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 날다 - 2011년 제12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윤고은 외 지음 / 문학의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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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전달하는’ 코미디 프로에서도 소통은 대세다. 사진 내용은 이렇다.

개그맨이 관객에게 다가가 대뜸 “송실장 어디 있나?”하고 불렀고 놀란 관객이 반응이 없자

“자기가 송씨다 싶으면 일어나!”하고 소리쳐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송실장으로 지목한 관객을 무대에 올려 개그를 이어가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지난 해 모 연극도 같은 방식으로 관객을 극중 인물로 만들어 신선한 웃음을 선사한 바 있다.

 

 

당신의 해마는 괜찮은가? : 소통부재의 현실을 충격한 소설, 〈해마, 날다〉

 

 

좋은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좋은 작품을 읽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 〈해마, 날다〉의 경우는 앞서 반대의 경우에 해당한다. 책 표지에 실린 작가 윤고은의 사진은 낯설었다. 거기에 작품 제목까지도. 물론 제목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암시할 필요는 없지만 은연중에 제목을 통해 작품의 경향을 유추하곤 한 과거 대학생시절의 기억이 아무 때고 튀어나온 탓이다. 아무튼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날 저녁 이 책을 사들고 근처 커피숍에 갔다.

 

 

산 책을 서둘러 읽을 요량으로 커피숍에 갔을 거라는 추측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아내와 작은 다툼이 있었고, 그래서 약간의 숙련기간 아니면 괜스레 심통이 나서 늦게 들어갈 생각으로 읽을 책이 많이 남아 있었음에도 책을 사고 커피숍에 들었던 것이다. 늘 먹던 뜨거운 아메리카노 커피를 주문해 탁자 위에 놓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역시 첫 모금이 제일 맛있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열었다.

 

 

윤고은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왔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4년 〈피어싱〉으로 제2회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았다. 2008년에는 무중력증후군으로 제13회 한겨레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이 정도의 프로필만 가지고는 윤고은의 작가적 경향이라든지 문체의 특징 등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낸 〈1인용 식탁〉과 〈무중력증후군〉 모두 읽지 못했으니 더더군다나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내로라하는 문학상 수상 작가라고는 해도 사전 지식이 없던 내게 그 문학상이 주는 기대감은 사실 많지 않았다. 생경하거나 문제의식만 두루 던진 수상작도 더러 있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나 읽은 뒤에 밀어닥칠 실망감이나 낙담이 적이 걱정되기도 했다. 위안이 됐다면 그건 제2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가에 성석제가 올랐다는 것인데, 성석제는 오래 전 그의 대표작이자 수상작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대학시절 이후 중단되었던 내 소설읽기의 물꼬를 터준 소설가이자 이후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듯 사건이 있거나 가벼운 책읽기로 숨을 돌리자 할 때 소설을 들게 한 보기 드문 작가였다.

 

 

윤고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소설집을 읽을 추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해마, 날다〉를 중간쯤 읽었을 때 그새 책을 여러 번 덮은 나를 발견하곤 윤고은의 작가적 밀도가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건 일종의 습관인데, 난 내용이 신선하거나 감격스럽게나 충격적일 때 생각을 가다듬을 요량을 그런 식으로 방출하곤 했다. 때론 맛난 음식을 아껴 먹듯 수일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적도 있었다. 물론 〈해마, 날다〉는 단편소설이었으니 오래 들고 있을 게재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해마, 날다〉가 충격한 소통부재의 현실에 대한 건조한 고발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했다. 술 취하지 않고는 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 군상들이 즐비한 현대사회에서 그나마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면식도 없는 또 다른 누군가를 돈을 내고 찾아야 하는 현실이 그저 소설 속 환경으로만 치부되지 않았다. 그건 작가가 겨냥한 이 세계가 소통에 관한 한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소통을 이야기하고 그 방식에 관해 끊임없이 토론을 벌이지만 실제 그만큼의 소통이라도 이뤄질지에 관해 자신하지 못하는 사회임에야 달리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뭉스럽다. 불통이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세계가 구조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어도 수긍이 갈 만한 세상으로 변모한 건 아닌지 더더욱 걱정이다.

