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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톨스토이 단편집 Echo Book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병준 옮김 / 샘솟는기쁨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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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톨스토이가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삽니까?” 

 

고전문학이 다시 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고전문학은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 둔중하게 심장을 두드리는 작가정신이 심해처럼 가늠하기 힘든 깊이로 드리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읽어도 그때마다 감정이 살아나고 이야기가 새롭게 들려오는 거겠지요.

 

 

수년 동안 만나온 애인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런데 그(그녀)는 늘 새롭죠. 그(그녀)가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고전문학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이유도 그런 것 아닐까요?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오니 새롭게 보이는 것. SF 영화의 영향으로 스펙터클한 화면구성과 박진감 넘친 사건전개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고전문학을 읽어내려면 처음엔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애인에게 맞춰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과정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말문을 튼 애인과 놀랄 정도로 가까워지듯이 고전문학도 맛과 향취에 취하면 걷잡을 수 없지요.

 

 

평소 고전문학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고전문학이 주는 무게감과 톨스토이라는 작가의 아우라에 순간 멈칫했을 수 있습니다. 고전문학에 연전연패한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더더욱 명성이 주는 중압감에 주눅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런 부분을 섬세하게 짚어낸 작은 판형이 적절히 안도감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간단히 백에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꺼내 읽을 수 있을 정도니까 들고 다니는 부담이 확실히 적어졌습니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아스라한 풍경의 도판과 내용 정리와 사고를 이끌어내며 각각의 단편을 깔끔하게 갈무리한 QT가 한결 수월하게 이 책을 읽어내게 해주고 있습니다. 

 

 

단편 형식을 택한 것도 출판기획 면에서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수년 동안 이름 있는 출판사를 중심으로 고전문학이 장편의 전집형태로 묶여 나온 점을 감안할 때 장편 고전문학 시장이 겨냥한 독자들은 그 기간 동안 대부분 시장에 흡수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와중에 단편 시장이 소홀히 취급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 기획단계에서 이름난 단편을 발굴해내기가 쉽지 않은 게 직접적인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는 사이 단편 시장이 무주공산 처지로 전락했던 거지요. 그 틈새를 이 책이 파고들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출판계가 오랜 동안 장/단편 고전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진 형편에서 이 책이 고전 기독출판물의 출간 붐을 조성하는 마중물이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과거 1990년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나온 이후 그와 같이 묵직한 고전이 번역 출판되지 않은 현실에 못내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 책의 출간으로 기대감이 한껏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톨스토이라는 굵직한 작가의 단편집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로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리나》(1877) 등 불멸의 사실주의 작품을 남긴 톨스토이는 50대 초반에 회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에 실린 8편의 단편은 톨스토이가 50대에 쓴 소설로 평소 이야기를 민중의 언어로 사실감 넘치게 풀어간 성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린 그 예를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와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는 신앙에 대해 대담한 관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도 실제 대가를 치러야하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종교인들의 행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에서도 잘 차려입고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꾸며 말하는 호사가들을 경멸하는 풍조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저택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로 시작되는 단편은 그런 점에서 대단한 풍자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택에 모인 사람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지만 삶과 유리된 채 겉도는 그들의 말에서 당시 만연했을 무책임의 행태적 모순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파고들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신앙적 양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문학이 인생에서 전형을 획득하고 있다면 그건 시대를 막론하고 독자들을 자기성찰로 이끈다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젊은이는 경험해야 할 세계가 아직 많으니 섣불리 결단하지 말라거나 노인은 이미 충분히 즐겼으니 늘그막에 결단해서 식구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지금도 결단을 막는 유효적절한 장치로 사용하는 너와 나의 현실을 돌아보며 회개와 의식전환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톨스토이가 말하려던 바를 정확이 이해한 게 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함의가 문학적 형태로 돋을새김되어 어느 때보다 독자들을 깊은 성찰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이 단편의 가치가 시대를 건너 빛나고 있습니다.

