실할 것이다. “그래, 어떡하면 좋으니?”하는 걱정 외에 덧붙일 말이 더 있을까 싶다. 그만큼 당사자가 직면한 고통을 덜어줄 묘안이 없다는 얘기다. 나는 아닌데 남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어떻게 돌려 세운단 말인가?

 

 

진심은 통한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험담을 늘어놓는 상대방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니라고 한들 받아들여질 가능성마저 희박한 상황이라는 것쯤 누구나 유사한 상황을 적거나 많이 겪었을 터라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름 처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홍글씨를 박은 사람들을 향해 공격적 성향을 드러낸다든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무시하고 만다든지, 자책과 불면의 밤을 보낸다든지 하는 정도가 대부분인 것도 이 상황의 특징이다. 그와 같은 처방은 틀어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유효한 처방이라고 할 수 없다.

 

 

공격적 성향을 드러내면 상대방의 비판에 더욱 힘을 싣게 할 것이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던 귓전으로 흘리면 상대방은 당신이 떠도는 말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건 자신을 더욱 괴롭게 할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야 직장을 떠나든지 요즘 세간을 들끓게 한 중학생자살사건처럼 생을 마감하는 선택이 있기야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찬찬히 경우의 수를 살펴보면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답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저자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역시 소제목이 키워드다. “따스한 세상으로 초대받았다.” “그들에게 가 보라고 하셨다.” “내 속마음을 궁금해 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저자 또한 자책과 불면의 밤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군거리는 그들과 그들이 손가락질 할 만한 태도나 말을 하지 않은 나 사이에서 날이 갈수록 부풀려지는 갈등의 원인을 풀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지푸라기처럼 잡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악화될 뿐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저자가 기억해 낸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분이 누구를 해치거나, 험담을 늘어놓거나 빈정 상할 말을 퍼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분과 전혀 섞이지 않은, 경우에 따라 일면식도 없었을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그분을 조롱했다. 심지어 죄를 찾을 수 없었음에도 그분을 천형과 같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마침내 그가 못 박히자 그들은 “무슨 왕이 제 목숨하나 구하지 못하느냐”고 침을 뱉었다. 그 자리에 없었지만 필시 저자 또한 군중심리에 이끌려 그와 같은 사람들의 부류에 속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상황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역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속마음을 아셨음에도 그들을 선하게 대했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심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팔아넘길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게 된 순간 저자는 상황을 다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책과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자신이 그들을 향해 저자와 원망의 화살을 수없이 날려 보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받은 충격을 저자가 카툰으로 옮겨 놓았다. 그들의 성을 두 동강 내고 그들 각자의 삼장에 구멍을 뚫은 것도 모자라 그들 모두를 한손으로 싸잡아 으깰 정도의 사악함을 지닌 둘도 없이 악했던 자신의 모습을 매섭게 그렸다. 더불어 그들이 자신에게 나쁜 꼬리표를 붙여 주었듯이 자신 또한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여줌으로써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음을 또한 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무수한 꼬리표들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후 그것들을 전부 없앴음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선언하셨음에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이 그들에게 꼬리표를 달아주는 데 열심이었을 자신의 모습을 본 데서 결정적인 해결의 실마리는 찾아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앞에 또렷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제야 저자는 자신을 손가락질 한 이들을 찾을 용기를 얻었다.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박힌 십자가에 자신을 올려놓을 때 시작된다. 그 후에야 부활이 있다. 누구나 부활 이후의 영광을 취하려 하지만 그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과정을 거쳐야 온다. 과정 없이 결과만 취하려는 것은 반쪽자리 신앙이자 불안한 기대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이은 부활의 과정을 밟았음에야 우리라고 다를 리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남들의 꼬리표를 전부 지고 십자가에 올랐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꼬리표, 곧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희망이 전혀 없는 우리들을 체휼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심각하게 부르짖으셨던 것이리라.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십니까! 그 고통은 바로 아버지와 분리될 만큼 심각한 고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후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부합했다.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프리드리히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 볼 때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게 된다.”고 갈파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서 더 나간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경우는 조금씩 달라도 비판하는 순간 비판 대상자를 닮아가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어느 누구도 비판받을 만한 구석이 없잖다. 문제는 당신이 누구를 비판하는 순간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그 문을 통해 당신에게 들어온다. 그리곤 당신이 비판에 노출되도록 상황을 조성한다. 당연히 당신은 당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당신을 비판하는 이들이 당신을 잘못 알고 있다고 항변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당신을 흠잡을 것이다. 당신의 다음 선택은 그들을 멀리하는 것이다. 불면의 밤이 찾아온다. 당신의 고립은 심화된다. 이제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당신만 보일 뿐이다. 어둠 속에 갇힌 당신의 모습만. 그 상황은 사탄이 바라는 바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고립이야말로 사탄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전략이다.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속이는 것은 사탄의 주특기다.

