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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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를 천재라도들 하지만, 사실 그는 천재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19세기 최고의 학자로 우뚝 서게 된 배경에는 강력한 정보력이 있었다. 그는 그 정보력을 바탕으로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21쪽)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도 황산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황산은 추사의 희망이었고, 그로 인해 추사는 머지않아 이 힘든 제주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랬기에 추사는 황산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황산이 죽었으니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기막히고 억울한 심정을 이제 누구에게 말해야 한단 말인가? 이 넓은 세상에서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제 믿을 건 이재밖에 남지 않았다. 이후 추사는 오로지 권돈인과의 우정으로 여생을 지탱하게 된다. (86쪽)

추사에게 그들(예찬과 황공망)은 시론에서의 두보와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들처럼 황솔한 느낌이 나는 그림을 그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황솔함이란, 거칠고 간략하고 메마른 느낌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 잎이 다 져버린 고목만 홀로 서 있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이 나는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필묵법의 문제로 귀결된다. 붓과 먹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추사가 늘 강조하던 건필과 담묵, 그리고 적묵법의 사용과 연결되어 있다. (127쪽)

추사 자신이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에도 이상적은 자신에게 너무도 잘 대해줬다. (중략) 그런데도 추사는 이상적에게 그다지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잘 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머나먼 바다 건너 제주도로 온 뒤 사람들은 추사를 이전처럼 잘 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소식을 끊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상적은 추사가 유배중인데도 이전과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어렵게 구한 책들을 보내주었고, 청나라의 새로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주었다. 추사는 여기서 깨달았다. 공자가 왜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의 잎이 시들이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는지 말이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영원히 푸르다는 것을 깨닫듯이, 유배객 신세가 되어서야 이상적의 의리를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우선! 그대는 진정 송백과 같은 사람이구나. (175-176쪽)

이상적은 13명의 문사들로부터 [세한도]제영을 받은 후 장목의 제첨을 받아 1차 장황을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감상했던 [세한도[에는 13명의 제영만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후 [세한도]는 다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중략) 이후 김준학에 이르러 2차 장황을 하면서 16인의 제영이 포함된 형태로 꾸며졌다고 볼 수 있다. (중략)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1949년, 손재형은 세 사람에게 [세한도]를 보이고 그들의 발문을 받았다. (중략) 이렇게 만들어진 세 사람의 발문은 16인의 청나라 문사들이 남긴 제영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한도]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4-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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