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언 고닉이 길을 나서는 이유, 길 위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그 곳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주인공이 되었다가 배경이 되었다가 한다. 그래서 연결이 필요하다. 말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결에 필요한 말은 정보 전달에 많이 사용되는 말 뿐이다. 

7개의 소 제목을 가진 수필이다. 이제껏 보아 온 수필에 대한 관점은 건너뛰어야 한다. 이러한 글도 있다니, 주변의 누구의 공연을 보면서 더 관찰하고 접근하고 글을 쓰고, 고민하면서 자기 이해, 통찰까지, 친구, 결혼, 타인, 관계, 외로움, 삶,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나의 공연이 누구에게는 관찰과 통찰의 근간이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는데, 온전히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말들로 관계 맺기에 서툴다. 

저자는 집요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자기 자신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세상과 온전히 관계 맺기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뫼비우스의 띠 같다.         

기차를 타고 몇 군데를 다녔다. 오는 길에 눈이 내린다. 눈 오는 차창 밖은 괜찮은 볼 거리가 된다. 하지만 눈 온 거리를 오가는 차들과 사람들에게는 불편일 뿐이다. 

거리에서 펼쳐지는 모두의 공연이 취사 선택되는 이유가 되겠다. 그 결과는 어마 무시하게 다를 수 있겠지.


*비비언 고닉 글 중, 이 책이 제일 마음에 든다. 

*잘 살았다. 양쪽 어깨를 토닥토닥.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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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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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거리가 꽤 자주 나를 위한 작품을,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내가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반짝이는 경험의 빛을 탄생시킨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는 내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내게 해준다. 거리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11쪽)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그 사실을 자각한 채 살아가는 일이 삶의 과업이다. 외로움을 이겨낼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외로움이 죽음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배울 수는 있다. 그런 앎은 힘이 되고, 동맹이 되고, 무기가 된다. (73-74쪽)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그 사실을 자각한 채 살아가는 일이 삶의 과업이다. 외로움을 이겨낼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외로움이 죽음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배울 수는 있다. 그런 앎은 힘이 되고, 동맹이 되고, 무기가 된다. (73-74쪽)

통찰은 그것만으로는 구원이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날마다 새롭게 말끔해져야 했다. 걷는 일이 나를 정화시켜주었고 깨끗이 씻겨주었지만 오직 그날뿐이었다. 그 일이 매일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걸어야 할 운명이었다. (79쪽)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는 일상적 용도로 쓰이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한다. (176쪽)

결혼은 친밀감을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유대감은 무너져 버린다. 공동체는 우정을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참여는 끝이 난다. 지적인 삶은 대화를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삶의 신봉자들은 괴상해진다. 사실은 정말로 혼자 있는 게 더 쉽다.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을 해결해주려 하지 않는 존재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216쪽)

"우리는 삶을, 사회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우리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윌슨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진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쓴 작품입니다" (중략) 그와는 반대로, 작업을 하지 않는 일, 심사숙고를 회피하는 일 역시 세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편지를 쓰고자하는 욕구가 내 안에서 유산될 때마다 나는 ㅐㄴ가 비난하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야기를 하고픈 충동을 표류시킨다. 소음이 세상에 만연하게 내버려둔다. 편지 쓰기가 고귀한 일인 게 아니다.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일이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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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비비언 고닉 글에 빠져 있다. 

짝 없는 여자, 나와 게이, 레너드는 둘 다 뉴욕커다. 그들은 우정이 쌓이는 관계다.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는 깊어 만 갈 것이다. 관계는 어찌 될 지 모르겠지만. 뉴욕 거리를 걸으면서 짝 없는 여자는 삶을 느끼고, 그 느낌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대부분이 일상적으로 느끼고 살아가는 부분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게 부럽다. 이럴 때 이런 기분을 정확히 알고 싶고 묘사하고 전달하고 싶은데, 도무지 제대로 끄집어 낼 수 없는데, 짝 없는 여자는 그걸 해 내고 있다. 

나에게는 마음을 뒤집어서 보여줘야만 되는 어려운 것들을 그녀의 글에서는 쉽게 발견되고 읽힌다.   

