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톨스토이 단편집 Echo Book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병준 옮김 / 샘솟는기쁨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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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톨스토이가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삽니까?” 

 

고전문학이 다시 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고전문학은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 둔중하게 심장을 두드리는 작가정신이 심해처럼 가늠하기 힘든 깊이로 드리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읽어도 그때마다 감정이 살아나고 이야기가 새롭게 들려오는 거겠지요.

 

 

수년 동안 만나온 애인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런데 그(그녀)는 늘 새롭죠. 그(그녀)가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고전문학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이유도 그런 것 아닐까요?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오니 새롭게 보이는 것. SF 영화의 영향으로 스펙터클한 화면구성과 박진감 넘친 사건전개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고전문학을 읽어내려면 처음엔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애인에게 맞춰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과정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말문을 튼 애인과 놀랄 정도로 가까워지듯이 고전문학도 맛과 향취에 취하면 걷잡을 수 없지요.

 

 

평소 고전문학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고전문학이 주는 무게감과 톨스토이라는 작가의 아우라에 순간 멈칫했을 수 있습니다. 고전문학에 연전연패한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더더욱 명성이 주는 중압감에 주눅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런 부분을 섬세하게 짚어낸 작은 판형이 적절히 안도감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간단히 백에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꺼내 읽을 수 있을 정도니까 들고 다니는 부담이 확실히 적어졌습니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아스라한 풍경의 도판과 내용 정리와 사고를 이끌어내며 각각의 단편을 깔끔하게 갈무리한 QT가 한결 수월하게 이 책을 읽어내게 해주고 있습니다. 

 

 

단편 형식을 택한 것도 출판기획 면에서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수년 동안 이름 있는 출판사를 중심으로 고전문학이 장편의 전집형태로 묶여 나온 점을 감안할 때 장편 고전문학 시장이 겨냥한 독자들은 그 기간 동안 대부분 시장에 흡수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와중에 단편 시장이 소홀히 취급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 기획단계에서 이름난 단편을 발굴해내기가 쉽지 않은 게 직접적인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는 사이 단편 시장이 무주공산 처지로 전락했던 거지요. 그 틈새를 이 책이 파고들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출판계가 오랜 동안 장/단편 고전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진 형편에서 이 책이 고전 기독출판물의 출간 붐을 조성하는 마중물이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과거 1990년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나온 이후 그와 같이 묵직한 고전이 번역 출판되지 않은 현실에 못내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 책의 출간으로 기대감이 한껏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톨스토이라는 굵직한 작가의 단편집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로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리나》(1877) 등 불멸의 사실주의 작품을 남긴 톨스토이는 50대 초반에 회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에 실린 8편의 단편은 톨스토이가 50대에 쓴 소설로 평소 이야기를 민중의 언어로 사실감 넘치게 풀어간 성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린 그 예를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와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는 신앙에 대해 대담한 관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도 실제 대가를 치러야하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종교인들의 행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에서도 잘 차려입고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꾸며 말하는 호사가들을 경멸하는 풍조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저택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로 시작되는 단편은 그런 점에서 대단한 풍자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택에 모인 사람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지만 삶과 유리된 채 겉도는 그들의 말에서 당시 만연했을 무책임의 행태적 모순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파고들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신앙적 양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문학이 인생에서 전형을 획득하고 있다면 그건 시대를 막론하고 독자들을 자기성찰로 이끈다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젊은이는 경험해야 할 세계가 아직 많으니 섣불리 결단하지 말라거나 노인은 이미 충분히 즐겼으니 늘그막에 결단해서 식구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지금도 결단을 막는 유효적절한 장치로 사용하는 너와 나의 현실을 돌아보며 회개와 의식전환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톨스토이가 말하려던 바를 정확이 이해한 게 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함의가 문학적 형태로 돋을새김되어 어느 때보다 독자들을 깊은 성찰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이 단편의 가치가 시대를 건너 빛나고 있습니다.

 

 

책 제목과 같은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는 구도자적 관점에서 《천로역정》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회심한 톨스토이가 줄리어스의 입장에서 구도자인 유베날리우스를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자서전적 단편으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이 소설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영혼이 파괴된 인간 톨스토이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했던 행복과 평안이 어디서 기원하는지를 파노라마 같았을 자신의 인생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한 눈에 보이도록 그려주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단편에 불과하지만 마치 누군가의 인생 전반을 읽어낸 듯 그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이어 묵직한 소회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그건 이 소설이 기독교인이건 그렇지 않건 인생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며 추구할 바가 과연 돈과 권력, 향락이 전부인지를 성찰적으로 돌아보게 함으로써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가 닿을 곳에 대한 꿈을 꾸게 하며, 그렇게 피어난 결단의 열매가 얼마나 달콤한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 같은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구원받았다. … 죄인과 같은 나는 악하게 살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나처럼 사는 것을 보았다. … 마치 죄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나는 어떤 힘에 의해 그런 고통과 악의 삶에 못 박혔다. ... 이 모든 비극에서 나는 정확히 죄인과 같았다. … 그런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부터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생과 사가 악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절망 대신에 죽음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였다.”

 

 

이 글은 톨스토이가 1884년에 발표한 신앙고백의 일부입니다. 그의 회심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의 거듭남, 거기서 비롯된 행복과 기쁨, 이에 더해 악하게 살았던 과거의 내 전철을 밟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는 이후 내내 작품 속에 녹여냈습니다. 8편의 단편은 그런 톨스토이의 환희와 격정을 문학이라는 도구를 빗대어 첨가물을 전혀 가미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문호가 인생 후반부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물었다면 우리도 언젠가 한 번만이라도 그런 질문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 뭐 있어!” 하고 쉽게 처리할 만큼 우리 인생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겠습니까. 모처럼 만난 고전 단편에서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잠시 잊은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일에 휩쓸려 목적 없이 살아가는 직장인들에게 우선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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