 

 

책 제목과 같은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는 구도자적 관점에서 《천로역정》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회심한 톨스토이가 줄리어스의 입장에서 구도자인 유베날리우스를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자서전적 단편으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이 소설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영혼이 파괴된 인간 톨스토이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했던 행복과 평안이 어디서 기원하는지를 파노라마 같았을 자신의 인생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한 눈에 보이도록 그려주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단편에 불과하지만 마치 누군가의 인생 전반을 읽어낸 듯 그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이어 묵직한 소회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그건 이 소설이 기독교인이건 그렇지 않건 인생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며 추구할 바가 과연 돈과 권력, 향락이 전부인지를 성찰적으로 돌아보게 함으로써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가 닿을 곳에 대한 꿈을 꾸게 하며, 그렇게 피어난 결단의 열매가 얼마나 달콤한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 같은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구원받았다. … 죄인과 같은 나는 악하게 살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나처럼 사는 것을 보았다. … 마치 죄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나는 어떤 힘에 의해 그런 고통과 악의 삶에 못 박혔다. ... 이 모든 비극에서 나는 정확히 죄인과 같았다. … 그런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부터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생과 사가 악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절망 대신에 죽음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였다.”

 

 

이 글은 톨스토이가 1884년에 발표한 신앙고백의 일부입니다. 그의 회심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의 거듭남, 거기서 비롯된 행복과 기쁨, 이에 더해 악하게 살았던 과거의 내 전철을 밟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는 이후 내내 작품 속에 녹여냈습니다. 8편의 단편은 그런 톨스토이의 환희와 격정을 문학이라는 도구를 빗대어 첨가물을 전혀 가미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문호가 인생 후반부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물었다면 우리도 언젠가 한 번만이라도 그런 질문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 뭐 있어!” 하고 쉽게 처리할 만큼 우리 인생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겠습니까. 모처럼 만난 고전 단편에서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잠시 잊은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일에 휩쓸려 목적 없이 살아가는 직장인들에게 우선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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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으로부터 자유 - 아주 사소하고 사적인, 김수경 카툰우화집
김수경 지음 / 강같은평화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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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처럼 일거에 세상을 깨우는 빛 : 〈비판으로부터 자유〉

 

 

세상을 살면서 이해받지 못하는 것만큼 가슴앓이를 많이 해야 하는 것도 없을 듯싶다. 타인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남을 앞서려거나, 심한 경우 남을 짓밟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타인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면 설명은 변명으로, 항변은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인 것이 요즘 세상이다. 그런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책, 〈비판으로부터 자유〉를 쓰고 그린 김수경은 자신 또한 그러한 상황에 직면했음을 밝히면서 "하나님이 이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다급히 알고 싶어졌다"고 그때의 심경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당시 저자가 맞닥뜨린 고통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을까? 소제목을 통해 잠시 들여다보자. "내 인생에도 일어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다." "꼬리표를 달고 살고 있었다." 소제목을 보면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앞뒤사면이 꼼짝없이 막힌 상황이다. 이 경우 그저 막막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실할 것이다. “그래, 어떡하면 좋으니?”하는 걱정 외에 덧붙일 말이 더 있을까 싶다. 그만큼 당사자가 직면한 고통을 덜어줄 묘안이 없다는 얘기다. 나는 아닌데 남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어떻게 돌려 세운단 말인가?

 

 

진심은 통한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험담을 늘어놓는 상대방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니라고 한들 받아들여질 가능성마저 희박한 상황이라는 것쯤 누구나 유사한 상황을 적거나 많이 겪었을 터라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름 처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홍글씨를 박은 사람들을 향해 공격적 성향을 드러낸다든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무시하고 만다든지, 자책과 불면의 밤을 보낸다든지 하는 정도가 대부분인 것도 이 상황의 특징이다. 그와 같은 처방은 틀어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유효한 처방이라고 할 수 없다.

 

 