예순을 넘어서야 몽상이 아닌 현재의 삶이 보이는 걸까. 그녀가 살고 있고. 걷고 있는 '뉴욕'서만 가능할까. 그녀에게 영혼의 안식처 같은 뉴욕은 그녀와 뗄 수 없는 장소이다. 뉴욕에서 사는 사람의 삶은 사람들이 자기 표현력의 증거로 내는 목소리가 켜켜이 포개어 올려진 층층이 쌓인 무수한 목소리들을 다루는 고고학과 같은 삶이라 고백한다. 그래서 뉴욕과 일심동체인 그녀의 삶은 환상이 결코 아닌 온갖 갈등이었다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뉴욕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고. 그러고 보니, 영혼의 안식처나 대상이 있어야 한다.

1935년에 태어난 비비언 고닉은 구십이 가깝다.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더 많은 그녀의 글에서 나의 편견은 길을 잃는다. 이 글은 예순 쯤에 쓴 글 같다. 글을 참 잘 썼다. 

왼쪽 정렬로 편집 되어 있어, 그녀의 문장과 잘 어울린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든다.

비비언 고닉의 글을 읽을수록, 남은 삶은 우아하게 살아야겠다는, 연결되는 지점이 도무지 어딘지 모르지만, 그런 다짐을 했다. 이제는 왕자가 없다는 정도는 알았으니까. 그리고 처음부터 왕자가 아니라 완두콩을 찾았다는 것 정도는 알 때도 되었다. 나도 예순이 넘었으니.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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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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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와 나는 운명처럼 지워진 사회적 불평등 속에 내던져지듯 태어났다는 강렬한 감각이 우리 두 사람의 내면에서 활활 타오른다. 우리의 화두는 살아보지 않은 삶이다. (중략) 문제는 우리 둘 다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중략) 우리도 좀 달라지고 싶지만 어찌됐건 우리가 느끼는 삶이란 게 그러니까. 그리고 삶을 느끼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살아낸 방식일 수밖에 없다. (6쪽~8쪽))

가면 갈수록 사회 변두리로 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이 응어리진 쓰린 가슴을 달래주는 건 오직 도시를 가로지르는 산책뿐이었다. (20쪽)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인 걸 사과하는 것도 지긋지긋해. 판단하기 좋아하면 왜 안 되는데? 나는 판단하기 좋아하는 게 좋다고. 판단을 하면 안심이 된단 말야. 절대적인 것들. 확실한 것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좋았는데! 그런 걸 되찾고 싶어. 되찾을 순 없는 걸까?" (중략) "예전엔 모든 사람이 참 어른 같았지. 근데 이제는 아무도 안 그래. (47쪽)

이십대의 마지막 날 나는 어느 과학자와 결혼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황폐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뭐랄까. 영문은 알 수 없었다. 바뀐 것도 전혀 없었다. 남편도 그대로고 나도 그대로였다. 몇 주 전만 해도 아침에 눈을 뜨면 마냥 들떠있었는데. (중략) 저 남자는 누구지? 나는 생각했다. 저이는 내 짝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또 생각했다. 1년 뒤 우린 이혼했다. (69-70쪽)

삶이 불능의 총합처럼 느껴지려 할 때면 나는 타임스스퀘어까지 산책을 나선다. 세상에서 가장 오령넘치는 하층민들의 본고장인 그곳에 가면 금세 통찰이 회복된다. (73쪽)

실제로 삶을 빚어내는 바탕이 되었던 공감과 연민이 차츰 깎여나가면서 우리가 우정을 바친 그 마음과 영혼의 모험도 천천히,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중략) 영원한 친구따윈 없으며 오직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라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올랐다. (84-85쪽)

세상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생각했다. 나는 내 울분을 제조해내려고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지만 왜? 하물며 소중한 인생에 내처 그걸 붙들고 있었다니. 대체 왜? (122쪽)

자기를 위해서도 못 하는 일을 상대방을 위해 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134쪽)

나도 시모어 크림과 다를 바 없이 오랜 세월 걷고 또 걸었던 그 수많은 거리와 가로수 길을 터벅터벅 걸어다니며 지치지도 않고 꿈에 그리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될 줄이야. 그러다 예순이 되던 어느 날 어떤 낯선 시간이 아늑하게 짜여 있던 이 구성을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162쪽)

