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항상 결심만 할까 - 게으름과 딴짓을 다스리는 의지력의 모든 것
켈리 맥고니걸 지음, 신예경 옮김 / 알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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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난 결심한 대로 살지 못할까?

삼일 만에 퍼지는 당신을 위한 급 회생 처방

 

 

‘불광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미쳐야한다는 것입니다. 조금하다 지치면 다른 것을 기웃거리고 이것 찔끔 저것 찔끔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린 대부분 무언가 하려하면 결심부터 하고 봅니다. 결심을 해야 그 일에 대한 추진력이 생기고 전과 달리 그 일에 힘을 쏟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자주 결심만 할 뿐 결심한 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생긴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 삼일이라도 힘을 쏟았으면 그게 어디냐는 말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될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벼운 결심이라도 결심 한 사람의 입장에서 가벼운 결심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견 대담하게 결심하고 덤볐는데 삼일도 못돼 결심이 꺾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알리지 않은 결심이라도 며칠 동안 자신의 의지박약을 탓하며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가 본질적으로 불행한 기억이나 나쁜 기억은 빨리 잊으려는 심리기제를 갖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심리가 없다면 아마도 자존감에 심한 상처를 입거나 우울증에 걸리는 등의 곤란을 겼을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 궁금합니다. ‘주변에서도 그렇고 내 경우를 봐도 결심한 대로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의지력은 특정인의 전유물인지 모르겠어?’ 하는 그런 생각 말이죠.

 

 

아마도 최근에 또는 기억 속에 여러 번 작심삼일을 경험한 분이라면 그 생각에 맞장구를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사는 동안 결심한 대로 이룬 것 보다 결심만으로 그친 경우가 많았던 데서 더더욱 그런 생각에 동의하실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의지력은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수준 높은 어떤 이들이 지닌 놀라운 특성이라고 치부하고 보는 거지요. 경험에 의지해 그렇게 믿어버린다고 사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결심했다 좌절하고 다시 결심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세월은 흘러가고 당신 앞엔 별로 내세울 것 없는 훈장 몇 개만 남아있게 될 뿐입니다. 일견 모든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밟으며 살고 있다고 보면 그리 손해나는 선택도 아닐 것 같습니다.

 

 

미국 텍사스의 한 대학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절대 흰 곰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심리학 교수가 그렇게 학생들에게 주문한 후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평소대로라면 친구 만날 생각과 주말에 누구와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느라 부산했을 학생들이 생각하지 말라고 한 흰 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느라 진땀을 빼야했습니다. 교수는 실험을 통해 우울증과 중독 등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병리현상을 날카롭게 포착했습니다. 의지력이란 통제하려고 하면 더더욱 그 반대의 결과를 낸다는 역설이 그것입니다.

 

 

 

 

 

교수의 지시니 만큼 학생들은 흰곰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그것이 가능하기도 했습니다. 시간 지나자 느닷없이 흰곰 생각이 큰 폭으로 자리잡아갔고 나중엔 아예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꽉 차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안을 떨쳐내려고 하면 할수록 불안 증세에 더욱 시달린다든지, 중독 증상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 게 도리어 더더욱 그 중독에 빨려 들어가는 현상 모두 집착이 만들어낸 반동효과라는 게 실험 결론이었습니다.

 

 

'흰곰 생각 실험'으로 불리는 그 실험의 별리현상에 대해 이 책은 집착을 포기하고 화해하라하고 처방하고 있습니다. 통제하려다가 오히려 말려드는 역설에 또 다른 역설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버리면 그런 생각과 감정 또한 나를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살다보면 닥친 일의 크기보다는 그 일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년 전에 전 대략 3개월 동안 눈만 감았을 뿐 의식이 또렷한 상태로 잠자리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처음 며칠은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이내 바로 잡힐 거고 전과 같이 푹 잘 날이 올 거라고 단순하게 처리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부터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같은 상태를 불면증이라고 자체 진단한 전 불면증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각종 처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몸을 피곤하게 하려고 초저녁 운동을 시작한 건 물론 와인이 도움 된다는 말에 잠자리에 들기 직전 한 두 모금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지기는커녕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 석 달이 다 되었습니다. 당연히 피곤한 몸은 둘째 치고 이러다가 큰 일 날 것 같은 생각에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처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습니다. 아마도 어떤 프로젝트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냥 체념한 채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프로젝트 때문이건 체념 때문이건 불면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린 게 주효했습니다. 불면의 밤을 3개월을 보내고 나서 또 다시 한 달이 흐르고 나서야 ‘어?, 불면증이 사라졌어’하고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어떤 현상을 뿌리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오히려 원하지 않은 결과로 귀착된 셈입니다. 치료는 불면증 자체를 잊은 데서 왔습니다.