공격적 성향을 드러내면 상대방의 비판에 더욱 힘을 싣게 할 것이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던 귓전으로 흘리면 상대방은 당신이 떠도는 말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건 자신을 더욱 괴롭게 할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야 직장을 떠나든지 요즘 세간을 들끓게 한 중학생자살사건처럼 생을 마감하는 선택이 있기야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찬찬히 경우의 수를 살펴보면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답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저자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역시 소제목이 키워드다. “따스한 세상으로 초대받았다.” “그들에게 가 보라고 하셨다.” “내 속마음을 궁금해 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저자 또한 자책과 불면의 밤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군거리는 그들과 그들이 손가락질 할 만한 태도나 말을 하지 않은 나 사이에서 날이 갈수록 부풀려지는 갈등의 원인을 풀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지푸라기처럼 잡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악화될 뿐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저자가 기억해 낸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분이 누구를 해치거나, 험담을 늘어놓거나 빈정 상할 말을 퍼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분과 전혀 섞이지 않은, 경우에 따라 일면식도 없었을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그분을 조롱했다. 심지어 죄를 찾을 수 없었음에도 그분을 천형과 같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마침내 그가 못 박히자 그들은 “무슨 왕이 제 목숨하나 구하지 못하느냐”고 침을 뱉었다. 그 자리에 없었지만 필시 저자 또한 군중심리에 이끌려 그와 같은 사람들의 부류에 속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상황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역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속마음을 아셨음에도 그들을 선하게 대했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심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팔아넘길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게 된 순간 저자는 상황을 다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책과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자신이 그들을 향해 저자와 원망의 화살을 수없이 날려 보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받은 충격을 저자가 카툰으로 옮겨 놓았다. 그들의 성을 두 동강 내고 그들 각자의 삼장에 구멍을 뚫은 것도 모자라 그들 모두를 한손으로 싸잡아 으깰 정도의 사악함을 지닌 둘도 없이 악했던 자신의 모습을 매섭게 그렸다. 더불어 그들이 자신에게 나쁜 꼬리표를 붙여 주었듯이 자신 또한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여줌으로써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음을 또한 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무수한 꼬리표들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후 그것들을 전부 없앴음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선언하셨음에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이 그들에게 꼬리표를 달아주는 데 열심이었을 자신의 모습을 본 데서 결정적인 해결의 실마리는 찾아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앞에 또렷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제야 저자는 자신을 손가락질 한 이들을 찾을 용기를 얻었다.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박힌 십자가에 자신을 올려놓을 때 시작된다. 그 후에야 부활이 있다. 누구나 부활 이후의 영광을 취하려 하지만 그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과정을 거쳐야 온다. 과정 없이 결과만 취하려는 것은 반쪽자리 신앙이자 불안한 기대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이은 부활의 과정을 밟았음에야 우리라고 다를 리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남들의 꼬리표를 전부 지고 십자가에 올랐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꼬리표, 곧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희망이 전혀 없는 우리들을 체휼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심각하게 부르짖으셨던 것이리라.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십니까! 그 고통은 바로 아버지와 분리될 만큼 심각한 고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후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부합했다.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프리드리히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 볼 때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게 된다.”고 갈파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서 더 나간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경우는 조금씩 달라도 비판하는 순간 비판 대상자를 닮아가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어느 누구도 비판받을 만한 구석이 없잖다. 문제는 당신이 누구를 비판하는 순간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그 문을 통해 당신에게 들어온다. 그리곤 당신이 비판에 노출되도록 상황을 조성한다. 당연히 당신은 당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당신을 비판하는 이들이 당신을 잘못 알고 있다고 항변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당신을 흠잡을 것이다. 당신의 다음 선택은 그들을 멀리하는 것이다. 불면의 밤이 찾아온다. 당신의 고립은 심화된다. 이제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당신만 보일 뿐이다. 어둠 속에 갇힌 당신의 모습만. 그 상황은 사탄이 바라는 바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고립이야말로 사탄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전략이다.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속이는 것은 사탄의 주특기다.

 

 

저자가 책의 많은 분량을 비판을 하거나 비판을 받는 것의 결과로 찾아온 암흑과도 같은 상황을 묘사하는 데 할애한 이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도록 함에 있다. 거울에 자신을 비추지 않으면 얼굴 어디에 더러운 것이 묻었는지 알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과거 또는 현재에 직면했거나 직면한 고립을 찬찬히 돌아보도록 안내하려는 의도 또한 있을 것이다. 세세하게 묘사된 1장부터 3장까지를 읽는 동안 괴로웠던 지난날이 떠오를지 모른다. 경우에 따라 당신의 현재가 비춰져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책장을 덮지 마시기를.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빨리 오는 법이라지 않은가! 새벽빛처럼 일거에 세상을 깨우는 빛이 당신을 찾아온다. 당신의 찢어진 마음에 곧 당도할 테니 물러서지 마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사랑하신다. 당신이 더 이상 고립감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고대하며 해답을 들고 당신을 찾아오신다. 이 책이 그 광경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었다. 누구든 이 책은 꼭 일을 일이다. 읽기에 부담 없는 카툰 우화집이라는 점도 이 책의 미덕에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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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
김형준 지음 / 강같은평화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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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師表)가 필요한 시대, 9명의 선한 목사를 만나다. :〈범사에 감사하라〉

