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처음 만난 산문집, 표지의 사진이 강렬하다.

최승자 시인의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995년부터 2013년까지 기록을 읽었다.

노정이 들어 있다. 가위눌림으로 시를 형성하고, 정신분열증에서 문학으로까지... 

개인의 오래된 기록물에서 무엇을 알고자, 얻으려고 했을까. 

어쩌면 시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기록일 수도 있다.

시인은 이 수필집을 내고 싶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출판사에 대한 채무감을 말하고 있지만, 

시인의 보드랍고 깨질듯한 감성으로는 아예 거절은 어려웠을 거라, 맘대로 짐작한다.  

시인에게 살아 갈 힘, 사랑하는 게 아직까지 남아 있기를 바란다. 시인이 쓴 소설로 만나길...


189쪽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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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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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내가 백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손가락질할 때에는 나는 속으로 코웃음만 친다. 그리고 잡균 섞인 절망보다는 언제나 순도 높은 희망을 산다. 생각해보면, 우우, 지겹고 지겹다. 눈 가리고 절망하기, 눈 가리고 희망하기. 아옹! 아옹! (1981)(22쪽)

존 스타인벡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떠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부터 떠나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은, 그것이 특히 정신적 현실로부터 떠나는 것일 때에는, 몹시 어렵다. 왜 떠난다는 것은 그처럼 어려운 일일까? 글쎄, 시인 이성복의 시([다시 정든 유곽에서])를 인용하자면, ‘철들면서 변은 변소에서 보지만 마음은 변 본 자리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84)(58쪽)

인간은 강하되, 그러나 그 삶을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아주 떠나지는 못한 채, 그러나 수시로 떠나 수시로 되돌아오는 것일진대,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은가 한 번 물으면 어느새 비가 내리고,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두 번 물으면 어느새 눈이 내리고, 그사이로 빠르게 혹은 느릿느릿 캘린더가 한 장씩 넘어가버리고, 그 지나간 괴로움의 혹은 무기력의 세월 위에 작은 조각배 하나 띄어놓고 보면, 사랑인가, 작은 회한들인가, 벌써 잎 다 떨어진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한 해가 이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1984)(59-60쪽)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죽음을 보고 겪게 되고, 그리고 그때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점검하게 된다. 나 역시 앞으로 더 많은 죽음을 보면서 나 자신의 삶을 수시로 되돌아보게 되리라. 마침내 내가 나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될 때까지. (1986)(96쪽)

앞서 나는 1980년대는(그리고 1970년대는) 내게 가위눌림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가위눌림을 어떻게 구체화시켰는가?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자신이 그것을 구체화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만 나는 그 가위눌림에 대하여 시적 저항을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저항은 강한 비명과 비탄, 과격한 에너지를 가진 어휘들과 이미지들의 사용 등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앞서 나 자신이 의식보다는 무의식,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많이 기대어 왔다고 고백한 것은. 나를 짓누르는 그 가위눌림에 관하여 그것의 실체나 구조를 이성적으로 분석하거나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지 못한 채, 무섭다고 싫다고 비명을 지르기만 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89)(140쪽)

내 병의 정식 이름은 정신분열증이다. 거진 다 나았어도 아직은 약을 먹어야 한다. 12년째 정신분열증과 싸우다보니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니다. (중략) 정신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것은 한 5년. 퇴원하여 두세 달 후에 보면 약을 안 먹고 밥도 안 먹고 있는 꼴을 보게 된다. (중략) 이 짓을 최근 몇 년간 되풀이하고 있다.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2010)(17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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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소박한 밥상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고 특효약이 되는 것은 저절로 된 것은 아니리라. 우리가 경험하는 '양가감정, 자존감, 분노, 열등감, 후회, 불안, 허영, 획일화, 애착, 권태, 몰입, 승화, 자기실현 등등'의 감정들을 그녀 또한 느끼면서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면서, 추억 속의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으로 치유한 글이다. 물론 공부했기에 연결하고 통찰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음식은 중요하다. 인간의 욕구 중 하나이기도 하니. 무엇을 먹고 자라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도 달라진다고 본다. 먹고 자란 음식은 곧 삶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가끔 70년대 여고시절, 도시락에 샐러드를 싸 온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계란, 소세지, 멸치, 김 등이 최대치였던 나는 그 샐러드가 너무도 신기했다.

엄마의 생신으로 모였다. 뷔페식으로 불러서 먹었다. 엄마는 남의 음식을 잘 드시지 않는다. 음식 솜씨가 워낙 좋으셔서 엄마가 만든 음식을 먹었던 이들은 만날 때마다 추억을 들려준다. 매년 김장김치와 무말랭이 김치는 공수받고 있다. 갈 때마다 고등어조림, 코다리조림, 미역국, 나물무침 등등은 과식에 과식을 부르니, 당신에게 식당 음식은 도저히 입에 맞을 수가 없으리라.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정성을 쏟아 부은 음식이 지금 우리가 살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아빠는 매 순간 진실과 성실 그 자체였다. 가장 큰, 기도 손도 있다.

