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이야기 같은 데, 경험한 이야기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이맘 때가 되면 지금까지 구분지어 오고 규정해 온 것들, 경계를 넘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들이 모두가 부질없어 진다. 인생만사 새옹지마, 토우가 되고 흙으로 돌아가는, 그래서 그렇게 아웅다웅도, 쇳소리 낼 필요도 없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울긋불긋한 얼굴색을 만들 필요도 없는데, 새로 시작되는 해가 되면 또 잊어버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삼벌레고개에서 행해지는 모험의 등급도 고갯길의 등고선에 따라 나뉘었다. 아랫동네 소년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고 부모 몰래 불량 냉차를 사 먹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축이었다. 반대로 윗동네 소년들은 극히 불온하고 위험해, 모험이라기보다 범죄에 가까운 짓거리에 물들어 있었다. 결국 소년다운 모험은 삼벌레고개 중턱 소년들의 몫이었다. `높이의 모험`과 `넓이의 모험`은 중턱 소년들이 즐기는 모험의 씨실과 날실이었다. 높이의 모험은 윗동네 꼭대기에서 이루어졌고, 넒이의 모험은 아랫동네 개천가에서 이루어졌다. (13쪽)

그러나 은철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옛날 부모들이 무섭게 먹을 걸 밝혔다는 점이었다. 한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 하고, 가을에 앵두가 먹고 싶다 하고, 고기가 먹고 싶다, 흰쌀밥이 먹고 싶다, 식탐이 한도 끝도 없었다. 어떤 효자는 병든 부모가 고기가 먹고 싶다 하여 자기 허벅지 살을 손바닥만 하게 잘라 맛난 양념을 하여 너비아니로 구워 올렸다 하고, 어떤 효자는 병든 부모가 소나 돼지도 아니고 콕 집어 개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 개를 잡으러 나섰다가 마침 큰 개를 물고 가는 호랑이를 만나자 호랑이게게 개 대신 내 몸뚱이를 뜯어 먹고 개는 제발 나 달라고 몸부림을 쳤다고도 했다. 물론 살을 도려낸 효자의 허벅지는 금세 씻은 듯이 나았고, 호랑이 앞에서 몸부림친 효자는 심한 몸부림에 놀란 호랑이가 개를 떨구고 도망가는 바라멩 개를 메고 와 부모에게 삶아 먹여 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였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은철은 덜컥 겁이 났다. (138-139쪽)

가을이 깊어가면서 삼벌레고개에도 단풍이 한창이었다. 마당이 넓은 아랫동네 주민들은 단풍을 자랑하기 위해 서로의 정원을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도 했다. 윗동네로 갈수록 수목을 키울 공간이 없어 판잣집 주변에서는 단풍을 보기 어려웠지만, 판잣집들 너머 택지로 개발 안 된 삼악산 수목의 단풍은 아랫동네 정원의 예쁘장한 단풍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웅장하고 수려했다. 우물가의 오래된 은행나무도 노랗게 물들었다. 그러나 우물집은 여전히 못 쓰게 된 우물 안처럼 조용했다. (219쪽)

순분은 두 아이를 안고 눈물을 훔치면서 원이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생각했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다고 했지. 눌은 놈 덜 된 놈 찔깃한 놈 보들한 놈. 순분은 그게 마치 사내들에 대한 형용 같다고 생각했다. 서슬이 퍼래서 당장 빨갱이 집을 쫓아내자고 설치고 다니는 통장 박가 같은 놈은 어떤 놈일 것이며, 밤마다 불안감에 사로잡혀 세댁네를 어떻게 내보낼 수 없을까 궁리하는 자기 남편 같은 놈은 어떤 놈일까. 같은 놈일까 다른 놈일까. 눌은 놈도 덜 된 놈도, 찔깃한 놈도 부들한 놈도, 어차피 그놈이 그놈 같았다. (27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뷰의 별이 다섯개뿐이라니,  만들어서라도 더 주고 싶다. 사노요코님, 늙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저의 롤 모델이 되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지금 곁에 계신다면 꼭 안아드리고 싶어요! 저도 이렇게 나이들어 갈게요! 


253-254쪽) 사노요코에 관한 옮긴이의 말을 옮겨 본다.