 

성경은 이 시대를 말씀이 없어 기갈인 시대라고 부릅니다. 매 주일마다 수많은 말이 강대상을 통해 쏟아져 나오지만 그 말들이 영향을 끼치는 말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능력을 지니려면 말을 전하는 사람이 그 말에서 받은 실제적인 영향력을 체화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덕담과 훌륭한 미담이라도 그것들을 실제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지 않으면 속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뿐더러 본래의 맛을 충분히 살릴 수 없습니다. 이 경우 “글은 삶의 총량에 비례한다”는 말이 적절한 대구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빼어난 글도 삶이 밑바탕에 흐르지 않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대면관계에서 긴밀하게 이뤄지는 말에 있어서야 말의 밑바탕을 재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능력은 말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 어떤 위험성을 지녔는지 경고하는 성경의 경구입니다. 독백이 아닌 한 말은 대부분 상대방에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말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치의 혀가 지닌 말의 힘이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성경을 다루는 목사의 말은 사회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어서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부분을 망각하는 일이 잦아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최근 대형교회에서 원로목사의 은퇴를 둘러싸고 장로와 목사의 가족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급기야 당해 목사가 사실상 은퇴를 접는 양상으로 번진 일이나 기독교정당을 만들려는 부산한 움직임 속에서 함량미달의 발언이 나오는 등의 불협화음은 말과 삶의 불일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만 소망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대거 정부 소속 부처와 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고소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일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로 남아 있습니다.

 

 

세 명의 장로가 대통령이 되고 그를 따라 수많은 기독인들이 입각했음에도 사회에 사랑과 양선 등의 기독교적 가치를 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열매를 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열매가 없거나 성하지 않으면 본디 씨앗과 그 씨앗에서 비롯된 나무를 제대로 된 나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첫 모양새가 번듯하고 무언가 대단한 어떤 것을 낼 것처럼 보여도 실제 기대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농부는 과감하게 그 나무를 베어버립니다. 혹여 그 나무를 그대로 둘 경우 다른 나무들에게 갈 양분마저 빼앗아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그 나무를 뽑은 자리에 튼실한 나무를 심을 경우 다음 해에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목사는 엘리트와 지도자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기독교가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지켜보고 있기도 합니다. 목사 관계 사건사고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달리 보면 그만큼 사회에 목사에 대한 기대가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 삶과 말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은 필연코 행동으로 검증되는 때가 오는 법입니다. 그 시기가 며칠 후에 올 수도 있고 앞서 목사의 경우처럼 생의 마감을 십 수 년 앞둔 시점에서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그 시점에서 그가 한 행동이 그의 과거를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을 자임하려면 교회를 진두지휘하며 오롯이 언론에 노출된 목사부터 달라져야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장로도 있고 교인도 있는데 왜 나부터냐”고 항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의 직임 자체가 그토록 엄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뉴스타임 정치경제부 부장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김형준이 쓴 〈범사에 감사하라〉는 선한 목사의 길을 가는 참 목회자의 상을 단편으로 묶어 바른 지도자가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 시대에 작지만 힘 있는 울림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책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로 국립대학 총장 1호가 된 문선재 목사와 1년 1억을 나누는 작지만 큰 교회 옥수중앙교회를 섬기는 호용한 목사를 비롯해 총 9명의 목사가 등장합니다.