 

 

불안의 근원 - 장정아

 

 

저자의 처방은 보다 적극적입니다. 한쪽으로는 버리되 또 다른 한쪽으로는 화해하라는 양동작전으로 저자의 처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보통 사람이 의지력이 박약한 반면 특정인들은 대단한 의지력을 갖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결심과 좌절에 대한 생각의 차이와 그 차이로부터 비롯된 훈련의 결과로 생각 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의지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누구든 훈련에 의해 의지력을 키울 수 있을 뿐더러 보다 나은 선택을 한 후 그것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지력을 키우는 첫 단추는 결과를 보면 결심만 하고 끝내는 나의 현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편적으로 어려운 일은 하지 않고 불편한 상대는 피하고 싶어 하는 회피기제를 갖고 있습니다. “올핸 틀림없이 다이어트를 하겠어!”, “반드시 담배를 끊을 거야!” 하는 등등의 새해 결심을 야심차게 해놓고 실천 계획을 빼곡히 세워 며칠 동안 시작에 불을 당기듯 화려하게 팡파르를 울리지만 그것도 잠시 고작 삼일, 길게는 한 달 정도에서 멈추는 행동을 반복하고 보면 다시는 결심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심한 경우 자책은 물론 자신에 대해 경멸조의 태도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징벌적으로 전 보다 더 먹는다든지, 더 많이 피우는 등의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런 행태는 나만 의지가 박약하다거나 의지력은 다른 누군가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믿는 데서 비롯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결심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경멸 또한 사람의 보편적인 습성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린 평생을 게으름과 의지박약과 싸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에서 훈련에 대한 의지가 싹틀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의지력을 키우는 다양한 훈련방식을 제시하기에 앞서 다양한 사례와 실험을 먼저 소개함으로써 언제고 맞닥뜨릴지 모를 좌절이 본인 특유의 현상이 아니니만큼 용기를 가지라고 설득합니다. 아무리 좋은 훈련이라도 중간 중간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실패가 전적으로 내 잘못이라고 치부하면 훈련은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실패 뒤에 놓인 성공을 보기 위해선 적어도 잠깐의 실패가 앞선 이들이 이미 겪은 과정이라는 점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의지력 훈련에 돌입하기에 앞서 다양한 실패 사례를 적시한 것에 대단한 함의가 있습니다.

 

 

이 책의 각 장은 성과에 도달하는 과정을 핵심개념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충족하는 과학적 결과, 이어 개인적 적용이라는 순서를 밟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는 같은 실패에 좌절함 없이 과학적 결과를 믿고 자신에 대해 기꺼이 투자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가 대표팀 감독을 지낸 히딩크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로 선수들을 독려하곤 했습니다. 피하기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닌 것처럼 피할 수 없다고 해서 힘겹게 그 과정을 밟아갈 필요 또한 없습니다. 어떤 마음자세를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훈련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게 인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가면 언젠가 바란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이 실패와 좌절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새 도전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불태우게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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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 날다 - 2011년 제12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윤고은 외 지음 / 문학의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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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전달하는’ 코미디 프로에서도 소통은 대세다. 사진 내용은 이렇다.

개그맨이 관객에게 다가가 대뜸 “송실장 어디 있나?”하고 불렀고 놀란 관객이 반응이 없자

“자기가 송씨다 싶으면 일어나!”하고 소리쳐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송실장으로 지목한 관객을 무대에 올려 개그를 이어가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지난 해 모 연극도 같은 방식으로 관객을 극중 인물로 만들어 신선한 웃음을 선사한 바 있다.

