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퍼 이펙트 -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필립 짐바르도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한 달쯤 전, 하나TV의 영화 채널을 검색하다가 지금은 제목을 잊어버린 외국영화를 선택한 적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사회심리학자의 실험에 동의한 일단의 사람들이 죄수와 간수로 나뉘어 한 감옥에 배치된다. 그들에겐 수주의 실험기간을 마치면 수당을 받고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는 조건이 붙는다. 감옥의 운영 원리는 간단했다. 죄수는 죄수역에 충실하고 간수는 간수역에 충실할 것. 그런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연구자의 통제가 심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간수들이 본래 목적을 벗어나 죄수들을 포악하게 다루기 시작했던 것. 그것에 맞춰 죄수들도 대응수위를 높이고, 결국 서로 죽이는 데까지 이른다. 실험은 파국으로 끝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깊이 사유했다. 그리고 그런 폭력성이 실험이라고 하는 약속된 공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에 의구심을 던진 한편으로 그런 조건이 갖춰진다면 실제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만큼 영화는 복잡했다. 물론 영화가 복잡한 것이 아니라 내 머리가 복잡했다고 해야 옳다. 바쁜 생활 탓에 충격적인 영화의 잔상은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리고 다시 며칠 전, 모 일간지 북섹션 기사에 시선이 꽂혔고 그와 동시에 난 다시 처음 그 영화를 본 날로 빠르게 돌아갔다. 1971년 실제 같은 실험이 있었단다. 그리고 실험의 윤리성 문제가 불거졌고 실험은 거기서 중단됐다. 그 실험의 주인공은 심리학자 짐바르도 교수다. 그는 이 책, 『루시퍼 이펙트』 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기사에서 '스탠퍼드대 지하 모의 교도소 실험'(SPE : Stanford Prison Experiment)의 원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인간 행동이 얼마만큼 합리적 선택과 자유의지를 따르는지, 강력한 상황적 힘에 좌우되는 건 아닌지 판단하려 했다. 선하고 지적인 평범한 대학생들이 교도관 역할을 맡아 악에 물들거나 수감자가 돼 병적인 희생자가 돼 가는 범위와 속도에 놀랐다."(2007.11.24일자, 조선일보 토일섹션 Books 2면, '수줍음의 감옥에서 당신을 해방시켜라' 중 일부)


저자는 상황적 강제(situational force)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풀이하면 이렇다. 실험의 예에서와 같이 어느 누구라도 특정 상황 가운데 속하게 되면 이성을 잃고 상황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것. 간수라는 우월적 존재와 피동적인 죄수, 그들을 지켜보는 연구자들, 그리고 이들 모두를 둘러싼 실험 환경이 상황적 강제의 동인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연구자가 폭력을 조장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간수들이 죄수들에게 행한 약간의 폭력을 연구자들이 통제수단으로서 적절하다는 판단으로 용인한 결과 간수들의 수위가 높아진 면도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로부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은 간수들이 폭력의 수위를 높여간 예는 상황은 다소 다를지언정 우리 주위에서도 심심치 않게 목도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직장 내에서 동료의 부당한 대접, 곧 무시하는 듯한 언행 등을 조직 차원에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경우 그것이 조직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깨진 유리창'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런 언행을 방조할 경우 차츰 상대방의 높아진 수위를 걷잡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고 상황논리를 전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나면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결과가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원인 제공자에 대해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또 다른 형태의 혼란이 불가피하다.

 

상황적 강제는 폭력성을 검증하는 탁월한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자발적 동조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중성은 임지현 교수의 '대중독재'(『대중독재』, 책세상)라는 용어에서도 만나게 된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 세력 하에서 국민의 행동은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고, 폭력적 상황에서 운신의 폭이 크지 않은 국민에게 세력이 쏟아놓은 폭압과 민주주의 등 가치 말살의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바로 그런 인식에 균열을 일으킨 것이 바로 대중독재라는 용어다.

 

그 용어는 일인 독재라는 말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대중의 방조 또는 동조 없는 독재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리고 그런 일단의 논리에 히틀러 독재 하의 독일과 5.18 광주 학살 세력 하의 한국이 하부구조를 이룬다. 동조는 아니어도 방조가 있었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독재가 가능했다는 임 교수의 말은 국민들 또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며 역사 앞에 깊은 반성과 성찰을 내놓아야 한다는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대중에게 눈을 돌리느라 독재자와 그 수하들의 행태를 또 다른 형태로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점을 어디에 꽂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는 논리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물론 그런 설익은 논리가 다듬어지면 사회 전체를 해석하는 일반 논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고, 다양한 비판과 수용의 과정이 국민의식을 더욱 성숙케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이론이든 지식의 시장에 과감히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장은 사회가 유연해질수록 더욱 확대될 것이다.

 

상황적 강제가 지닌 함의가 폭력성의 근원에 대한 심층적인 사고와 폭력의 내면화 과정의 신속성에 대한 재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각의 폭이 넓다. 일견 상황적 강제는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과도 연결된다. 원형감옥 안에 갇힌 죄수들은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탑에 주목한 결과 간수들이 보건 보지 않건 자발적으로 수칙을 준수하고 복종하게 되는데, 이런 일련의 결과가 위 모의 교도소 실험에서의 수감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수감자들이 연구자가 생각한 것 보다 신속하게 자신들이 취할 행동양식에 적응하고, 교도관의 폭력을 당연한 물리력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상황적 강제의 힘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곧 상황의 힘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구속하는 변수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 지난 2002년 『파놉티콘』(홍성욱 저, 책세상)을 읽고 다음과 같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고민이 여전히 그 그늘을 거두지 않고 있다.


"전통적인 파놉티콘의 메카니즘을 간수의 시선이 중요한 코드라는 의미에서 '시선 파놉티콘'이라고 한다면, 현대의 통제 메카니즘은 정보가 키워드라는 점에서 '정보(전자) 파놉티콘' 이라 할 수 있다. 정보는 벤담의 파놉티콘에서의 시선을 대신하여 통제의 기제로 작동하면서 시선이 가지고 있던 지역성을 뛰어넘어 그 감시 능력을 범사회적·전지구적으로 확산해 나간다. 간수가 감시탑에 숨어서 감시하던 중앙 통제 메카니즘이 감시의 층위를 다양화함으로써 보편적인 감시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2002년, 지금은 폐쇄된 blog.co.kr에 올린 글의 일부)


상황이라고 하는 변수에 다시 주목하게 된 촉매는 이미 밝혔듯이 제목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한편의 영화다. 그것이 점화체가 되었고 아침에 배달된 신문 기사가 연상작용을 일으켰다. 곧 과거에 읽은 책의 내용이 떠올랐고 마침내 『루시퍼 이펙트』를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의지로까지 발전했다. 폭력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깊이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이 그 중심에 있었다.

 

력의 양태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되어 왔다. 따라서 폭력의 재생산과정을 막으려면 여하한 형태의 폭력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본질적인 의미의 폭력성에 주목해야만 한다. 같은 이유에서 이런 부류의 책이 자주 출간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그 책들의 내용이 잠자는 의식을 깨우는 기제로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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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훌 2007-12-13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엑스페리먼트"라는 독일 영화를 보셨던거군요.
저도 그 영화 보고 실화인줄 알면서도 상당히 충격받았었는데;; 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