예순이 된다는 건 앞으로 살날이 여섯 달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듣는 것과 비슷했다. 내일이라는 몽상 속 피난처로 숨어드는 것도 하룻밤 새 옛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오직 텅 비워진 방대한 현재뿐이었다. 이걸 채우는 작업에 진지하게 임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다짐했다. 물론 말이 쉽지. 몽상을 끊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 긴 세월 해본 적도 없는 현재를 점유하는 일을 대체 어떻게 해낸단 말인가? (중략)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존재의 순간들‘을 자주 생각한 날들이었다. (165쪽)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벗어난다는 건 영원한 미완의 과제로,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완결되지 않는다. (167쪽)

외로움이라는 습관은 질기다. 레너드 말로는 외로움을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꿔내지 않는 이상 난 영영 엄마의 딸일 거란다. 물론 그 말은 맞기는 하다. 사람은 이상화된 타자의 부재로 인해 외롭지만, 그 쓸모 있는 고독 속에 스스로를 상상의 동반자 삼아 침묵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각 있는 존재라는 증거를 방 안 가득 채워 넣는 ‘내‘가 있다. 이런 통찰의 기틀을 마련하는 법은 에드먼드 고스‘로부터 배웠다. (184쪽)

지금 여기, 또다시 여름날 저녁이 왔고, 나는 그 광장을 다시금 걷고 있다. 거리를 뒤로하고 얼굴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아로새긴 채 막에 가려진 그 오래된 추억을 똑바로 들여다보다, 추억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광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 검은 피부, 갈색 피부, 젊음, 떠돌이와 약쟁이와 엉성한 기타 연주자로 북적거리는 곳.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도시를 있는 그대로 느낀다. 내가 지금까지 몸으로 살아낸 것은 온갖 갈들이지 환상이 아니었으며, 뉴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하나다. (215쪽)

우리는(레너드와 나)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 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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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게는 부모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번역도 참 잘했다. 아껴가며 읽은 글이다. 엄마와 나를 돌아본다. 엄마는 나에게 넘치는 애정으로, 난 조금의 애증으로 엄마를 대하고 있다. 엄마와 나 사이의 애정과 애증의 선분에서 직선으로 오가는 게 서로에게 교차되고 있다.   

40대 딸과 70대의 엄마는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맨해튼까지 걸으면서 주고 받은 이야기에서 과거의 시간 배열은 일정하지 않지만 쫀쫀한 기억과 표현이 잘 버무려진 논픽션이다. 엄마와 딸, 가족, 이웃, 딸의 남자들의 이야기가 엄마와 걷고 있는 이 거리에서,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에서, 딱 알맞게, 적절하게, 세밀하게, 상세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들어 있다. 특히, 상황과 사건에 처한 개인의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엄마와 딸은 애정과 애증을 오가면서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서로에게 딸이 되었다가 엄마가 되었다가, 즉 그 엄마의 그 딸이 있을 뿐이다.

엄마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말이 있지만 결국 그 엄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것에 간섭하고 개입하는 엄마가 딸의 삶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글 속의 모녀처럼, 서로가 끈끈한 가족 관계를 넘어서서, 온전한 한 개인으로서 바라볼 수 있고, 서로의 삶을 인정하거나 더 이상의 '항상'이라는 패턴을 벗어날 수 있는 관계까지 와야 한다. 나도 세월이 가면 그럴 수 있을까. 나이가 더 들면 그럴까,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튼, 시간은 우리가 제대로 살기 전에 가버린다는 점이다. 

딸들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엄마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안 했다고, 왜냐하면 엄마의 시간과 인생은 딸들에게서는 늘 미래이니까... 곧 우리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으로 어떻게 보면 언제나 새로운 것만 있는 시간으로 그러다 과거로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돌아보면 왜 하지 않았을까, 왜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살아보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니.  


*54쪽 부분 오타일까, 오빤 열여섯, 아빤 사순 후반이어서...  

*글을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이 블로그를 자꾸 회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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