 

 

당신의 해마는 괜찮은가? : 소통부재의 현실을 충격한 소설, 〈해마, 날다〉

 

 

좋은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좋은 작품을 읽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 〈해마, 날다〉의 경우는 앞서 반대의 경우에 해당한다. 책 표지에 실린 작가 윤고은의 사진은 낯설었다. 거기에 작품 제목까지도. 물론 제목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암시할 필요는 없지만 은연중에 제목을 통해 작품의 경향을 유추하곤 한 과거 대학생시절의 기억이 아무 때고 튀어나온 탓이다. 아무튼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날 저녁 이 책을 사들고 근처 커피숍에 갔다.

 

 

산 책을 서둘러 읽을 요량으로 커피숍에 갔을 거라는 추측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아내와 작은 다툼이 있었고, 그래서 약간의 숙련기간 아니면 괜스레 심통이 나서 늦게 들어갈 생각으로 읽을 책이 많이 남아 있었음에도 책을 사고 커피숍에 들었던 것이다. 늘 먹던 뜨거운 아메리카노 커피를 주문해 탁자 위에 놓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역시 첫 모금이 제일 맛있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열었다.

 

 

윤고은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왔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4년 〈피어싱〉으로 제2회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았다. 2008년에는 무중력증후군으로 제13회 한겨레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이 정도의 프로필만 가지고는 윤고은의 작가적 경향이라든지 문체의 특징 등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낸 〈1인용 식탁〉과 〈무중력증후군〉 모두 읽지 못했으니 더더군다나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내로라하는 문학상 수상 작가라고는 해도 사전 지식이 없던 내게 그 문학상이 주는 기대감은 사실 많지 않았다. 생경하거나 문제의식만 두루 던진 수상작도 더러 있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나 읽은 뒤에 밀어닥칠 실망감이나 낙담이 적이 걱정되기도 했다. 위안이 됐다면 그건 제2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가에 성석제가 올랐다는 것인데, 성석제는 오래 전 그의 대표작이자 수상작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대학시절 이후 중단되었던 내 소설읽기의 물꼬를 터준 소설가이자 이후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듯 사건이 있거나 가벼운 책읽기로 숨을 돌리자 할 때 소설을 들게 한 보기 드문 작가였다.

 

 

윤고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소설집을 읽을 추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해마, 날다〉를 중간쯤 읽었을 때 그새 책을 여러 번 덮은 나를 발견하곤 윤고은의 작가적 밀도가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건 일종의 습관인데, 난 내용이 신선하거나 감격스럽게나 충격적일 때 생각을 가다듬을 요량을 그런 식으로 방출하곤 했다. 때론 맛난 음식을 아껴 먹듯 수일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적도 있었다. 물론 〈해마, 날다〉는 단편소설이었으니 오래 들고 있을 게재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해마, 날다〉가 충격한 소통부재의 현실에 대한 건조한 고발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했다. 술 취하지 않고는 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 군상들이 즐비한 현대사회에서 그나마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면식도 없는 또 다른 누군가를 돈을 내고 찾아야 하는 현실이 그저 소설 속 환경으로만 치부되지 않았다. 그건 작가가 겨냥한 이 세계가 소통에 관한 한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소통을 이야기하고 그 방식에 관해 끊임없이 토론을 벌이지만 실제 그만큼의 소통이라도 이뤄질지에 관해 자신하지 못하는 사회임에야 달리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뭉스럽다. 불통이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세계가 구조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어도 수긍이 갈 만한 세상으로 변모한 건 아닌지 더더욱 걱정이다.

 

 



 

 

소통 어쩌구 얘기하다는 것부터 이 세상에 불통이 만연해 있다는 것의 반증이고 보면 소통을 아무리 외친들 그 본질적인 의미, 곧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의 페기처분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복원에 관한 염원 없이 소통부재의 현실이 변혁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그럭저럭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야하는 사람은 문득 자주 ‘필름이 끊기는’ 걸 적잖이 걱정하며 직장에서 떨려나가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아침 출근길을 재촉한다. 특히 청년실업이 최고조에 달한 현 상황을 보면 술 먹은 다음날이라고 버젓이 휴가를 내 쉬고 지시받은 게 내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일이 아닌 건 맞다. 퇴직한 아버지와 2,30대의 아들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하는 비정한 현실 위에 그런 행위들은 배부른 일로 치부되는 것 또한 섣부르지만 먹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그러니 해마24처럼 잘리지 않기 위해서 ‘소주를 한 병 이상 마시고 음주통화를 해서도 안’ 되고 더군다나 ‘고객과 싸우는 일은 있어서도 안’ 된다. 그곳에서 잘리는 건 멸종과도 같은 일이다. 멸종이 별 건가?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아주 잊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멸종 운운하면서 그토록 진지했던 것이다. 잊히는 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학벌, 외모, 외국어 실력, 관련 분야 경력, 화법, 성격, 그 모든 것들을 '객관화'하던 아버지는 내 밋밋한 이목구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했다. ... (중략) ...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하던데, 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그런 애들은 멸종 위기를 겪는다고 대답했다. 인정하고 발전시킨 종이 살아남는다며, 아버지는 진지했다."