 

 

저자가 책의 많은 분량을 비판을 하거나 비판을 받는 것의 결과로 찾아온 암흑과도 같은 상황을 묘사하는 데 할애한 이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도록 함에 있다. 거울에 자신을 비추지 않으면 얼굴 어디에 더러운 것이 묻었는지 알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과거 또는 현재에 직면했거나 직면한 고립을 찬찬히 돌아보도록 안내하려는 의도 또한 있을 것이다. 세세하게 묘사된 1장부터 3장까지를 읽는 동안 괴로웠던 지난날이 떠오를지 모른다. 경우에 따라 당신의 현재가 비춰져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책장을 덮지 마시기를.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빨리 오는 법이라지 않은가! 새벽빛처럼 일거에 세상을 깨우는 빛이 당신을 찾아온다. 당신의 찢어진 마음에 곧 당도할 테니 물러서지 마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사랑하신다. 당신이 더 이상 고립감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고대하며 해답을 들고 당신을 찾아오신다. 이 책이 그 광경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었다. 누구든 이 책은 꼭 일을 일이다. 읽기에 부담 없는 카툰 우화집이라는 점도 이 책의 미덕에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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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 날다 - 2011년 제12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윤고은 외 지음 / 문학의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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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전달하는’ 코미디 프로에서도 소통은 대세다. 사진 내용은 이렇다.

개그맨이 관객에게 다가가 대뜸 “송실장 어디 있나?”하고 불렀고 놀란 관객이 반응이 없자

“자기가 송씨다 싶으면 일어나!”하고 소리쳐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송실장으로 지목한 관객을 무대에 올려 개그를 이어가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지난 해 모 연극도 같은 방식으로 관객을 극중 인물로 만들어 신선한 웃음을 선사한 바 있다.

 

 

당신의 해마는 괜찮은가? : 소통부재의 현실을 충격한 소설, 〈해마, 날다〉

 

 

좋은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좋은 작품을 읽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 〈해마, 날다〉의 경우는 앞서 반대의 경우에 해당한다. 책 표지에 실린 작가 윤고은의 사진은 낯설었다. 거기에 작품 제목까지도. 물론 제목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암시할 필요는 없지만 은연중에 제목을 통해 작품의 경향을 유추하곤 한 과거 대학생시절의 기억이 아무 때고 튀어나온 탓이다. 아무튼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날 저녁 이 책을 사들고 근처 커피숍에 갔다.

 

 

산 책을 서둘러 읽을 요량으로 커피숍에 갔을 거라는 추측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아내와 작은 다툼이 있었고, 그래서 약간의 숙련기간 아니면 괜스레 심통이 나서 늦게 들어갈 생각으로 읽을 책이 많이 남아 있었음에도 책을 사고 커피숍에 들었던 것이다. 늘 먹던 뜨거운 아메리카노 커피를 주문해 탁자 위에 놓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역시 첫 모금이 제일 맛있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열었다.

