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그릇으로 살아나다!
박영봉 지음, 신한균 감수 / 진명출판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장인(匠人)에 대한 존경심이 살아있는 곳에선 공존이 자연스럽습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가치가 교과서 밖에서도 경중 없이 통용됩니다. 우린 그런 사회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라고 부릅니다. 안타깝지만 우린 아직 그런 사회에 도달해 있지 못합니다. 펜대를 굴리는 직업에 대한 선호도가 너무 높은 것이 현실입니다. 여전히 기사를 '공돌이'라는 비칭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문학에는 사람이 몰리지 않습니다. 같은 펜대를 굴려도 돈이 되는 펜대를 선호하는 우리 사회의 그늘은 경상계열 지원자 수가 가파르게 오르는 현상으로도 증명되고 남습니다. 요즘 같아선 경상계열을 나온다고 취직이 보장되지 않아 그마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보니 사회가 전반적으로 우왕좌왕하기를 멈추지 못합니다.

 

직업이든 장사든 어느 것이 잘 된다 싶으면 쏠림 현상이 크게 일어나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를 우린 위험 사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위험 사회의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대형참사와 사건사고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재(人災)가 그 징후입니다. 장인정신이 사라진 곳엔 질 높은 설비와 애정 어린 보수(補修)가 없습니다. '겉보기 좋게 시공하고 돈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얄팍한 생각이 불러오는 것은 받은 보수의 열 배, 스무 배가 넘는 사회적 비용의 부담이라는 복병입니다.

 

우린 어느 때보다 장인 정신이 아쉬운 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가업으로 이은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그 일에 뛰어드는 청년이 존중받는 사회, 그것이 아니라도 청소년기에 품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선호도가 낮은 학과를 기꺼이 지원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는 사회, 물질적 보상과 정신적 보상에 다른 가격을 붙이지 않는 사회의 기반은 장신정신의 함양과 고착화에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우리 사회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선언해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정부 차원에서 장인에 대한 우대 시책을 꾸준히 개발하고 장인이 존중되는 사회적 분위기 확산을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하며 사회적으로는 장인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자생할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줘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단시일 내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오랜 시일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하기만 하면 차츰 나아질 테고, 그러다 보면 언제인지 모르게 정착될 것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처럼 절실한 때가 있을까 싶습니다.

 

이 책, 〈요리, 그릇으로 살아나다!〉는 내외의 격변으로 새로운 가치의 창출과 전사회적 리빌딩이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는 우리에게 장인의 존재감이 지니는 무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겐 장인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장인을 우러러보는 한편으로 홀대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장인이란 무엇인가 고리타분하고 아집에 두루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고식적인 답을 쉽게 떠올립니다. 그렇다보니 어느 누구도 장인이 되려고 하지 않으며 설혹 장인의 반열에 오른다해도 사회적으로도 지위가 부실할 뿐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안정감이 낮아 가난을 대물림하는 대표적인 계륵이라고 치부되기 일쑤입니다. 자연 장인 스스로도 자부심을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까운 일본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가업을 대물림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 적절한 보수가 있으며 자부심 또한 대단합니다. 무엇이 그들을 우리와 다르게 만들었을까? 전 이 책을 읽기 전에 그 동안 들어왔던 답을 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그 답을 찾기로 작정했습니다. 책은 수많은 장인 중에서 그릇을 만드는 장인에 한정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지만 어느 분야든 한 분야에 일생을 바친 장인이라면 그의 말은 새겨들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생각에 설프게 기대감을 낮춰 잡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다짐은 적절했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요리를 해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죽었다면 소용없다. 나는 살아있는 그릇, 죽은 그릇이라고 말한다. 그릇을 선택하는 것이 번거롭고 엄격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릇을 사랑하고 다루는 일을 즐겨야 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요리와 그릇은 하나로 맺어지게 된다. 즐거운 그릇이 된다면 요리도 즐거운 것이 된다. 이것은 마치 차의 양 바퀴와 같은 것이다."(기타오지 로산진, 北大路魯山人, 1883-1959)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꼬장꼬장한 장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혼신을 다해 일에 집중하고 기어코 한 방울의 땀까지 아낌없이 털어 넣는 장인의 숨결을 그 몇 마디 말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그렇듯 독자를 장인과 독대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장인 앞에 동일한 자세로 앉은 독자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책은 선선히 그리고 거침없이 장인의 무릎 앞으로 독자를 몰고 갑니다. 장인의 말은 작지만 깊이가 있습니다. 한마디 말로도 심장을 멎게 할 정도의 힘이 있습니다.