 

 

짐 월리스는 〈가치란 무엇인가〉에서 현대사회의 병폐로 ‘탐욕은 선’이라는 거짓 명제를 섬기고 ‘가장 중요한 건 나’라는 그릇된 관념을 일상화하고, ‘나는 이 모든 것을 원하고 그것을 지금 당장 갖고 싶다’는 즉물적인 욕망을 거침없이 내뱉는 데 있음을 지적했다. ‘중요한 건 나’라는 고집스러운 개인주의가 주로 화상이나 사고, 그 밖의 상처를 고치는 데 사용된 성형수술을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시켰고 개탄했다. 성형수술이 미용으로 한창 인기를 끄는 것과 더불어 요즘엔 부정교합을 치료하는 양악수술이 동안수술로 이름을 바꿔 타며 급선호되는 양상이고 보면 사실 더 이를 말도 없다.

 

 

필름이 끊긴다는 건 정확히 말하면 해마가 기억을 제대로 입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성형수술과 양악수술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미용법으로 유통되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해마에 입력된 기억을 부러 지우려한 결과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성형을 동원해서라도 사회에 진입하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도 사회가 그것들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거나 ‘동안이 대세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려서는 곤란하다. 건강한 사회라면 적어도 그것들을 조장하는 이해관계자의 반대편에 서서 곧 일자리 부재의 현실과 외모 제일주의를 외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게 순서다. 그럼으로써 이 세대가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도록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유의미한 수단을 버리고 부추기는 데 몰두하는 한 공멸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암전, 필름이 끊긴다. 해마, 해마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끊긴 필름에 대해 추궁하지도, 타박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저 동참할 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해마8에서 쫓겨난 ‘나’는 술에 취한 채 과거 내 자리를 꿰찬 해마8에게 전화한다. 과거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해마8은 역시나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적당히 대꾸하며 대화를 끌어간다. 그리고 한참 흘러 취기가 더욱 오른 ‘내’가 나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비틀거리던 순간을 지나 마침내 필름이 끊겼을 때, 그래서 그 시각 후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조차 해마8은 대꾸하기를 멈추지 않았을 걸 잘 안다. ‘난’ 돈을 내고 소통을 위해 그를 샀고 그는 나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직장을 다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세상은 참으로 암울하다. 암울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소통에 돈을 거는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니기에 그렇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게 변해도 사람살이라는 게 살가운 정을 토대로 하는 것인데, 어디 그리 되어서야 사람 산다고 하겠는가. 사람살이의 보편적인 정서가 상호 존중감과 배려로 표현된다는 걸 우리 속 해마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마8이었던 내가 해마8에게 전화를 건 일이 무척 곤혹스러워도 해마8이 ‘나의 끊긴 필름에 대해 추궁하지도, 타박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 것에서 불안하게나마 소통하고 있음에 위안을 삼는다. 불통의 시대에서도 대중은 비록 변형된 소통일망정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희망, 그 근저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가 나름대로 답할 의미 있는 소통에 비할 바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 해마가 날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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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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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밌다, 이 소설! 시간이 아깝지 않은 소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일어날 법한 이야기 또는 언젠가 한번쯤 벌어졌을 이야기, 독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현실로 불러와 그 이야기에 놀랍도록 현장감을 부여한 소설에 끌린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추리작가들은 소설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주변, 더 가깝게는 이웃에서 벌어진 이야기로 꾸민 사람들이다. 모르긴 해도 작가가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소설 속 사건이 나 또는 가족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불안감을 넣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꾸민 이야기인 추리소설의 생명력은 꾸민 이야기라는 인상을 최소화하는 데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작가는 거기서 더 나가 앞서 언급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의 범주에 자신의 소설을 끌어다 놓고자 애쓴다. 작가는 예의 돌발적 상황 전개와 정교하게 얽힌 복선, 예측불허의 심리묘사, 마지막 순간까지 행방이 묘연한 범인의 존재 등의 장치를 통해 작가적 상상력을 무한 증폭시키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작가의 노력이 한편의 잘 짜인 추리소설로 독자에게 선보이는 것. 문단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난 스스럼없이 그 반열에 최근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에 이름을 등재하면서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올려놓고자 한다. 단지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라서가 아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앞서 표현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일어날 법한 이야기의 요소들을 모두 갖춰 놓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 마을에서 오래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그 소설은 살인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그로테스크한 불안과 불안을 덮으려는 또 다른 음모, 그리고 음모 이면에 똬리를 튼 마을 전체의 공동정범의식 등을 신랄하게 드러내면서 독자를 그날의 사건 현장으로 데려간다. 현장을 지켜보던 독자는 순간 자신이 수사요원에게 동질감을 크게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수사요원을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에 앞서 조각난 단서를 이리저리 조합해 장차 벌어질 일을 예측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다음 수순.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시종 소설은 엄지와 검지를 가만두지 않았다. 책장은 쉴 새 없이 넘겨졌고 봄볕에 나가놀 생각에 이리저리 들썩이는 엉덩이를 한사코 의자에 붙들어 놨다. 하지만 그게 다 라면 그냥 그랬을 것이다. 만약 그게 전부였다면 작가와 간격을 적절히 유지하고 걸으면서 그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씽긋 웃어주는 센스를 적잖이 발휘했을 터였다.

