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걱, 하나님이 쩔쩔매시다니, 그걸 알고 싶어 펼친 글에 내가 쩔쩔 매었다. 오래동안 읽었다. 각 문장마다 어려운 단어가 많고 연결하여서도 이해가 힘든 문장이 많았다. 

예를 들어 "빈말조차 따스하게 잘 못하는 세태가 얼마나 비관적이었으면 그렇게 말했을까 싶으면서도 내심 나는 이런 그의 사랑관이 오랫동안 불편했다. '빈말이라도'의 그 '이라도'가 불편했고 사랑의 최선이 '빈말'이라는 그 따뜻한 비관주의가 은근히 씁쓸했다. 오늘 산행하면서 샘물가에서 나는 그 말을 바꾸어 빈말 '마저' '서늘하게' 채워나가는 몸의 실펀을 그가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는 화두로 조탁해본다. 모든 말은 그 최초의 발화 순간 다 빈말이지만, 몸을 끌고 그 말의 빈 속을 채워갈 때 삶으로 성육화된다. 외교적인 따스함을 실질적인 서늘함으로 바꾸는 비용이 그 전환점에서 불가피해도 그렇게 진보해나가는 것이 말의 진정한 행로 아닐까 싶다. (빈말마저 서늘하게 채우기 중에서, 161쪽)" 

나의 무지때문이라고 빈번하게 스스로를 탓하였지만 그것만은 또 아니다로 애써 위로했다. 번역문도 아닌데... 결국 아는 만큼 이해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글을 읽어야 하는데 관습으로 굳어진 상태에서 이 글은 굉장히 낯설었다. 간간히 동의되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내용에 대한 느낌을 기록하기 보다, 제대로 이해 못했기에 글의 표면을 탓하고 있다. 낯선 부분 극복하기가 숙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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쩔쩔매시는 하나님
차정식 지음 / 포이에마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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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 현실이지만, 설교의 진정성을 큰 목청으로 호소할수록, 그런 설교의 언어, 예찬의 외교적 언어가 관성화된 예배일수록 서비스의 질은 저하된다. 마찬가지의 아이러니한 실상이지만, 단순화된 논리적 계선系線을 타고 상투화된 메시지의 간절한 외침이 서툰 형식으로 그 내용의 진정서을 호소할수록, 그 진정성은 하나님 앞에서나 회중 앞에서 빛을 잃는다. 진정성은 목에 잔뜩 힘을 주어 엉성함을 순수함인 양 호소함으로써 강변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 은근하고도 자연스럽게 감지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32쪽)

이처럼 익숙한 것들의 동일성을 통해 우리 시선의 부담은 한층 완화되고 굳이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로 주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만큼 우리의 한눈팔기는 성공적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제 눈으로 응시하는 모니터와의 교감 빈도와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더 편리한 허공의 안식처를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와중에 잃게 된 것은 낯선 타자의 세계를 모험하려는 용기이며, 낯선 시선의 억압적 부담을 무릅쓰고 살아 있는 인간과 소통하려는 섬세한 타자의식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익숙한 경계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듯이, 그 경계를 넘어서면서 창조적 불화의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 것으로 실현하려는 믿음이 점차 둔화되거나 무력해지는 것이다. (54쪽)

"사람은 헛것이며 그 날들은 지나는 그림자와 같다"는 시편의 한마디를 밥알과 함께 곱씹어본다. 이 말씀은 내가 이미 '된' 것과 앞으로 '될' 것, 또 우리가 자랑스럽게 해온 것들과 앞으로 해나갈 것들의 배타적 경계를 초월하여, 다시 태초의 감각으로 무한과 영원을 마주 대하게 한다. 그 가없는 자리, 그 덧없는 시간 너머의 시간은 인간 삶의 모든 영욕이 용해되는 구원의 종착점이자 소실점이다. (171-172쪽)

그렇다면 완주해야 할 목적/목표telos란 무엇일까. 예수는 그걸 저 어록의 직전에 죄다 친절하게 설명해놓으셨다. 그것은 자신의 생래적 선천적 울타리를 넘어 타자를 무한대로 포용하는 경계없는 하나님의 동선을 모방하라는 것이다. 가령, 악인과 선인에게 두로 해를 비춰주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고 비를 내려주시는 보편적 은총이 그 적절한 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자기편의 형제에게만 문안하지 말고 그 배타적 경계를 넘어 타자를 향해, 원수까지도 아루르며 관계를 맺고 대화와 소통을 시도하며, 영접과 환대의 자세로 이타적인 행보를 취하라는 것이다. (234쪽)

낡은 것, 감추어져 있던 것의 부활이 새것의 결핍을 채워주며 흥분의 도가니를 만들어가는 시태에 제 속내의 새것을 간과하는 자는 불행하다. 새것의 제국에 눌러 일상의 소국이 낭비되고, 그 가운데 덤덤한 관계들이 참신하게 거듭나길 거부하면서 남들이 차려놓은 잔칫상에 호들갑스러워 하는 백성들은 여전히 식민 근성에 찌든 새것 콤플렉스의 노예가 아닐까.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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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축하하며! 읽고 싶은 책은 바로 만날 수 있고, 갖고 싶은 그 많은 책들을 중고서점에서도 살 수 있어 좋습니다. 아울러 15주년 당신의 기록을 만날 수 있어 기분이 무지 좋습니다. 계속 좋아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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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두번째는 첫번째보다는 감흥이 적다. 익숙함 때문이리라. 그 사이 연수도 받고, 오가며 머물면서 읽었다. 노시인이 들려주는 삶을 대하는 태도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경계선에서 보여 주고 있어, 담담하고 편안하게 아무런 경계없이 받아 들이게 된다. 윤석군의 복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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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 아주 사적인, 긴 만남, 두번째 이야기 아주 사적인, 긴 만남 2
마종기.루시드 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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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집중이 주는 행복감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명상도 그렇다는군요. 무엇 하나에 집중함으로써 안식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지요. (23쪽)

소리소리 지르며 엉뚱하기 그지없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우리의 생은 비록 아무의 박수를 받지 못했을지라도 정성을 다한 생애였고 보람찬 생애였다. 남의 고통을 더어주기 위해 살아낸 삶, 남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뜬눈으로 밤샘을 한 그 숱한 날들이 그 순간 주마등같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34쪽)

한 사람이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걸 우린 늦게서야 알게 되었지. (146쪽)

윤석군의 이번 가사에는 비유를 할 때 직유가 대부분이었어요. '......처럼'이나 '......같이'같은, 현대시에서는 별로 고급스럽게 사용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시에서는 '은유'나 환유의 사용이 중요하지요. 얼마나 아름답고 적절하고 또 효과있는 은유를 쓰느냐로 그 시의 표현력의 우열을 가릴 정도니까요. 가사에서는 아직도 '시적'인 직유에서 끝나야 하고 은유를 쓰는 '시'가 되면 안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165쪽)

요즘 아버지는 지방을 쓰실 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 위치를 바꿔 쓰시기도 하고, 글자를 틀리기도 하십니다. 예전엔 그럴 때마다 이것저것 제가 참견도 하고 말씀도 드렸는데, 요즈음엔 그러지를 못하겠어요. 맞고 틀린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가족과의 관계가 그렇지요. (228쪽)

자신의 소원은 언젠가 천장이 높은 집에 서재를 꾸미고 하루종일 책을 읽는 것이라고 했지요.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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