 

 

윤고은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왔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4년 〈피어싱〉으로 제2회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았다. 2008년에는 무중력증후군으로 제13회 한겨레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이 정도의 프로필만 가지고는 윤고은의 작가적 경향이라든지 문체의 특징 등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낸 〈1인용 식탁〉과 〈무중력증후군〉 모두 읽지 못했으니 더더군다나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내로라하는 문학상 수상 작가라고는 해도 사전 지식이 없던 내게 그 문학상이 주는 기대감은 사실 많지 않았다. 생경하거나 문제의식만 두루 던진 수상작도 더러 있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나 읽은 뒤에 밀어닥칠 실망감이나 낙담이 적이 걱정되기도 했다. 위안이 됐다면 그건 제2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가에 성석제가 올랐다는 것인데, 성석제는 오래 전 그의 대표작이자 수상작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대학시절 이후 중단되었던 내 소설읽기의 물꼬를 터준 소설가이자 이후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듯 사건이 있거나 가벼운 책읽기로 숨을 돌리자 할 때 소설을 들게 한 보기 드문 작가였다.

 

 

윤고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소설집을 읽을 추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해마, 날다〉를 중간쯤 읽었을 때 그새 책을 여러 번 덮은 나를 발견하곤 윤고은의 작가적 밀도가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건 일종의 습관인데, 난 내용이 신선하거나 감격스럽게나 충격적일 때 생각을 가다듬을 요량을 그런 식으로 방출하곤 했다. 때론 맛난 음식을 아껴 먹듯 수일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적도 있었다. 물론 〈해마, 날다〉는 단편소설이었으니 오래 들고 있을 게재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해마, 날다〉가 충격한 소통부재의 현실에 대한 건조한 고발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했다. 술 취하지 않고는 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 군상들이 즐비한 현대사회에서 그나마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면식도 없는 또 다른 누군가를 돈을 내고 찾아야 하는 현실이 그저 소설 속 환경으로만 치부되지 않았다. 그건 작가가 겨냥한 이 세계가 소통에 관한 한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소통을 이야기하고 그 방식에 관해 끊임없이 토론을 벌이지만 실제 그만큼의 소통이라도 이뤄질지에 관해 자신하지 못하는 사회임에야 달리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뭉스럽다. 불통이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세계가 구조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어도 수긍이 갈 만한 세상으로 변모한 건 아닌지 더더욱 걱정이다.

 

 



 

 

소통 어쩌구 얘기하다는 것부터 이 세상에 불통이 만연해 있다는 것의 반증이고 보면 소통을 아무리 외친들 그 본질적인 의미, 곧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의 페기처분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복원에 관한 염원 없이 소통부재의 현실이 변혁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그럭저럭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야하는 사람은 문득 자주 ‘필름이 끊기는’ 걸 적잖이 걱정하며 직장에서 떨려나가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아침 출근길을 재촉한다. 특히 청년실업이 최고조에 달한 현 상황을 보면 술 먹은 다음날이라고 버젓이 휴가를 내 쉬고 지시받은 게 내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일이 아닌 건 맞다. 퇴직한 아버지와 2,30대의 아들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하는 비정한 현실 위에 그런 행위들은 배부른 일로 치부되는 것 또한 섣부르지만 먹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그러니 해마24처럼 잘리지 않기 위해서 ‘소주를 한 병 이상 마시고 음주통화를 해서도 안’ 되고 더군다나 ‘고객과 싸우는 일은 있어서도 안’ 된다. 그곳에서 잘리는 건 멸종과도 같은 일이다. 멸종이 별 건가?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아주 잊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멸종 운운하면서 그토록 진지했던 것이다. 잊히는 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학벌, 외모, 외국어 실력, 관련 분야 경력, 화법, 성격, 그 모든 것들을 '객관화'하던 아버지는 내 밋밋한 이목구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했다. ... (중략) ...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하던데, 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그런 애들은 멸종 위기를 겪는다고 대답했다. 인정하고 발전시킨 종이 살아남는다며, 아버지는 진지했다."

 

 

짐 월리스는 〈가치란 무엇인가〉에서 현대사회의 병폐로 ‘탐욕은 선’이라는 거짓 명제를 섬기고 ‘가장 중요한 건 나’라는 그릇된 관념을 일상화하고, ‘나는 이 모든 것을 원하고 그것을 지금 당장 갖고 싶다’는 즉물적인 욕망을 거침없이 내뱉는 데 있음을 지적했다. ‘중요한 건 나’라는 고집스러운 개인주의가 주로 화상이나 사고, 그 밖의 상처를 고치는 데 사용된 성형수술을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시켰고 개탄했다. 성형수술이 미용으로 한창 인기를 끄는 것과 더불어 요즘엔 부정교합을 치료하는 양악수술이 동안수술로 이름을 바꿔 타며 급선호되는 양상이고 보면 사실 더 이를 말도 없다.