 

가상현실과 현실 사이의 적절한 간격은 그렇지 않아도 매일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을 테니 여타 추리소설이 그 간격을 메우지 않는다고 뭐라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간격이 추리소설의 맛이라고 내 나름대로 정한 ‘뒷목을 타고 끊임없이 흐르는 긴장감’에 어깃장을 놓더라는 그간의 감상이다. 그래서 언제고 한 번 마치 장자처럼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다던 장자처럼 ‘이게 소설인지 현실인지’ 모를 모호한 경계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과연 이 소설은 간단히 그 경계를 허물더니 미처 준비되지 못한 독자를 그 중심에 밀어 넣어 버렸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야 거기서 빠져나왔으니 달리 할 말도 없다.

 

수년 전 독일작가의 소설 한편을 읽은 적이 있다. 장 그루니에의 인간체취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그린 그 소설은 동명의 영화, 〈향수〉로 재탄생돼 시중에 향수 바람을 몰고 왔다.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그 소설은 독일작가의 역랑을 알린 서곡이 되었고, 나와 같은 잠재적인 독자를 양산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반가웠다. 그 반가움이란 작가가 독일인이라는 훌쩍 넘고 있었다. 독일 추리소설이 세계에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팩 표지 소개를 통해 새삼 탄탄한 문학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향수〉를 읽을 때만해도 고색창연한 독일 문학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중성과는 벽을 쌓았을 거라는 편견 또한 견고했다. 〈향수〉가 그와 같은 편견을 허물긴 했지만 〈향수〉야말로 ‘소가 뒷걸음치다 뭣 밞은 격’이라고 단정할 뿐이었다. 어쩌다 혜성같이 나타난 소설 한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거나 없을 소설의 영역에 〈향수〉를 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천석고황처럼 굳은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허문 것이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다.

 

누군 추리소설이 문학의 본류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소설이 문학성을 전취하든 대중성을 획득하든 그것이 무슨 대수랴! 읽히지 않는 소설이란 허울 좋은 훈장일 뿐인 걸. 고작 몇 날 꺼내놓고 어루만지며 과거를 회상하는 정도의 훈장 나부랭이라면 그것 갖다 뭐에 쓸까? 대중이 좋아한다고 모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 하나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기 위안적, 자기 만족적 문학성은 잠시 뒤로 밀쳐둬도 나쁘지 않을 일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수백 년 동안 독자의 심금을 울린 명작을 도매금으로 넘긴다고 단정하지 말기를. 문학이든 예술이든 급을 나눠야 직성이 풀리는 문단 내부의 카르텔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쯤 알아주실 거라 믿는다.

