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얼굴의 예수 - 김용민, 인간 예수를 좇다
김용민 지음 / 동녘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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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는 어땠을까. 평지가 많고 호수가 있어 아주 비옥했다. 하지만 땅 주인 다수는 이곳에 거주하지 않았다. 땅 주인 대부분은 부촌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러니까 마을을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평화란 전쟁 없음을 말하지만 실은 분배 정의를 밑바탕에 둔다. 그러니까 이곳은 평화가 부재한 곳이었다. 민중 봉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반로마 저항 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일했고, 예루살렘으로 가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30쪽)

하나님의 나라는 씨처럼 시작된다. 그 배아는 이미 현재의 삶 속에 선사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경험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경험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고히 뿌리내린 희망의 경험과 회상 속에 있다. 씨는 자라고, 집을 떠난 사람은 귀향하고, 질병으로부터 나온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며, 억압에서 해방된 사람은 자유의 나라에서 살기를 바랄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는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이고 사회성을 띈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의 역할과 활동은 ‘지금 여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통적 신학과 현재의 한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오직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다 보니 내세적, 종말론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러니까 사회 구조적인 문제 따위는 무시하며 오로지 구원에만 치중하는 것이다. 종교는 세상과 담 쌓을 때 필연적으로 변절된다. 사회의 조롱거리가 된 한국 개신교가 대표적이다. 모든 교회의 문제는 세상과의 단절에 있다. (32쪽)

[로마서] 3장 2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라고 했다. 스스로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만드는 것이 곧 율법이다.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케 해 주는 그 힘의 실체를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성경은 율법의 길, 즉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피해 구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 이 가운데 우리가 있다. (87쪽)

하나님은 인간을 무엇을 해야 인정받는 존재Human Doing가 아닌, 살아 있음 그 자체로 존중되는 존재Human Being로 여긴다. 광인이라서, 병들어서, 특정 지역 출신이라서, 가난해서, 허름한 집에 살아서, 생산성이 낮아 무능해서...... 이런 것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부질없는 편 가르기 논리일 뿐이다. 이렇게 가르고 또 갈라서 자신의 우월함을 보이고 지배 논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도대체 하나님 나라에서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래서 예수를 해방의 아이콘이라고 부른다. 그 예수를 바라보자. (104쪽)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시대에, 결핍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하는 최대 단점이다. 없는 것도 있어야 하고, 있는 것은 더 있다고 해야 하는 시대에 세상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가치가 바로 결핍이다. 그런데 이런 결핍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하늘의 가장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 엄청난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11-112쪽)

예수의 분노는 결국 고난을 불렀다. 예수는 갈릴리에 나타나 민중의 지지를 받더니, 예루살렘에까지 진출해 종교 기득권의 총아인 성전을 뒤엎어 버렸다. 당대 기득권층 입장에서 그런 예수를 방치하는 것은 위험을 키우는 꼴이었다. 이즈음 로마와 결탁한 이스라엘의 ‘사회 지도층‘은 예수의 제거를 획책한다. 예수는 이 사실을 몰랐을가.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153쪽)

내가 예수가 되는 길이 어려울까.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 자백하는 것이 어려울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를 기념하는 걸로 그치지 않고, 예수를 못 박은 죄인에 다름 아닌 우리의 실존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성전을 정결하는 주체가 아닌, 정결당한 대상자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나아가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것은 예수를 버리는 게 아니라, 친소 관계 또는 이익 관계를 버리는 것이다. 이런 관계들은 ‘바르고 옳은 것‘의 뒷전에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고난을 받는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이며, 부활 신앙을 계승하는 예수의 제자 아니겠는가. (156쪽)

한국 교회는 예수를 믿으면 덕 볼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인간의 죄성 탓으로 돌린다. 사회 구조적 문제가 모두 인간의 죄성 탓이라는 단언은 너무아 위험하다. 노동자들이 절망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두고, 자기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인간의 죄 탓으로 돌리거나 몇몇 못된 기업주의의 죄 탓으로 돌리는 게 온당한가. 사회 구조적 모순에 눈 감는 기독교인은 ‘맛 잃은 소금‘이라 단언할 수 있다. 예수는 정의를 위해 싸웠고, 그 대가의 냉혹함에 결코 기죽지 않았다. 냉소주의의 틀로 숨어들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세상은 총체적으로 퇴보하고 있다. 침묵하고 타협해야 하는가. 행동을 하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치러야 하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신앙이다. (167-168쪽)