나의 부엌은 퇴직 후에 시작된 것 같다. 이러이러한 음식에 대한 추억을 말하는 아들과 남편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긴 했구나, 하는, 어쩌면 그리하여 자꾸만 뭔가를 만들려는 모드로 변해있다. 무의식적으로 주문한 재료를 대하는 순간, 후회가 밀려오지만 벌써 재료를 다듬고 있고, 오늘도 새벽배송으로 온 닭으로 백숙을 하려하니. 

음식은 온 몸을 따뜻하게 하면서 만든 이의 정성이 먹는 이의 마음을 녹이고 다독이는 역할을 하는구나. 그래서 '밥은 먹었니'를 묻게 되고, 밥상에 둘러 앉아 먹으면서, 개개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감정들이 하나씩 치료받게 되는구나. 어떨때는, 마음이 아주 불편할 때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니... 어린 시절 삐쳐있을 때, 엄마가 한 숟가락씩 먹여 준 일도... 일단 밥은 꼭 먹도록, 먹이도록, 해야겠다.ㅎ          


May your Christmas be happ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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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부엌 - 삶의 허기를 채우는 평범한 식탁 위 따뜻한 심리학
고명한 지음 / 세이지(世利知)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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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 인생이 모 아니면 도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는다. 모와 도 사이에는 둘을 이어줄 개와 걸, 윷이 필요하고 흑과 백 사이에는 다양한 색들이 존재한다. 슬픔과 기쁨은 분열되어 대치 상태에 놓인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극단적 슬픔에 빠졌을 때는 훌훌 털고 일어날 힘과 희망을 주는 긍정적 감정이 필요하다. 주체하기 힘들 만큼 기쁠 때도 자칫 판단력을 잃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추스르고 누그러뜨릴 수 있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25쪽)

우리는 나의 선택이 스스로의 이성과 의지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무의식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행위다. 어떻게든 그때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선택을 아쉬워하는 후회는 감정 소모에 지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후회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두 배로 불행하고 두 배로 무능하다"라고 말했다. (108쪽)

삶은 수많은 변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을 변칙이 아닌 지극히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조금씩 풀어내는 것이 살아가는 과정임을 깨우친 것은 나이 들어가며 얻은 큰 수확이다. (126쪽)

그럼에도 과거와 미래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삶의 연장선에서 너무도 중요한 시간이다. 나는 과거에 엄마의 집밥을 먹으며 성장했고, 앞으로 남은 깃털처럼 많은 날 동안 수많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의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것은 이 순간 내 입과 혀로 온전히 느끼며 경험하는 현재의 음식이다. 그렇기에 매 순간 정성 들여 차린 밥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187쪽)

"나는 언제쯤이면 이 모든 것을 초탈할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생각지 못한 일을 겪고 나니 별일 없이 무탈하게 반복되는 평범하고 고요한 일상에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행복한 그 일상에 파묻혀 한껏 즐기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완전히 고유한 ‘나다움‘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초탈의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계시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선을 긋고,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 또는 삶‘이라 거부하던 모든 것들과 마주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서서히 나에게 스며드는 것이었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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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ing 의미를 새롭게 알았다. 흑인 혼혈이지만 피부색으로 백인 행세를 하며 살고 있는 클레어, 흑인과 결혼하여 할렘가에서 살고 있는 아이린, 어릴 적 친구였던 그들은 본질은 같은데 완전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 진실과 거짓의 모습으로. 그로 인해 파생되는 자녀를 가졌을 때도 조마조마했다는 클레어, 아이린의 아이들은 드러난 흑인이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산다는 것, 우린 사회적으로 가면을 쓰고 살기도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내용은 바꿀 수 없다. 가령, 인종, 부모, 더 나아가 내가 한 일을 아닌 척,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클레어는 '언제나 위험의 극단에 서는 것. 언제나 알고 있으면서도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는 것. 그것도 타인이 받을 충격과 분노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럴 일이 없으리라는 것(14쪽)' 이러한 것이 그녀의 삶의 태도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수시로 드나드는 와중에 다 알고 있다고 믿은 남편에게서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결국, 클레어의 남편은 그토록 증오하는 깜둥이가 자신의 아내, 클레어였다는 사실로 분노하고, 아이린이 클레어를 밀었는지, 클레어가 스스로 떨어졌는지, 모를 결말로 끝난다.   

패싱은 동질집단에게 힘을? 부리는 것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서로를 갉아먹는 부정과 분노를 먹이로 삼았다. 어쩌면, 아이린뿐 아니라 누구나 지금의 자신의 모습에서 패싱을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패싱(passing)이란 어떤 사람의 외적 모습이 사회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헤어스타일이나 옷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서부터 그 성별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이 패싱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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