 

아무튼 이 소설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별 다섯 개를 줘도 아깝지 않다. 모처럼 짬을 내 창덕궁에 들른 지난 6일, 이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해 1시부터 4시까지 황금시간대 전부를 차압당했으니 더 덧붙일 말이 없다. 봄볕에 한껏 몸을 띄워보자던 당초 계획이 하릴없이 무산된 것은 물론 점심을 챙겨먹지 않은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그날 5시를 넘겨서야 저녁인 줄 알고 수저를 들었다. 이 정도면 흡입력의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지 않을까? 백 마디 말보다 “무척 재밌다”는 말 한 마디가 더 낫기는 하겠다. 재밌다. 그것도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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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삶 김우현의 팔복 시리즈 3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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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말이 어눌하고 몸마저 부실하다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실마저 가릴 순 없다.




나이 탓일까?
요즘 들어 특히 목구멍을 타고 뜨겁게 올라오는 격정을 삼키는 일이 잦다.
다큐멘터리와 수필에 촘촘히 박힌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고 또 읽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목젖이 뜨거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대목이 나올 쯤 되면 우선 준비부터 하고 본다.

글은 기승전결이 있기 마련이라 어느 부분에서 심금을 울릴지 예측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 직전에 마른 침 한번 크게 삼키고 눈을 보통 때보다 조금 더 부릅뜨면 된다.
희한하게도 그런 장면이나 대목이 나올 때면 곁에 누군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눈물을 보이거나 잠시 말을 잊지 못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면 낭패다.

하지만 준비한 대로 잘 넘어간 적은 없다.
헛기침으로 시선을 돌리긴 했어도 목젖까지 올라온 놈을 누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때론 헛기침이 괜한 주목을 끌어 붉게 충혈된 눈을 보였을 수도 있다.
감정이 복받쳐 울컥 하고 올라온 그걸 아예 없던 일로 잘 틀어막았단 소리를 들은 적 아직 없다.

통제되기 않는 감정기제 앞에 이성은 그저 무기력하기만 한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화문에서 액자와 부채 등 잡동사니를 좌판에 널어 파는 정재완 씨와
그를 ‘늘 광화문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친구, 허허로운 시간을 때워줄 친구로 20년을 알고지낸 김우현 감독 때문이다.
정재완 씨는 어릴 적 병치레로 손이 곱았다. 걸음도 힘들고 표정도 남다르다.

그를 주인공 삼아 영화를 만들기로 한 날 정재완 씨가 김우현 감독에게 출연료로 얼마 줄 거냐고 물었다.
다음은 그 이야기의 전문이다.

“넌 ... 얼마 받고 싶은데?”
“한 백 억 정도는 받고야 말테다.”
"형, 장동건, 이병헌 보다 더 많이 받을 거야?”
도현이가 곁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 도현이도 영화를 만들면 음악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반드시 백억은 받아야 해!”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인상까지 쓰면서 난리다.
“우리의 영화는 영원히 만들어지지 않겠군.”
“이 영화의 출연료는 너 한테 안 받고 하나님께 받겠다는 말이야.”
우리는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감동했다.
“어이! 친구 ... 그런 거였어? 역시 우리 영화사 대표 배우답다.”
“우리 영화는 하나님이 제작자이시니까 하늘에서 상급을 받아야 해.”
재완이는 가끔 이런 예상치 못한 멘트로 나를 감동시킨다.

입이 걸걸하고 때론 고집불통인 재완씨가 출연료로 백억을 받겠다고 하는 말은 억지였다.
영화사라고 해봐야 김우현 감독이 제작자 겸 감독, 편집자로 1인 3역을 하는 말이 좋지 보잘 것 없는 1인 영화사다.
제작비가 넉넉할 리 없고 배우 출연료를 줄 입장도 아니다.
그걸 잘 아는 재완씨가 생각지도 않은 출연료를 부르니 하도 어이없었을 게다.
농담으로 그런 줄 알았다 고집스런 요구가 진짜임을 알아차렸을 때의 당혹감이라니!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몹쓸 뻔했다.