공부하면서 예수를 믿자고 말하고 싶다. 많은 이들은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성과 양심을 주었는지 고찰하지 않고, 덮어 놓고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오직 예수.‘ 그들이 오용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성찰 없는 ‘오직 예수‘가 숱한 종교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그들에게는 관심 밖 사안이다. 신학, 역사, 철학, 문학 등 특히 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모든 낱말들에 직면해야 한다. 선대 연구가들의 고민이 나의 생각보다 깊지 않다면 그 이론을 외면해도 된다. 그러나 어디 그러한가.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줄 안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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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대로 쓴 글을 네 멋대로 읽으면 된다로 이해했다.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어여부영 개발새발로 쓴 메모에서 긴 글까지 영원히 봉인한 채로 남겨 둘 건가. 블로그나 SNS 등의 창구를 통해 보여주고 검증아닌 검증을 받으며 남겨 둘 건가. 그 이유가 적어도 자신에게는 타당해야 할 거 같다. 보여 준다는 건 타인으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잘났으니까, 잘하니까가 기저에 있는 거 같다. 본다는 건 비교라는 커다란 에너지가 들어가고 노력의 동기가 될 수도 있고, 실망하여 포기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럼 나에게 돌아와서, 심지 굳은 마음으로 책읽고 끄적끄적하여 자기만족에 목적을 두련다. 책읽기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으로, 지식의 습득과 앎의 확장보다는 맞딱뜨리는 단어나 문장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기에 계속 읽을 거다. 어떤 때는 제목이 눈에 띄어, 표지가 멋져서, 작가나 역자나 출판사가 마음에 들어서의 등등의 이유를 들어 책을 펼칠 이유는 많다.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지. 내 멋대로 읽어라, 좋다. 더 나아가 내 멋대로 써라.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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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읽어라 - 작가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독서 에세이
김지안 지음 / 리더스가이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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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위험한 독서]에서도 책의 의미는 작가의 창조적 재능이 아니라 독자의 취향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15쪽)

이승우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보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쓰는 거라고. 그러고 보니 그렇겠다 싶다. 보는 것을 쓰는 건 기자의 몫일 것이다. (56쪽)

[릴케의 침묵]은 말한다. "상처에 대항하는 방식은 실로 여러 가지다. 그중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가장 탁월한 방식은 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다. 즉 자기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는 것이다." (72쪽)

사람들은 객관성을 들어 진실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주관적인 사고와 감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자서전은 진정한 글쓰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확실히 ‘불가능‘할 것 같다. (74쪽)

작가(김홍신)는 열등감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 사람을 성공시킨다고 했다. 그러므로 결코 열등감에 무릎 꿇지 말라고 한다. 더불어 행복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길 부탁했다. 이제까지 우리의 행복은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 맞춰져 있었다. 그 욕망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살아왔다. 열등감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고 말한다. 열등감의 반대는 우월감이 아니라 ‘자존감‘이라고. (116쪽)

"(...)실연을 뼈저리게 겪은 사람만이 한용운, 이성복(둘 다 시인)의 처절한 연애시를 읽을 수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삶이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길을 잃어버렸다는 자각이 없다면, 우리는 철학자와 그들의 난해한 철학책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산을 걷다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혹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이 없을 때가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 애써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만 불행이도 봉우리를 잘못 선택할 수도 있다. (...) 어떻게 해야 할까? 실망할 것 없다. 다시 내려가 실망하지 않고 새로운 봉우리에 오르면 된다." (133쪽)

이 작품(두근두근 내인생)에서 꼭 있어야만 했던 것이 있는데, 그건 인간의 ‘오욕칠정‘에 대한 통찰이다. 이것을 얼마나 잘 구사하느냐에 따라 작가의 역량이 인정을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한다. [은교]와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같은 소설은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들은 연륜이 쌓이 대작가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김애란 작가는 충분히 재능 있는 작가다. 젊다면 젊은 패기가 보아야 하는데 그녀의 세계는 결핍이나 간절함을 알기엔 너무 충만한 세계 속에서 유유자적해 보인다. (166쪽)