"섣달그믐에 쓸쓸해 보이기 싫어서 비디오도 못 빌리는 사람, 편집자에게 독설을 퍼붓고 금방 자책하는 사람, 일하는 건 딱 질색이라면서 영원히 읽힐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들어낸 사람, 암 수술 직후에도 매일 담배를 피웠던 사람, 시한부 선고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재규어를 산 사람,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 그래서인지 자신의 죽음에도 초연했던 사람, 그럼에도 어려서 죽은 남동생을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상 최초의 장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생활의 롤모델이 없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 아침밥을 먹을지 스스로 모색해나가야 한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14쪽)

아, 무섭다. 이건 혹시 내가 노인이 된 증거가 아닐까? 늙으면 어제 먹은 음식은 까먹어도 어릴 적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진다던데. 자식을 키운 한창때의 일도 이처럼 뚜렷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53쪽)

정말로 다들 훌륭하다. 화창한 날씨에 읽고 있자니 우울해졌다. 어째서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기분이 가라앉는 것일까. (61쪽)

일을 의뢰받으면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아, 싫다, 가능하면 안 하고 싶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먹고살질 못하니까, 하는 생각으로 마감 직전 혹은 마감 넘어서까지 양심의 가책과 싸워가며 버틴다. 그 전에는 아무리 한가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65쪽)

제아무리 마음이 언짢을 때라도 창밖을 보노라면 상쾌한 기분이 얼굴을 쑥 내민다. 하지만 사람이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창문을 닫으면 또 다시 금방 겉도 속도 누추한 할머니로 되돌아와 일상을 살아간다. (78쪽)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을 추억하다 보면 마음이 아릴 정도로 슬퍼진다. (88쪽)

그 나라는 미국을 좋아한다. 정말로 좋아한다. 툭하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미국으로 사라지고, 미국에서 돌아온다. 실수로라도 일본으론 유학 오지 않는다.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그렇다. (121쪽)
*그 나라(한국)

스토리도 대부분 억지로 짜 맞춰서 개연성이 없다.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도 행복하다. 엄청나게 행복하다. 잘난 사람들은 모두 이 현상을 분석하려 들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좋아하는 데 이유 따위 없다. 그저 좋은 것이다. (126쪽)

치매에 걸리기 전 엄마는 난폭하고 거친 데다 기운이 넘쳤다. 그때 나는 엄마의 옹고집 때문에 괴로웠다. 엄마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자, 비로소 엄마를 용서했다. 정상일 때 용서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141쪽)

문자는 글자만 보내니까 발신할 때의 배경이나 발신자의 실체가 몽땅 사라져버린다. 전화의 경우, "여보세요"라는 말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과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휴대전화에는 분위기의 커뮤니케이션이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나는 문자를 통해 실체 없는 인간과 나누는 대화의 가벼움과 편안함을 깨달았다. (148쪽)

열 받는다. 그게 뭐든 간에 단어를 바꿔 부르면 화가 난다.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이라고 하거나 장님을 눈이 불편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호칭을 바꾼들 상태가 달라질 리 없다. 고약한 위선이다. (173-174쪽)

그러나 지금은 무수히 많은, 정리할 수조차 없는 정보의 단편들이 나 같은 늙은이한테까지 쏟아져서 세계를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 (181-182쪽)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187쪽)

성장 환경이란 중요하구나. 그건 노력해봤자 몸에 배는 게 아니다. 사람은 나고 자란 원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보이지 않는 물질이 몇십 년 전부터 몸에 밴 냄새처럼 주변으로 뭉게뭉게 퍼져 나간다. (207-208쪽)

나 역시 젊은 시절, 마음만은 화사했다. 나도 모르게, 정말로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순이 넘었다. 화사한 생명 같은 건 완전히 잊었다. 이 나이가 되니 마음이 화사해지지 않아서 오히려 편하다. 아, 이제 남자 따윈 딱 질색이다. (220쪽)

생활은 수수하고 시시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일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화사한 마음이 생기면 불륜이며, 나 같은 할머니에게는 범죄나 다름없겠지만 요즘 사람들의 인식은 다를지도 모른다. (221쪽)

젊은 시절, 남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꼭 교태를 부리던 그 여자는 할머니가 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직도 아양을 떨며 남자를 밝힐까. 만약 그렇다면 이 눈으로 보고 싶다. (231쪽)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24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기가 왔다. 그 덕에 집에 머물러 책읽고 나의 첫문장을 찾다가 묵은 일기장 정리를 했다.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삐뚤 삐뚤한 글씨체가 낯익다. '당신의 첫문장'처럼 나에게도 한때 감명깊은 글들이 있었고, 이렇게 적어놓기까지 했구나... 