말투가 어눌하고 표정이 남 답지 않고 몸가짐이 껄렁껄렁하다고 사람 속마저 그러리라고 예단해선 안 되는 일이다.
오히려 꼴값(얼굴값) 안 하니 제대로 안다. 깊다. 정확하다. 
                                    
 
김우현 감독은 〈부흥의 여정〉과 〈하늘의 언어〉, 〈하나님의 이끄심〉 등 성령체험과 성령의 역사를 담은 저작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유명세를 타게 된 데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영상물에서 비롯됐다.
그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최춘선 옹이다.

김우현 감독은 그를 장장 7년을 좇아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고루 담았다.
그런 노력이 영상에 담겨 마침내 최춘선 옹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났다.
그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은 신앙인이자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려 바삐 걸었던 복음 전도인이었다.

이력도 화려했다.
일본 유학을 하고 5개 국어를 너끈히 소화했으며 독립 운동가였다.
더욱이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자신에게 속한 부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고 스스로 신발조차 신지 않을 만큼 가난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일반인들은 그를 맨발로 지하철 구석구석을 쏘다니는 광인(狂人)으로 이해했었다.
그만큼 김우현 감독의 안목은 여느 사람과 달랐다는 얘기다.
그러했기에 최춘선 옹을 7년을 따랐고 오늘 정재완 씨를 20년 동안 만나고 있을 터였다.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은 사람을 ‘본래’ 사랑하지 않고는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그랬듯 비천한 곳에서 비천한 몰골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발 다가서는 일이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상한 행동은 둘째 치고 색다른 냄새부터 처리하기가 난감하다. 
                                                                
 

20년 쯤 됐다.
학생회에서 몸이 불편한 아동을 보육하는 소망원 봉사를 나간 적이 있었다.
봉사한다는 마음에 발걸음이 상쾌했던 날.
걱정이라곤 잘 해낼 수 있을까가 전부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고작 네다섯 시간 정도로 예정된 봉사였으니 그까짓 힘든 것쯤 참아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곳 상황은 전혀 몰랐으므로 그 외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몹시 괴로웠다.
뒤틀린 그들의 몸 때문이었거나 그런 그들의 상태가 나의 마음을 아리게 했기 때문 이 아니었다.
참기 힘든 냄새, 방 안 곳곳에서 풍겨 나오는 형용할 수 없이 고약한 냄새를 참아낼 도리가 없었다.
배정받은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밥을 먹이는 걸 가까스로 꼬박 의무감으로 버텼다.
비례해서 흘끗흘끗 시간 쳐다보는 일이 늘어갔다.

나오긴 했다.
그것도 중요한 약속을 깜빡했다는 거짓 핑계를 대고.
한동안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같은 부류와 섞이길 좋아하는 심성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과 ‘거리두기’와 ‘편가르기’는 일상적이 되기 쉽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이 책,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정재완 씨를 직접 발로 찾은 기록이다.
여느 기록과 다른 점은 한 사람을 더도 덜도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사정을 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해낸 데 있다.
그것이 예기치 않은 진한 감동과 자주 마주치는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몸으로 가르친 것만 남는다’고 일갈한 분이 있다.
말이 어눌하고 몸마저 부실하다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실마저 가릴 순 없다.
누구나 걸어가는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한 분 그리스도를 만나 보다 아름다워지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래서 향긋하며 자주 도전적이다.
정재완 씨가 보여준 사랑의 시어와 행동이 더욱 그리스도로 풍부해지는 걸 보는 데서 우리 마음을 다잡지 않을 수 없다.
‘무엇하고 사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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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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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자신의 폐부를 옅게 찌르는 성찰과

정한 기간과 목적지 없는 주유(周遊),

상처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여민 애정의 가늠할 수 없는 깊이

 

여행지의 정경과 소회를 담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전 그 힘을, 여행지의 정경이 바쁜 일상에서 놓여난 듯 한 대리만족을 준다면

소회는 가슴에 쌓아둔 응어리를 꺼내놓은 '더도 덜도 말고 내 얘기'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직접 가진 못해도 저자와 함께 산을 오르고 들을 거니는 것 같이

생동감 넘친 글을 만나는 일에서야 그 글에 대한 내남의 평가에 높낮이가 있을 리 없고,

더욱이 그 글이 가슴에 직접 와 닿는 글임에야 켜켜이 두른 마음의 장벽이 무장해제 되는 일을 마다할 이유 또한 전혀 없을 겁니다.

