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 현실이지만, 설교의 진정성을 큰 목청으로 호소할수록, 그런 설교의 언어, 예찬의 외교적 언어가 관성화된 예배일수록 서비스의 질은 저하된다. 마찬가지의 아이러니한 실상이지만, 단순화된 논리적 계선系線을 타고 상투화된 메시지의 간절한 외침이 서툰 형식으로 그 내용의 진정서을 호소할수록, 그 진정성은 하나님 앞에서나 회중 앞에서 빛을 잃는다. 진정성은 목에 잔뜩 힘을 주어 엉성함을 순수함인 양 호소함으로써 강변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 은근하고도 자연스럽게 감지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32쪽)
이처럼 익숙한 것들의 동일성을 통해 우리 시선의 부담은 한층 완화되고 굳이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로 주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만큼 우리의 한눈팔기는 성공적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제 눈으로 응시하는 모니터와의 교감 빈도와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더 편리한 허공의 안식처를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와중에 잃게 된 것은 낯선 타자의 세계를 모험하려는 용기이며, 낯선 시선의 억압적 부담을 무릅쓰고 살아 있는 인간과 소통하려는 섬세한 타자의식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익숙한 경계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듯이, 그 경계를 넘어서면서 창조적 불화의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 것으로 실현하려는 믿음이 점차 둔화되거나 무력해지는 것이다. (54쪽)
"사람은 헛것이며 그 날들은 지나는 그림자와 같다"는 시편의 한마디를 밥알과 함께 곱씹어본다. 이 말씀은 내가 이미 '된' 것과 앞으로 '될' 것, 또 우리가 자랑스럽게 해온 것들과 앞으로 해나갈 것들의 배타적 경계를 초월하여, 다시 태초의 감각으로 무한과 영원을 마주 대하게 한다. 그 가없는 자리, 그 덧없는 시간 너머의 시간은 인간 삶의 모든 영욕이 용해되는 구원의 종착점이자 소실점이다. (171-172쪽)
그렇다면 완주해야 할 목적/목표telos란 무엇일까. 예수는 그걸 저 어록의 직전에 죄다 친절하게 설명해놓으셨다. 그것은 자신의 생래적 선천적 울타리를 넘어 타자를 무한대로 포용하는 경계없는 하나님의 동선을 모방하라는 것이다. 가령, 악인과 선인에게 두로 해를 비춰주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고 비를 내려주시는 보편적 은총이 그 적절한 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자기편의 형제에게만 문안하지 말고 그 배타적 경계를 넘어 타자를 향해, 원수까지도 아루르며 관계를 맺고 대화와 소통을 시도하며, 영접과 환대의 자세로 이타적인 행보를 취하라는 것이다. (234쪽)
낡은 것, 감추어져 있던 것의 부활이 새것의 결핍을 채워주며 흥분의 도가니를 만들어가는 시태에 제 속내의 새것을 간과하는 자는 불행하다. 새것의 제국에 눌러 일상의 소국이 낭비되고, 그 가운데 덤덤한 관계들이 참신하게 거듭나길 거부하면서 남들이 차려놓은 잔칫상에 호들갑스러워 하는 백성들은 여전히 식민 근성에 찌든 새것 콤플렉스의 노예가 아닐까.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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