 

 

이들이 전하는 공통된 변은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사랑”입니다. 이것들은 전대미문의 경제위기와 사회 안전망 부재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면서도 유감스럽지만 그 실체가 사람들의 폐부 깊숙이 파고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향력을 갖춘 크리스천들이 부재하거나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비록 채 열 명이 되지 않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의인 열 명이 없어 망한 소돔과 고모라성의 예를 반면교사를 삼을 때 충분히 의미 있는 숫자가 될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을 하나 더 소개하면 하나같이 감사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삶은 여느 사람들처럼 곤궁하고 때론 원치 않는 역경에 처해 부르르 몸을 떠는 등의 복잡다단한 삶이었지만 그들은 끝끝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누군 세상의 기준으로 봐도 훌륭한 업적을 이룬 반면 누군 아직 갈 길이 더 남아있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순교로 자신을 드리기까지 헌신하였습니다. 신앙 외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으면 삶에 굴곡이 없고, 어려움은 나타났다가도 곡 사라지는 등의 환상을 갖기 쉽습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적인 면과 신앙적인 면, 물질적인 면 모두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게 문을 열어준다든지, 죄와는 별개로 내가 희망하지 않았지만 기꺼이 희생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인 신앙이 믿음의 이름으로 행해진 곳에서는 감사가 일어납니다. 비록 그 과정이 못내 힘들고 견디기 어려워도 믿음으로 가는 이유 또한 그 과정에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책에 언급된 9명의 목사들은 한결같이 동행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감사로 송축하고 있습니다. 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시대에 주목받는 목사가 아니어도 하나님께는 첫손가락에 뽑힐 목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 땅 곳곳엔 그런 목사들이 적지 않다는 희망 또한 발견합니다. 그래서 제게도 감사가 속 깊이 퍼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9명의 목사가 보인 삶과 증거에서 독자 모두 같은 크기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으로 말하지 않는 한 어떤 말도 사람을 웃거나 울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회적 영향력 또한 삶에서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들 9명의 목사가 우리 삶에 타산지석과 사표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의인 9명이 거둘 또 다른 열매에 주목하는 이유 또한 남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작지만 힘 있는 걸음을 계속하고 있는 이들을 조명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 이 시대를 충격하는 이와 같은 글들이 확대 재생산되기를 거듭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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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스스로 말해요 1
오선화 글, 연주 그림 / 주니어아가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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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는 것과 주는 것 모두 필요해요.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내가 안녕하세요 말하니까〉, 〈내가 고맙다고 말하니까〉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기대하는 건 단 하나. 그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그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참 많이도 바뀌어 이젠 그것들에 앞서 아이들이 어서 자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큰 듯보이기도 하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부모의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압력에 아이들이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임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그런 부조리한 세상을 만든 제도를 뜯어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느라 그 고통은 모두 아이들 몫으로 남는다. 받은 사랑을 나눠주며 살아야 할 아이들이 정작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세상에 필요한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 '무한한 사랑' 뿐이다. 사랑을 가득 품은 아이가 남 또한 사랑할 수 있겠기에 어릴적부터 사랑은 아이들에 넘치도록 부어져야 함은 당연하고 옳다.

 

 

이 책,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와 〈내가 안녕하세요 말하니까〉, 〈내가 고맙다고 말하니까〉는 아이들이 받은 사랑이 어떻게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지 세심하게 아름답게 들려주고 있다. 받는 사랑이 좋은 줄은 누구나 알지만 '받기만 하는 사랑'이 '주는 사랑'에서 얻는 만족과 행복의 크기에 비할 바 아님을 잘 모르는 세상에 귀한 경구가 되고 있기도 하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 힘을 쏟는 한편 받은 사랑을 아이들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또한 가르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세상이 더불어 사는 곳임을 일깨워야 한다.

 

 

성경은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다. 하지만 이 구절의 방점이 "네 몸과 같이"에 있다는 건 잘 모르는 것 같다. "네 몸과 같이"는 이웃 사랑의 시초와 기준을 제시한다. 곧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비로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난 여태 자기사랑이 적은 사람이 이웃을 넓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자기 존재의 근원에 밝은 사람이 그 근원에 따라 남을 오롯이 사랑할 수 있는 법이지 않은가. 여기서 그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셨다. 그래서 우린 어느 때든지 그 힘으로 나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죄로 그 힘을 잃었다해서 그 근원적인 창조성이 꺾이지 않는 것 또한 근원이 내게서 비롯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써 사랑할 일이다.