그 탓에 아예 책을 들고 여행지를 향해 짐을 싸기도 하고 일상을 뒤로하고 호젓한 산길을 거듭 거니는 것이겠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몸과 마음에 공히 작동할 때 느끼는 감동으론 사진과 활자가 공교하게 얽힌 글편을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 글이 지닌 감성에 날개를 달아준 〈끌림〉은 책의 제목이 아니어도 끌릴 만합니다.

 

저자 이병률은 등단 시인입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당선되었고,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표지 안쪽에 실린 다소 병적으로 보이는 그의 사진은 말하지 않아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품 여러 곳에 그가 나눈 낯선 사랑과 죽음 근처에 이른 가난한 초상이 새겨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자신의 폐부를 옅게 찌르는 성찰과 정한 기간과 목적지 없는 주유(周遊),

상처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여민 애정을 담고 있습니다.

 

덥석 베어 문 탓에 옥수수 행상을 하는 청년도 그도 잔돈이 없어 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역으로 가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다 잡지 못한 시인은

거스름돈을 챙겨 자리로 돌아와 청년에게 그 돈을 건넵니다.

며칠 후 시인은 우연히 마주친 그 청년이 가는 길에 먹으라고 옥수수 두 개를 담은 봉지를 건네자 사라는 줄 알고 지갑을 꺼내듭니다.

무안해진 시인은 자신을 나무라며

행상을 만나면 ‘언제든 두 개를 사서 그 중 하나를 건네야 한다’고, ‘그러는 게 맞다’는 말로 갈무리합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채근하는 성찰을 만난 대목입니다.

 

서너 달 전에 받은 편지를 따라 이집트로 날아간 시인이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 편지 주인공이 오라던 곳에서 그와 조우할 수 없음을 알고도 아쉬워하는 장면이나

그와 동행하지 않고는 피라미드를 감각적으로 감상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도 비싼 택시값을 치른 채 역시나 감흥 없는 피라미드를 본 것이나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 즉시 이역만리 페루로 방향을 틀은 것에서

'생의 마지막을 사르기 위해 여행지를 떠도는 남루한 시인'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리의 밤에 찾아든 숙소에서 ‘다음 사람에게’라고 수신처를 정성스럽게 적은 선물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섣불리 뜯지 못합니다.

다음 날 숙소 주인을 만나고서야 선물의 유례를 전해들은 시인은

그 방에 묵을 다음 사람을 위해 배고프지 말라고 파스타 묶음을 선물로 준비합니다.

이 부분에선 시인의 눈에 고인 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미인이지만 매력은 그닥 없는 한 여성과 메마르게 살을 섞고 또한 건조하게 헤어지는 장면에선

그가 다다른 애정의 깊이와 저변을 쉽게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 작품이 널리 읽히는 이유가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딱히 ‘이것이다’라고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

다다를 만하면 저만치 물러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가없는 심연,

침울하지 않은 슬픔 같은 것.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여백이 많다는 의미와도 통하지 싶습니다.

그렇다고 휑하게 찬바람 불거나 후텁지근하지 않은 여백은 아닙니다. 한두 번쯤 발 편히 뻗고 쉬었다 가도 좋을 여백이라고 말해두고 싶습니다.

 

 

사족

 

여행기의 맛을 몇 번 본 후론 나름대로 정한 ‘읽어야 할 목록의 책’을 밀치는 일이 보다 수월해 졌습니다.

사정이 그렇다고는 해도 읽어야 할 책이 쌓여있다는 부담감을 버리는 게 여전히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큰 맘 먹어야 그런 일을 감행할 수 있나 봅니다.

 

이번 경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제학 서적을 읽는 속도와 그것에 비례해서 양마저 현저히 떨어진 요 며칠 동안

책을 손에 쥐고만 있거나 눈 가까이 두는 일로 위안 아닌 위안을 삼는 일이 잦았습니다.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마치 남 주기엔 아깝고 내 곁에 두기엔 그저 그런 애인처럼 읽긴 읽어야 하는데 싹 잘 읽히진 않는 배반의 흐름이 벽처럼 막아선 꼭 그런.

 

이 책으로 그 벽에서 돌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노을빛 기슭에서’ 잘 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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