 

 

필름이 끊긴다는 건 정확히 말하면 해마가 기억을 제대로 입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성형수술과 양악수술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미용법으로 유통되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해마에 입력된 기억을 부러 지우려한 결과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성형을 동원해서라도 사회에 진입하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도 사회가 그것들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거나 ‘동안이 대세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려서는 곤란하다. 건강한 사회라면 적어도 그것들을 조장하는 이해관계자의 반대편에 서서 곧 일자리 부재의 현실과 외모 제일주의를 외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게 순서다. 그럼으로써 이 세대가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도록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유의미한 수단을 버리고 부추기는 데 몰두하는 한 공멸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암전, 필름이 끊긴다. 해마, 해마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끊긴 필름에 대해 추궁하지도, 타박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저 동참할 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해마8에서 쫓겨난 ‘나’는 술에 취한 채 과거 내 자리를 꿰찬 해마8에게 전화한다. 과거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해마8은 역시나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적당히 대꾸하며 대화를 끌어간다. 그리고 한참 흘러 취기가 더욱 오른 ‘내’가 나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비틀거리던 순간을 지나 마침내 필름이 끊겼을 때, 그래서 그 시각 후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조차 해마8은 대꾸하기를 멈추지 않았을 걸 잘 안다. ‘난’ 돈을 내고 소통을 위해 그를 샀고 그는 나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직장을 다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세상은 참으로 암울하다. 암울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소통에 돈을 거는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니기에 그렇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게 변해도 사람살이라는 게 살가운 정을 토대로 하는 것인데, 어디 그리 되어서야 사람 산다고 하겠는가. 사람살이의 보편적인 정서가 상호 존중감과 배려로 표현된다는 걸 우리 속 해마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마8이었던 내가 해마8에게 전화를 건 일이 무척 곤혹스러워도 해마8이 ‘나의 끊긴 필름에 대해 추궁하지도, 타박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 것에서 불안하게나마 소통하고 있음에 위안을 삼는다. 불통의 시대에서도 대중은 비록 변형된 소통일망정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희망, 그 근저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가 나름대로 답할 의미 있는 소통에 비할 바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 해마가 날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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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
김형준 지음 / 강같은평화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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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師表)가 필요한 시대, 9명의 선한 목사를 만나다. :〈범사에 감사하라〉

 

성경은 이 시대를 말씀이 없어 기갈인 시대라고 부릅니다. 매 주일마다 수많은 말이 강대상을 통해 쏟아져 나오지만 그 말들이 영향을 끼치는 말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능력을 지니려면 말을 전하는 사람이 그 말에서 받은 실제적인 영향력을 체화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덕담과 훌륭한 미담이라도 그것들을 실제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지 않으면 속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뿐더러 본래의 맛을 충분히 살릴 수 없습니다. 이 경우 “글은 삶의 총량에 비례한다”는 말이 적절한 대구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빼어난 글도 삶이 밑바탕에 흐르지 않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대면관계에서 긴밀하게 이뤄지는 말에 있어서야 말의 밑바탕을 재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능력은 말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 어떤 위험성을 지녔는지 경고하는 성경의 경구입니다. 독백이 아닌 한 말은 대부분 상대방에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말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치의 혀가 지닌 말의 힘이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성경을 다루는 목사의 말은 사회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어서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부분을 망각하는 일이 잦아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최근 대형교회에서 원로목사의 은퇴를 둘러싸고 장로와 목사의 가족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급기야 당해 목사가 사실상 은퇴를 접는 양상으로 번진 일이나 기독교정당을 만들려는 부산한 움직임 속에서 함량미달의 발언이 나오는 등의 불협화음은 말과 삶의 불일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만 소망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대거 정부 소속 부처와 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고소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일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로 남아 있습니다.

