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으로 간 시인 백석, 본명은 기행이다. 그 곳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그의 온 마음을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단어를 끄집어 내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을만큼 시를 쓰고 싶었는데... 자신을 제쳐두고, 자신을 없애고, 고백이 아닌 자백으로 시를 써야했다. 시집을 내고, 책을 읽으며, 사는 그런 소박한 삶을 꿈꾼 시인은 동토의 땅에서 멈췄다. 이미 죽은 사람으로. 그 겨울의 골짜기에서 얼어붙었다. 1912년 태어나 1996년에 죽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오감으로 싯구가 마음에 먼저 닿았을 시인은 어떻게 살았을까로 마음이 저렸다.

전쟁이 끝나고 백석이 1956년 다시 시를 쓰기하면서 일곱 해를 그 당시의 언어로 김연수가 되짚어 썼다.  그 당시의 언어가 백석이 쓴 시의 언어와 마찬가지 일거다. 


*87쪽 
고백[명] 숨긴 일이나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솔직히 말하는 것

자백[명] (해당 기관이나 조직 또는 남들 앞에서) 자기가 저지른 죄과에 대하여 스스로 고백하는 것 또는 그러한 고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러게, 나는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혼잣말처럼 기행이 말했다.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렀다. 벌써 오래전부터,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32쪽)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여름, 그는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잔해에서 쓸 만한 벽돌을 골라내는 법, 경사진 철로를 따라 밀차를 밀고 가는 법, 물을 많이 마시지 않고도 탈수를 피하는 법...... 그리고 희망과 꿈없이 살아가는 법까지도. (64쪽)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뿌누 거기에 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85쪽)

"그런 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벌이지.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고통받은 뒤에야 그게 최악의 선택임을 알게 되는 것, 죄가 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벌이 죄를 만든다는 것." (88-89쪽)

"(중략)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65쪽)

그 눈 때문에 깊은 밤, 기행은 이따금 이깔나무와 소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숲으로 가곤 했다. 숲속에서 귀를 기울이노라면 작고 가벼운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가 들렸고, 때로는 그것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런 밤이면 숙소로 돌아온 뒤에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눈송이들처럼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인생의 자잘한 일들이 시간의 더께를 뒤집어쓴 채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왜 그래야만 했을따? (170-171쪽)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잇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따.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리는 게 아ㅣ다. 현실 자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190-191쪽)

그리고 서희가 사람들로 북적대는 혜산역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고 시를 읊조리기 시작하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 순간,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이 어떻게 자신의 귀에 와 박혔는지, 그리고 이제 더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아름다운 언어가 어떻게 쇠도끼 날처럼 자신의 머리통을 내리쳤는지. 그래서 어떻게 자신과 시를 둘로 쪼개놓았는지. 이제 시는 자신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불행과 시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214쪽)

기행은 밤만 계속 이어지는 북극의 겨울을 생각하고, 그런 밤을 처음 맞이하는 어떤 사람이 있어 그가 아침과 빛을 간절하게 희망하게 되는 것을 생각했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나 어른들이나 책에서 배운 바와 마찬가지로 그 밤에도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가 믿는 것과, 그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밤 안에서 그가 죽게 되는 것을 생각했다. 그때에는 기나긴 밤, 깊은 어둠은 무심하게도 계속 흘러가겠지. (22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말한 '결정자가 된다는 것'의 기준이 마음에 든다. 월리스가 스스로 결정자가 되어 시도한 작품들이다. 그의 글은 상세하다 못해 분명 읽고 있는데도 세밀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일리노이주 축제의 촌스러운 사람들 가운데 출입기자증을 꼭 목에 걸고 있는,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나만을 위해' 준비된 축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축제로 인식하게 되면서, 어린 시절의 환상을 깨며,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미국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 <무엇이 종말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종말인 것만은 분명한>존 업다이크 폄하, <수사학과 수학 멜로드라마>, <결정자가 된다는 것: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특별 보고서>최고의 에세이는 감독이든 작가든, 심지어 독자이든 '스스로 결정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작품(279쪽)'이어야 가치가 있다고. 결국 어떤 상황을 말하든, 타인에 대해 말을 하고 있어도 작가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온전하게 풀어 놓을 수 있는 글이 진짜로 좋은 글이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글로 제대로 풀어 놓은 월리스가 부럽다. 그래도 월리스 글은 지독할 정도로 너무 과하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여지가 있기에 듬성듬성 읽기도 하고, 잠깐 딴 생각을 하면 금방 다른 길로 들어서면서도 읽었다. 픽션은 무에서 나오는 것, 넌픽션은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265쪽)'에서 나오는 것...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페이퍼는 이렇게 쓰고 쉽지는 않았고, 더 잘 쓰고 싶었다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트와일라잇 무도회장에 흑인은 없다. 농가 어린이들의 얼굴에는 무언가 충격과 각성의 표정이 어려 있다. 우리 백인이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다니 하는 반응이다. (중략) 이 공간에는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공격적인 백인다움의 분위기가 흐른다. 중서부 시골에서 열리는 대개의 공공 행사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분위기다. 흑인이 참가한다고 해서 푸대접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흑인은 이런 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83쪽)

린치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처럼 기이한 ‘진부한 일상의 아이러니‘의 해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분류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중략) 린치적인 표정은 상황이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는 시간 동안 길게 유지되어야 한다. 흉측한 채로 그대로 고정된 채 동시에 한 열일곱 가지 별개의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해야 한다. (134-135쪽)