 

 

이 책의 아이처럼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고, 앞서 "고맙습니다" 하고 감사를 표할 일이다. 사랑한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서둘러 전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작은 표현이 세상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한결같이 사랑을 받고 싶어하듯이 이 세상이야말로 참으로 갈급하게 사랑을 얻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디서도 사랑을 주지 않으니 흉악한 사건사고와 비정한 배반의 시대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아이의 입을 빌려 하고 싶은 이야기 또한 그런 것이리라 믿는다. 혼돈의 세상에 빛을 비추어 서로 사랑하며 사는 낙원. 그런 이상을 한낱 꿈으로 격하시키지 말라. 진리와 사랑이 강같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는 진리와 사랑으로 띠를 두른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곳에 임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가 오늘 이곳에 임하기도 하고 이미 임해 있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곳이라는 인식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내가 "사랑해!"한다고 말하니까, 친구가 환하게 웃어요. 내가 "사랑해요!" 말하니까,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쫙 펴져요. 내가 "사랑해!" 말하니까,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흔들. 토끼는 좋아서 헤벌쭉 웃고 거북이는 신이 나서 달리기를 해요. 내가 "사랑해!" 말하니까,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풀잎이 살랑살랑 춤을 춰요. 내가 "사랑해!" 말하니까, 나비가 나풀나풀 날갯짓하고 물고기는 뻐끔뻐끔 노래해요. ....... 내가 "사랑해요!" 말하니까, 하나님은 "나도 널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말씀해 주셨어요.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온 세상이 다 웃어요.」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중에서

 

 

사랑의 표현 하나로 곁에 있던 친구와 할머니 표정이 바뀌고 멀리 있던 동식물과 조류가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은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누렸을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말과 같은 축복은 주변 곳곳으로 퍼지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언제든 우리가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는 일만큼 기대감 넘치는 일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자기가 받은 사랑을 나눌 줄 알 때 어린아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통로로 사용되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쌓여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데 참여하는 또 다른 복을 얻게 되니 더더욱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복은 오묘해서 나눌수록 커지는 진리를 오롯이 돋을새김하고 있는 이 책이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불어 이 책이 아이들과 함께 읽는 어른들의 심성을 하나님께로 고정하는 데 놀랍게 쓰이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책이 오늘날 세상에 퍼진 '받는 사랑'에 일침을 가하며 오히려 '주는 사랑'이 나와 이웃,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과 나라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지에 관한 꿈을 꾸도록 이끄는 방향타 구실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사랑의 의미를 크고 넓게 깨닫고 실천하기를 바라는 이 땅의 부모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저자의 입말과 정겨운 일러스트레이트가 읽지 않고 보지 않아도 사랑의 의미를 저절로 깨닫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다. 작은 판형으로 구성되어 유아들이 갖고 놀기에도(?) 좋다. 무엇보다 따뜻한 글과 색감에서 우러나오는 친밀감이 이 책의 장점인데, 읽어가다 보면 무한히 빠져들게 되니 주의할 것. 자칫 찌개 끓는 줄도, 곁에 있던 아이가 행복감에 젖어 곤히 잠든 줄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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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 기도이야기 성경창작동화 5
오선화 지음, 김은혜 그림 / 강같은평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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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경동화의 새 모델을 세워가다 :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모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동화가 어린이의 전유물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소설을 읽고 청소년은 주로 위인전을 손에 들던 때입니다. 취학 전 아동과 초등학생은 동화와 만화책을 주로 읽었죠. 초등학생들은 한글을 깨치자마자 동네 만화방으로 달려가기 바빴습니다. 다들 그랬던 건 아니고 제 경험에 빗대면 그렇다는 겁니다. 당신 전 친구 집에서 유행하던 월간 소년중앙을 보고 그 애를 줄곧 찾게 되었는데, 제가 함께 놀지는 않고 만화만 보는 게 괘씸했는지 그 친구, 다음 날부터 대문 출입을 금하더군요. 만화 맛이 옴팍 든 전 안달이 났더랬습니다. 달리 방법이 뭐 있었겠습니까? 몰래 몰래 만화방을 들락거릴 밖에요.