경인년 1월 2일에는 정이연 '풍선'에 나오는 문장이 가지런히 적혀 있다.  

"땅위의 모든 연애가 그러하듯, 그것은 우아하거나 고상하기 보다는 주로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세목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구두에 대한 취향! 자신의 취향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구두를 신고 나타난 애인을 보면서 남자는 '이렇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라고 중얼거린다. 특별해 보이던 이 사람이 최초의 위기를 맞는 순간이다. 이상한 구두를 골랐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그녀가 그녀 나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불안에 빠진다. 그 구두를 묵인할 것인가, 아니면 기어이 포기 시킬 것인가, 사랑과 자유주의 사이의 유서깊은 갈등은 이렇듯 일상적이고 가장 개인적인 공간에서조차 거듭 모방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옮기다 보니 알랭드보통의 글에 나오는 구두이야기와 겹친다. 페이지도 없고 달랑 적어 놓고, 옆의 메모에는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정체성(정체성은 곧 개념(concept)이다. 내가 생각한 것을 법칙, 규칙으로 부여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개인의 사랑과 자유가 가능하다. 각자의 규칙의 통일성으로 사회가 유지되고 생존이 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므로 특별한 존재로 가능하고 형성한 개념에 따라 세계가 파악되고 살아가게 된다. 등등..."   

경인년 1월 7일에는 권정란 '지식의 충돌'이다.

"살다보면 한때 부풀어 오르던 삶의 솜사탕들이 다 녹아 없어지는 때가 있다. 사랑에 실패했거나 마음먹은 일이 뜻대로 안 되었을 때, 갑작스런 실직으로 출근할 데가 없어졌을 때, 그밖에는 생의 이런저런 사연들로 삶이 세상의 기준선에서 탈락되었을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세상의 모든 등록기들에서 이름이 빠져 있어 아무도 출석을 불러주지 않는 느낌이랄까, 이럴 때 삶에 대한 턱없는 기대는 하릴없이 잦아들고 내게 주어진 삶의 함량은 보잘것없는 부피로 짜부러든다. 세상은 살갗에 쓸리는 메마른 삼베처럼 씀벅이고, 생은 물기가 빠져 마른기침을 쿨럭인다. 그럴때면 나는 종종, 환생을 꿈꾸며 생의 후미진 동굴로 물러나 앉아 쑥과 마늘을 씹듯이 타인들의 생을 음미한다. 내게 이 음미란 물론 자서전이나 평전을 읽는 일이다. 실물적인 삶의 흔적으로 가득한 이 책들은 우선 쫄아든 내 삶에 생의 두터운 부피를 한아름 안겨주는 듯해서 읽는 맛이 난다. 반성이나 성찰만큼이나 삶의 몸집을 불리는 일이 중요할 때도 있다고 나는 보는데, 타인의 생을 숙주삼아 물기 빠진 삶을 다시 부풀리거나 단단한 사실들로 삶을 재무장하는 데 그것은 더없이 좋은 읽을거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기엔 생의 이런저런 고난들을 겪으면서도 자기 삶을 거의 임계점까지 밀어붙이며 나아간 사람들의 궤적이 굵은 실선으로 나 있어 종착없는 내 삶의 방향성에 생생한 부피를 동반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들에 대한 독서는 근자에 들어 내게 매우 요긴한 책읽기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과 평전 일기는 따라서 내 나름의 정신적 섭생인 셈이다." 메모는 책읽기에 무슨 이유가 있으랴. 책은 그야말로 마음의 양식이다. 요즘 책읽기 중 고전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

어떤 날에는 '이반일리치'라는 사람이 끌린다면서 누굴까?... "'더 낳은'이라는 개념이 '좋은' 개념으로 근본적인 규범으로 대체해버린다. 더 나은 것을 향한 경주에 같힌 사회에서 변화에 한계를 두는 것은 위협으로 느껴진다. 무슨 비용을 들여서라도 더 나은 것을 생산하고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식의 태도는 어떤 비용을 퍼부어도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구를 만들어 낸다."

누군가에게 닿아 있는 문장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고 본다. 그 공기로 인해 여전히 사회는 굴러간다고 추상적이지만 믿어본다. 당신의 첫문장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