린치의 영화에 ‘영화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다각적이다‘ 같은 요점이 있다고 결론짓는다면 큰 실수다. 린치의 영화는 그런 영화가 전혀 아니다. 유혹적이지도 않다. 적어도 상업적인 의미에서는 편안하거나 선형적인 영화가 아니며 하이콘셉트, 혹은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도 아니다. (중략) 우리가 어떤 수준에서든 영화가 우리로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특정한 내부적 방어 체계를 세워 우리 자신을 얼마나 내어줄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요점, 혹은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의도가 없는 린치의 영화는 이런 잠재의식의 방어 체계를 해체하고 다른 영화와 달리 린치가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린치의 영화들은 종종 감정을 동요하게 만들고 악몽을 꾸게 하는 것이다. (147-148쪽)

무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진정한 매체는 언어가 아닌 영상이며, 그 영상의 경향이 사실주의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표현주의든 초현실주의든, 무엇이 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진실로 느껴지느냐, 전달받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대박을 터트리느냐 하는 것이다. (194쪽)

물론 이런 혐오의 일부는 손쉽게 설명 가능하다. 질투, 우상 파괴, 정치적 올바름의 반발, 그리고 우리 부모들 상당수가 업다이크를 존경한다는 사실, 부모가 존경하는 대상을 비방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 세대의 상당수가 업다이크와 기타 GMN을 싫어하는 진정한 이유는 이 작가들의 급진적 자아도취, 나아가 자아도취적인 자신과 등장인물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과 관련이 있다. (216쪽)

수학이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그 미를 감상하기 위해 너무 많은 피라미드적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일 수 있다. 수학은 학습된 취향의 궁극에 있을지 모른다. 또한 수학의 진리가 절대적이고 전적으로 추상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이 분야를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하며 수학을 하는 사람들을 사회성 떨어지는 괴짜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중략) 낮은 수준의 수학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공포와 불쾌감이야말로 수학 멜로드라마의 대두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게 되는 이유다. 이 장르가 순수수학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 분야의 비상한 아름다움과 열정을 평범한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독자들에게도 수학에도 이로울 것이다. (233-235쪽)

글을 쓸 때 픽션은 더 겁이 나지만 논픽션은 더 어렵다. 논픽션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고 오늘날 느껴지는 현실은 압도적으로, 회로가 터질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반면 픽션은 무에서 나온다. 그런데, 말하자면, 사실 두 장르 모두 겁이 난다. 둘 다 심연 위에 걸친 줄을 타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심연이 다르다. 픽션의 심연은 침묵, 허무다. 반면 논픽션의 심연은 ‘완전 소음‘, 즉 모든 개별 사물과 경험의 들끓는 잡음, 그리고 무엇을 선택적으로 돌보고 표현하고 연결할지 어떻게, 왜 할지 등에 대한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다. (265쪽)

이 수상집의 작가들은 같은 말을 더 잘, 더 간결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서비스적 ‘가치‘라고 할 때 그것이 무슨의미인지는 지금까지 말한 대로이며, 정치 문제나 갈등을 빚는 문제와 동떨어진 주제에 관한 에세이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여러 에세이들이 단지,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한 사실 집합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중략) 독자 여러분의 ‘결정자‘가 생각하는 ‘최고‘를 가장 솔직하고 편파적으로 정의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글들은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이 세상에서 내가 사유하고 살아가고 싶은 방식의 본보기, 거푸집이 아닌 본보기다. (280-28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책 저책을 읽다 말다가, 그러다 여기 저기 다니기도 하고, 지금은 비 온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라디오에서는 생애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11월은 처음이라 한다. 내린천 단풍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어영부영 그냥 지나가고, 제주도 반달살기라도 하자 했는데, 뭐뭐해야지, 뭐뭐하자, 그러고 만 것이 많이 남아있다. 다음에 하자... 그러다 도서관 서가에서 눈에 띈 '그리운 곳이 생겼다'. 그리운 곳도 있지만 그리운 사람도 있다. 저자는 박완서님의 딸이다. 그래서 글쓰는 것은 손해가 있을 법하다. 아니면 저자의 부족한 역량일 수 있다. 내가 누구를 어떻게 무엇으로 가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소소한 것, 들꽃, 바닥 돌, 거리 등을 많이 언급된다. 멀리 가지 않고 그리운 곳을 가 볼 수 있는 것은 책이 있어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다녀 온 곳이 나오면 좀 더 세심하게 관심이 간다. 동일한 지역에서도 각자 보는 것이 완전 딴판이다. 자작나무는 나도 좋아한다. 그리고 자작나무는 누구나 좋아한다는 건 편견일까, 동생네 전원주택도 자작나무로 도배했으니... 저지난주는 동생 생일 축하로 온 가족이 모였다. 으싸하면서 50대 자축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제부와 여동생 탁구대회를 겨울 가족 여행지에서 하기로 했다. 갈 수 있으려나, 하지만 모두들 들떴다. 기분이 좋다. 실시간 탁구연습하는 영상도 보게 되니. 나머지 가족들은 베팅...      

지난주는 서해에서 낙조를 보았다. 엄청 많은 사람들, 일일 갱신하는 확진자 수로 겁도 났다... 

너무 큰 것은 감히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지금 조성진의 빗방울변주곡 듣는다.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