 

 

세 명의 장로가 대통령이 되고 그를 따라 수많은 기독인들이 입각했음에도 사회에 사랑과 양선 등의 기독교적 가치를 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열매를 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열매가 없거나 성하지 않으면 본디 씨앗과 그 씨앗에서 비롯된 나무를 제대로 된 나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첫 모양새가 번듯하고 무언가 대단한 어떤 것을 낼 것처럼 보여도 실제 기대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농부는 과감하게 그 나무를 베어버립니다. 혹여 그 나무를 그대로 둘 경우 다른 나무들에게 갈 양분마저 빼앗아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그 나무를 뽑은 자리에 튼실한 나무를 심을 경우 다음 해에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목사는 엘리트와 지도자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기독교가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지켜보고 있기도 합니다. 목사 관계 사건사고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달리 보면 그만큼 사회에 목사에 대한 기대가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 삶과 말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은 필연코 행동으로 검증되는 때가 오는 법입니다. 그 시기가 며칠 후에 올 수도 있고 앞서 목사의 경우처럼 생의 마감을 십 수 년 앞둔 시점에서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그 시점에서 그가 한 행동이 그의 과거를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을 자임하려면 교회를 진두지휘하며 오롯이 언론에 노출된 목사부터 달라져야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장로도 있고 교인도 있는데 왜 나부터냐”고 항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의 직임 자체가 그토록 엄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뉴스타임 정치경제부 부장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김형준이 쓴 〈범사에 감사하라〉는 선한 목사의 길을 가는 참 목회자의 상을 단편으로 묶어 바른 지도자가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 시대에 작지만 힘 있는 울림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책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로 국립대학 총장 1호가 된 문선재 목사와 1년 1억을 나누는 작지만 큰 교회 옥수중앙교회를 섬기는 호용한 목사를 비롯해 총 9명의 목사가 등장합니다.

 

 

이들이 전하는 공통된 변은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사랑”입니다. 이것들은 전대미문의 경제위기와 사회 안전망 부재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면서도 유감스럽지만 그 실체가 사람들의 폐부 깊숙이 파고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향력을 갖춘 크리스천들이 부재하거나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비록 채 열 명이 되지 않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의인 열 명이 없어 망한 소돔과 고모라성의 예를 반면교사를 삼을 때 충분히 의미 있는 숫자가 될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을 하나 더 소개하면 하나같이 감사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삶은 여느 사람들처럼 곤궁하고 때론 원치 않는 역경에 처해 부르르 몸을 떠는 등의 복잡다단한 삶이었지만 그들은 끝끝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누군 세상의 기준으로 봐도 훌륭한 업적을 이룬 반면 누군 아직 갈 길이 더 남아있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순교로 자신을 드리기까지 헌신하였습니다. 신앙 외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으면 삶에 굴곡이 없고, 어려움은 나타났다가도 곡 사라지는 등의 환상을 갖기 쉽습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적인 면과 신앙적인 면, 물질적인 면 모두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게 문을 열어준다든지, 죄와는 별개로 내가 희망하지 않았지만 기꺼이 희생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인 신앙이 믿음의 이름으로 행해진 곳에서는 감사가 일어납니다. 비록 그 과정이 못내 힘들고 견디기 어려워도 믿음으로 가는 이유 또한 그 과정에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책에 언급된 9명의 목사들은 한결같이 동행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감사로 송축하고 있습니다. 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시대에 주목받는 목사가 아니어도 하나님께는 첫손가락에 뽑힐 목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 땅 곳곳엔 그런 목사들이 적지 않다는 희망 또한 발견합니다. 그래서 제게도 감사가 속 깊이 퍼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9명의 목사가 보인 삶과 증거에서 독자 모두 같은 크기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으로 말하지 않는 한 어떤 말도 사람을 웃거나 울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회적 영향력 또한 삶에서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들 9명의 목사가 우리 삶에 타산지석과 사표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의인 9명이 거둘 또 다른 열매에 주목하는 이유 또한 남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작지만 힘 있는 걸음을 계속하고 있는 이들을 조명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 이 시대를 충격하는 이와 같은 글들이 확대 재생산되기를 거듭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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