 

하루는 유달리 어두웠던 만화방에서 신나게 만화를 보고 뒷맛을 다시며 만화방을 나오는데, 어두운 데서 나왔으니 얼마나 눈이 부셨겠습니까? 말해 뭐 하겠어요. 눈을 사정없이 비벼댔지요. 아마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나 봅니다. 고작 수 분 내였겠지만 초등학교 2학년 쯤 됐으니 그 때로 따지만 수분이 아니라 한 수십 분은 됐던 거 같습니다. 떡 하니 어머니가 제 앞을 버티고 섰는데 눈앞이 노랗게 되고 말았죠. 황급히 시장을 보고 돌아오던 어머니가 만화방 앞에서 눈을 부비고 있는 절 보고 기겁하셨던 겁니다. 말하나 마나 전 혼쭐이 크게 났고 다시는 만화방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어머니의 분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한 일주일이 지났나, 아마 그랬을 겁니다.

 

위인전과 동화 전질이 집에 배달되었습니다. 보자마자 화들짝 놀란 전 웬 떡이냐는 생각에 전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아마도 저를 혼낸 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씀드렸겠죠. 저렇게 만화방에 다니다 얘 버린다고 말이죠. 한참 뜸을 들인 아버지가 그러면 동화책을 사주자고 했을 테고요. 다음 날 일찍 일을 마친 아버지가 책방에 들르셨던 겝니다. 동화책을 주문하는 참에 위인전도 그 위에 얹자고 하셨을 테고요. 그렇게 전 때 아닌 전집의 주인이 됐습니다. 기억을 되돌아보면 전집을 다 읽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학교를 파하고 돌아온 날 전집을 보고 무한히 기뻤던 마음과 그날 저녁 아버지가 흐뭇하게 제 얼굴을 바라보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책 읽는 습관을 형성하게 된 계기도 전집을 통해서였습니다.

 

동화는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아이들이 꾸는 꿈이란 게 대부분 실현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그 꿈이 성장하는 데 날개를 달아주었던 것만은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전 동화를 통해 사고를 넓게 키울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겁니다. 먼저 교회를 나가셨던 어머니의 권유로 교회란 델 처음 가게 되었죠. 선뜻 이해되지 않는 노래였지만 동요 비슷한 찬송을 부르는 게 좋았고, 예쁜 여자 선생님도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들려주던 이야기도 동화처럼 들린 건 또 다른 소득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가 아쉽더군요.

 

당시 책방이 어딨는지, 그곳에서 책을 어떻게 사는지 몰랐기도 했지만 성경이야기가 동화로 묶여 나오지 않은 데 적잖이 실망했던 거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라고 성경동화가 없지 않았을 텐데, 어린 전 그냥 없다고 믿었던 거지요. 그렇게 전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선생님의 동화시간을 무척 기다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20분이 채 되지 않은 동화시간이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기대감이 출중했던 터라 견딜 만했습니다. 그런데 한두 번 듣다보니 선생님의 레퍼토리가 몇 가지 주제에 한정되는 걸 알아차리게 되더란 말입니다. 식상해진 전 급기야 단물 다 빼먹은 벌처럼 그곳을 빠져나오게 됐습니다. 그 후로 중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기대감을 충족해줄 동화가 있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중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줄곧 교회에 붙어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충족시켜줄 그 ‘무엇’입니다. 어린 아이들이니 그 무엇은 동화가 차지하는 게 좋겠지요. 부모 마음 또한 제 아이들이 먹는 거나 놀러 다니는 게 아닌 책이 훨씬 나을 법도 하고요. 동화가 주는 유익이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데 필요한 사회성을 높이는 것도 좋고, 꿈을 키워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의 본질인 영을 살찌우는 데 동화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경동화는 아이가 자라는 동안 신앙에 뼈대를 세우고 신앙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갈 몸을 형성하는 데 더없이 필요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말의 힘입니다. 글은 활자화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활자를 읽는 동안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빠르고 쉽게 글 속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곧 믿게 된다는 거지요.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한 성경 말씀을 보면 눈과 입으로 보고 들은 동화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성경동화를 읽게 해주는 게 좋습니다. 더욱이 신앙 안에서 자라길 소망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일찍부터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눈뜨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런 때 성경동화가 아이들에게 친절한 길라잡이 되어 줄 거라고 믿습니다.

 

먼저 소개해 드릴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은 제목만큼이나 참 흥미롭습니다.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은 이스라엘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슬기롭게 헤쳐나간 에스더의 신앙과 삶을 엮고 있습니다. 에스더 시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당시 바빌론 2인자였던 하만은 이스라엘 백성을 쓸어버릴 계략을 세우고 착착 그 일정을 진행해나갑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에스더의 오빠 모르드개가 동생이자 왕비인 에스더를 찾아오고 에스더는 왕에게 직접 이스라엘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기로 합니다. 에스더는 꾀를 내 파티를 벌이고 그 자리에서 왕에게 하만의 계략을 폭로해버립니다.