 

 



 

 

소통 어쩌구 얘기하다는 것부터 이 세상에 불통이 만연해 있다는 것의 반증이고 보면 소통을 아무리 외친들 그 본질적인 의미, 곧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의 페기처분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복원에 관한 염원 없이 소통부재의 현실이 변혁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그럭저럭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야하는 사람은 문득 자주 ‘필름이 끊기는’ 걸 적잖이 걱정하며 직장에서 떨려나가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아침 출근길을 재촉한다. 특히 청년실업이 최고조에 달한 현 상황을 보면 술 먹은 다음날이라고 버젓이 휴가를 내 쉬고 지시받은 게 내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일이 아닌 건 맞다. 퇴직한 아버지와 2,30대의 아들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하는 비정한 현실 위에 그런 행위들은 배부른 일로 치부되는 것 또한 섣부르지만 먹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그러니 해마24처럼 잘리지 않기 위해서 ‘소주를 한 병 이상 마시고 음주통화를 해서도 안’ 되고 더군다나 ‘고객과 싸우는 일은 있어서도 안’ 된다. 그곳에서 잘리는 건 멸종과도 같은 일이다. 멸종이 별 건가?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아주 잊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멸종 운운하면서 그토록 진지했던 것이다. 잊히는 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학벌, 외모, 외국어 실력, 관련 분야 경력, 화법, 성격, 그 모든 것들을 '객관화'하던 아버지는 내 밋밋한 이목구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했다. ... (중략) ...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하던데, 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그런 애들은 멸종 위기를 겪는다고 대답했다. 인정하고 발전시킨 종이 살아남는다며, 아버지는 진지했다."

 

 

짐 월리스는 〈가치란 무엇인가〉에서 현대사회의 병폐로 ‘탐욕은 선’이라는 거짓 명제를 섬기고 ‘가장 중요한 건 나’라는 그릇된 관념을 일상화하고, ‘나는 이 모든 것을 원하고 그것을 지금 당장 갖고 싶다’는 즉물적인 욕망을 거침없이 내뱉는 데 있음을 지적했다. ‘중요한 건 나’라는 고집스러운 개인주의가 주로 화상이나 사고, 그 밖의 상처를 고치는 데 사용된 성형수술을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시켰고 개탄했다. 성형수술이 미용으로 한창 인기를 끄는 것과 더불어 요즘엔 부정교합을 치료하는 양악수술이 동안수술로 이름을 바꿔 타며 급선호되는 양상이고 보면 사실 더 이를 말도 없다.

 

 

필름이 끊긴다는 건 정확히 말하면 해마가 기억을 제대로 입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성형수술과 양악수술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미용법으로 유통되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해마에 입력된 기억을 부러 지우려한 결과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성형을 동원해서라도 사회에 진입하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도 사회가 그것들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거나 ‘동안이 대세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려서는 곤란하다. 건강한 사회라면 적어도 그것들을 조장하는 이해관계자의 반대편에 서서 곧 일자리 부재의 현실과 외모 제일주의를 외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게 순서다. 그럼으로써 이 세대가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도록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유의미한 수단을 버리고 부추기는 데 몰두하는 한 공멸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암전, 필름이 끊긴다. 해마, 해마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끊긴 필름에 대해 추궁하지도, 타박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저 동참할 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해마8에서 쫓겨난 ‘나’는 술에 취한 채 과거 내 자리를 꿰찬 해마8에게 전화한다. 과거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해마8은 역시나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적당히 대꾸하며 대화를 끌어간다. 그리고 한참 흘러 취기가 더욱 오른 ‘내’가 나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비틀거리던 순간을 지나 마침내 필름이 끊겼을 때, 그래서 그 시각 후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조차 해마8은 대꾸하기를 멈추지 않았을 걸 잘 안다. ‘난’ 돈을 내고 소통을 위해 그를 샀고 그는 나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직장을 다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세상은 참으로 암울하다. 암울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소통에 돈을 거는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니기에 그렇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게 변해도 사람살이라는 게 살가운 정을 토대로 하는 것인데, 어디 그리 되어서야 사람 산다고 하겠는가. 사람살이의 보편적인 정서가 상호 존중감과 배려로 표현된다는 걸 우리 속 해마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마8이었던 내가 해마8에게 전화를 건 일이 무척 곤혹스러워도 해마8이 ‘나의 끊긴 필름에 대해 추궁하지도, 타박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 것에서 불안하게나마 소통하고 있음에 위안을 삼는다. 불통의 시대에서도 대중은 비록 변형된 소통일망정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희망, 그 근저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가 나름대로 답할 의미 있는 소통에 비할 바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 해마가 날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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