 

저자 박영봉은 계간 〈주변인과 시〉의 편집위원이자 양산 보광고등학교 교사로 신정희요에서 도자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통 도자기에 심취한 그는 수차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그 곳에서 음식과 그릇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데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일본에 도자문화를 전해준 우리는 왜 음식과 그릇의 조화로움을 이뤄낼 수 없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그는 일본의 요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기타오지 로산진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은 일본의 대표적인 미식가이자 도예가인 로산진의 삶과 철학을 투박하지만 정감 어린 도자기에 정성스럽게 담았습니다. 로산진은 오늘 현실이라는 벽과 거스르기 힘든 관행에 좌절하곤 하는 우리를 향해 주류와 다른 길을 걸을지라도 중단 없이 한 분야에 집중하고 정진할 때 빛나는 보석을 얻을 수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음식 맛은 곰삭을 때 더욱 깊어지는 법입니다. 한 인간의 삶 또한 그럴 것입니다.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으로 버려지다시피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내지고 우여곡절 끝에 간판 글씨를 쓰며 체득한 서체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에 좌절감을 크게 느꼈을 로산진이 그가 거쳐간 분야에 우뚝 선 데는 반드시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로산진은 서체 뿐 아니라 전각과 도자 분야에서 최고를 구가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생애 마지막까지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믿는 것은 예단일 뿐입니다. 로산진이 만년에 남긴 말입니다. "내 삶의 방식은 나밖에 모른다. 그것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동정도 받고 싶지 않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의 삶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1백년 후의 사람들이다."(p36) 2003년 9월 교토역 건물에서 열린 로산진 전시회에 3만 5천명이 넘는 인파가 몰림으로써 100년이 아니라 50년도 되기 전에 일본 열도가 로산진 신드롬에 빠져들었습니다.

 

장인으로 산다는 것은 보기보다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요리를 담는 단순한 그릇에서 요리에 품격을 더하는 그릇의 가치에 일찍이 눈뜬 일본 최고의 도예가 로산진 조차 생애주기 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당시로선 정규과정을 밟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넘을 수 없는 성채와 같이 견고하게 보일 법한 풍토조차 그에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서체와 전각에 이은 도자기 분야에서 그는 차츰 자신의 안목을 예술이라는 경지에 올려놓습니다. 일본 음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장식은 그가 음식에 관한 한 보조적인 수단 정도로 인식하던 그릇을 눈으로 보는 음식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해줄 뿐 아니라 동물적으로 소비하는 음식에서 벗어나 그것을 인격적으로 섭취하도록 이끄는 대등한 장치로 한단계 끌어올린 데 빚지고 있습니다.

 

이제 음식과 그릇은 재료의 성질만 다를 뿐 한가지로 취급받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선 비록 조그만 음식점이라도 음식을 도자기에 담아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천편일률적인 도자기에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어울리는 질감과 색감의 도자기를 사용한다는 데 이르면 그들의 장인 정신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조화를 이룬 그릇, 그릇이 담아낸 격조 높은 음식의 앙상블을 일본의 음식문화가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2008년 11월) 세계 각국의 음식점을 평가하는 대표적인 잡지 '미슐랭 가이드(Guide Michelin)'가 도쿄를 '가장 빛나는 미식의 도시'라고 발표해서 화제가 된바 있습니다. 일본은 일본의 요리문화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로산진에게 그 공을 돌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전통 도자기에 깊이 맛들인 저자의 로산진에 대한 헌정사입니다. 한 시대를 살다간 장인의 땀과 손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무언의 값진 교훈을 들려준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그 덕분에 이 책엔 활자 외에도 행간에 담긴 의미를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 음식 문화의 현주소를 곱씹어 볼만할 때입니다. 굳이 위에 든 잡지 순위에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음식을 문화로 전환해 세계와 소통하려는 의식이 부족한 우리의 낮은 감성과 소통 부재의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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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장 2009-02-16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좋은 서평입니다

박한올 2009-02-1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글이었습니다. 당첨되신 것은 당연합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