지식을 넓히기 위해 독서를 해야 하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어떤 책이든 자신이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이책은 나에게 좋은 책인가? 한 번쯤 묻고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252쪽)

사형수의 인권만 인권인가? 피해자도 인권이 보호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도 못 믿는다는 세상에서 사형만 폐지하면 과연 이 나라가 문명국이 되는 것인가? 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죽음으로 그 죄를 씻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면 그것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끗하게 죽을 권리가 사형수에게도 있지 않을까? 무조건 죽지 않게 하는 것만이 인권인가도 따져 보아야 하는 것이다.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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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으로 자꾸만 읽었다. 정신분석을 기초로 하여 분노와 사랑을 풀어가는, 5,6세 이전의 부모와의 관계, 특히 엄마와의 관계에서 이미 결정되어 버린 아이의 마음상태, 그 구조로 사람을,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 왜 그런 선택을 하였고, 그렇게 행동을 하였고 하는지, 불편하게 여기는 부분 등등, 지금의 나를 결정짓는 것이 부모와의 관계라는 점을 강조했다. 부모에게 인정과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점과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부모의 사랑의 방법과 거절과 거부가 무의식에서 분노로 표출되어 이질감으로 다가 오는, 이유를 모른 채, 모두 부모의 양육방식에서 기인했다고. 부모가 나를 키운 기준으로 사람을 선택하고 사랑을 선택한다고. 그 부모는 자신의 부모에게서 그리 받아 온 것이라고... 전수된 감정. 이런 저런 생각들로 둥둥, 나의 미해결과제까지 주말내내 불안불안 노심초사 무슨 기분인지 그렇게 지냈다. 드러다 보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있는 힘을 다해 밀어냈다. 왜 지금의 내 모습을 부모의 잘못이라고 하는지. 배울만큼 배운 어른이라고. 스스로 잘라내고 견뎌내고 버릴 수도 있지 않는가.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동일한 실수와 유사한 선택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보면, 특히 사람과의 관계는 보이지 않지만 미묘하고 강력한 힘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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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2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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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 중 무심히, 깜빡 잊고 어떤 행위가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알고 있었다. (50쪽)

일상 속에서 이런 날들을 보낼 수 있을까. 서로의 무릎을 베고 오래 잠들고, 서로의 발톱을 깍아주면서 왜 살점을 베느냐고 소리치고, 서로 흰머리를 뽑아주면서 수고비 액수로 다투고...... 집착처럼 무겁지도 않고 욕정처럼 끈끈하지도 않은 느낌이 상쾌했다. 일상 속에서도 이런 날들을 보낼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또 잠깜 일었다 사라졌다. (126-127쪽)

"잘은 모르지만 성장하고 사회화한다는 것은 그런 분노와 질투들을 무의식에 억압해둔다는 의미 같아. 억압된 적개심은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영원히 죽지 않는 식물 뿌리처럼 늘 새로운 잎과 꽃을 피워내는 것 같아. 무의식이 의식보다 더 힘이 세고, 삶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건 이미 그쪽 학계의 정설이야." (135쪽)

많은 사랑을 한 다음 인혜가 깨달은 사실은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삶의 여러 행위 중 오직 사랑만이 드물게 빛나고 고양되는 순간을 제공해주었다. 인혜는 자신이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양로원에 가서도 틀림없이 연애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20쪽)

한 인간의 내면에 깃든 분노나 슬픔의 질량이 일정한 것이듯 사랑도 그랬다. 늘 가슴속에 깃들어 있으면서 적당한 때에 적당한 상대를 만나 찰랑거리기도 했고 끓어오르기도 했다. 이별이란 그 사랑의 역동성이 잠시 멎는, 사랑의 감정이 활동하지 않는 상태를 일컬을 뿐이었다. (223쪽)

"우리가 이미 말한 바 있잖아요. 사랑의 본질을 권력욕이라고, 그 당사자에게 매혹적인 것, 그 당사자의 생존에 가장 유익한 것, 그 당사자의 욕망과 일치하는 것이라고요. 사랑은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유지시키려는 본능과 맞닿아 있어요. 생식을 통한 종족 보존의 욕구까지 포함해서 말에요."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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