 

전체 스토리는 위와 같이 간단히 요약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에스더는 왕비라는 지위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왕의 지근거리에서 왕에게 간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지위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하만을 내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의 계략이 권력을 다투는 투쟁이 아니라 영적 싸움임을 알았던 에스더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후 응답을 받고서야 비로소 왕에게 나아가 청이 있음을 아룁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권한은 더 많이 생깁니다. 굳이 다른 힘을 빌릴 것 없이 소유한 지위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지위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일 또한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성경엔 그 지위를 현명하게 사용해 크게 칭찬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 그리스도께 청한 백부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권한이 미치는 힘을 잘 알았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이 자기 권한에 비할 바 아님을 꿰뚫었습니다. “직접 병석에 오시지 않아도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에스더 또한 왕비라는 지위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은 경륜과 능력을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구한(믿은) 대로 얻습니다.

 

제한된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와 능력에 한계가 있는 몸에서 나오는 힘을 의지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그런 지혜와 힘은 상대방도 엄연히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만고만한 지혜와 힘으로는 둘 모두 공멸 또는 둘 중 하나의 신승(辛勝)을 이끌어낼 뿐입니다. 신승의 경우 화근을 남겨놓기 쉽습니다. 하지만 능력이 무한한 하나님은 완전하고도 깨끗한 승리를 보장합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안 에스더가 줄곧 하나님을 의지한 건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부단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어려서부터 다져야할 근간이 되는 덕목입니다. 하나님이 존재와 목적의 근본임을 아는 일부터 사탄을 대적하고 그를 향해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는 일의 시초가 겸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작 ‘나 하나 살자’고 태어난 인생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적어도 한두 명, 많게는 수백, 수천의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데 우리가 쓰임을 받는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이 없을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에스더에게 배울 교훈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에 실린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너무도 유명해서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입니다. 총리대신이었던 다니엘은 다른 총리대신 2명과 갈등합니다. 갈등의 원인은 그 두 명과 달리 다니엘이 이스라엘 출신이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왕을 채근해 왕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공표하게 만듭니다. 그 법은 하루 세 번 예루살렘으로 난 창문 아래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올가미에 결려든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됩니다.

 

어느 경우라도 절대 권력을 쥔 왕의 명령을 어기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왕이 곧 법이었던 시대에 백성들은 그 법 아래 머리를 조아리는 게 당연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보다 높은 법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총리대신에 올린 분이 하나님이심을 이해했던 다니엘은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다니엘이나 에스더는 모두 강고한 현실 권력 앞에서 현실을 압도하는 최고의 권력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잠시 악한 영의 손에 있는 듯 보여도 그 실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타를 먹은 허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의 발 깔개(발등상)가 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다니엘과 에스더가 믿은 게 그런 사실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 1:9)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은 믿고 의지할 대상에 대해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대상은 현실 권력이 아닙니다. 현실 권력은 어른 입장에서는 직장 상사, 또는 이해관계자로 나타날 겁니다. 아이들에게 그것은 친구나 선생님이 되겠지요. 그와 같은 권력은 자주 상대방을 압도합니다. 특히 상대방이 권력의 외향에 사로잡힐 때 심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력 안에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왕비여서 이스라엘이 죽어야한다는 논리가 얼마나 근거박약하며, 다니엘이 총리대신인 것에서 그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술합니까? 그럼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크리스천을 해하려는 악한 영이 존재하고 있음을 방증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를 타고 강 건너던 중 폭풍이 일어난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악한 영은 수시로 크리스천을 넘어뜨리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위협했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쯤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십자가와 부활로 악한 영의 세력을 근본적으로 끊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저자가 줄곧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을 전면 가득 그린 이유도 ‘세상에 있는 이’(사탄)보다 크신 분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 책이 자라날 아이들을 먹이는 데 크게 쓰이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책이 그와 같이 사용돼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헌신된 크리스천을 우후죽순처럼 일으켜 세우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연속 출간을 앞두고 있는 관련 기획물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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