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라면, 교회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저자는 담담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론을 펼치고 있다. 교회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면, 뭔가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삶의 형식이, 삶의 자리가 달라졌다면 교회도 바꿔야 한다. 나의 기도도, 고백도, 반응도 달라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믿음이라는 커다란 프레임으로, 이 자리의 문제를 기도로만 해결하려 한다. 주변의 타인은 믿음이 부족하다로 매도한다. 그리고 한 공간에 모여 드리는 예배만을 고집하면서, 자기들의 교회만 고수한다. 아집이다. 이기심으로 뭉쳐있다. 너무 교만하다. 지금 여기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교회와 기독교인이 해야 할 일은.. 무지하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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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누구인가? - 시대가 묻고 신학이 답하다
김동건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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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론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하거나 진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략) 서술의 방법도 신앙적 고백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15쪽)

삶이 달라지면 인간의 종교성과 그에 응답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당연히 기도하는 방법, 신앙을 고백하는 형식이 달라지고, 설교를 듣는 신자들의 마음의 자세도 달라집니다. (23쪽)

매 시대는 성성의 그리스도와 대화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문화 안에서 새롭게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때 그리스도는 생기 있고 살아 있는 방법으로 그 시대에 현재합니다. 과거의 그리스도론이 새로우 ㄴ시대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시대와 괴리가 있는 그리스도론은 활기를 잃은 그리스도론이며, 그런 그리스도론으로는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그 시대와 대화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이 없으면, 기독교인은 활기를 잃게 되고, 자신의 시대에 해야 할 소명과 과제를 상실하게 됩니다. 교회가 시대정신과 괴리가 있을 때 위기가 오고, 반면 교회가 살아 있는 선포는 역사를 바꿉니다. (26쪽)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라는 종말론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의 섭리와 구원은 ‘역사적 구조‘를 가집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이 역사 안에서 체험됩니다. 구원은 역사와 시간을 벗어난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은 이 세상으로부터(from)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과 함께(with)하는 구원입니다. (57-58쪽)

이제 교회는 구원이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즉 사랑의 행위, 정의로운 행위, 선한 행위, 생명을 살리는 행위 같은 삶의 영역에서 체험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66쪽)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현재 역사 안의 가능성에 따라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그것이 옳으면 행합니다. 즉 종말론적인 신앙은 미래에 명목상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거싱 아니라, 현재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74쪽)

즉 인간은 신앙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기다리며 서두르는 관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오류입니다. 인간은 서두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 안에서, 어느 순간 인간은 하나님과 결정적인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87쪽)

목회자가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교인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방향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배만 드리는 공간이 아니라, 교회에서 배운 신앙을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제공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중략) 교인들도 끊임없이,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선포를 자신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할지를 고심해야 합니다. 신앙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그냥 성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삶 속에서 훈련됩니다. 훈련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이 세워지고, 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100쪽)

성서에는 신앙적 선포도 있고, 교리적인 것도 있고, 신학적으로 설명해야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중략) 한국교회의 문제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믿음‘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신자들의 자신의 시대 속에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그 대부분은 ‘신학적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신자들의 의문에 대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치부하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교회는 신자들에게 신뢰를 잃게 되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도 위축됩니다. 목회자는 이 시대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답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1세기의 목회자는 영성과 지성을 겸비해야 합니다. (101-102쪽)

즉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오용했습니다. 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죄성, 인간의 사악함, 그리고 피조세계가 가지는 한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모순된 현실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6-107쪽)

하나님이여, 왜 악을 허용하십니까? 이렇게 물을 것이 아니라, 질문은 우리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허용했는가? 왜 우리는 악과 타협했는가? 이런 큰 물음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질문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의 삶 속에 던져입니다. 우리는 왜 가정폭력을 눈감고 있는가? 왜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친구를 외면하는가? 왜 세제를 함부로 사용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파괴하는가? 이것이 죄입니다. 이 모든 무책임함이 모여서 악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때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형태로 폭력, 증오, 살상과 같은 악의 현실이 불현듯 발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명 속에서, 악한 현실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순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찾아 담대히 맞서고 이겨내야 합니다. 이것이 악한 현실과 부조리 앞에 선 기독교인의 살아 있는 신앙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출발입니다. (109-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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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전 대학로에서 신구와 이석준의 '라스트 세션'을 보았다. 오랫만에 걸어 본 대학로는 여전했다. 마스크만 다를 뿐, 체온을 재고 연락처를 적고, 다닥다닥 함께 앉았다. 라스트 세션은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만나서 각자의 세계관을 펼치고 있다. 서로의 대척점에서. 그들은 어린 시절은 유사하지만, 그 후는 완전 다르다. 서로 주고 받는 대화가 마음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가를 반복했다. 구강암을 앓는 프로이트 역의 신구는 발음하시기가 참 애매하셨을 것 같다. 하지만 믿고 보는 그들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왔을거다. 쫀득쫀득한 그들의 대화에서 마음에는 불편감이 조금씩 쌓였다. 나는 언제나 루이스와 같다는, 믿는 사람이기에, 그런 마음이었는데, 프로이트에 가까웠다. 프로이트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관계도 미리 끊는 편이었다. 특히, 안나는 결혼도 못했다... 

아들을 물리적으로 독립시켰다. 소소한 물건들을 준비하는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씁쓸했다. 요즘은 무엇을 먹어도 입맛이 없다. 부모님은 우리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보고 싶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평이 넘는 산속 리조트에서 친정식구들과 여름 휴가를 보내고 오니 코로나가 극성이다. 코로나가 인공지능같다. 교만과 겸손이라는 말이 맴돈다.  

 

*요즘 듣는 노래, 이소라가 부르는 [신청곡],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노래가 가볍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이기에 격이 있지만 이 노래에는 아깝다라는 그런 마음이다. 라포엠이 부르는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거지], 누군가는 이러해야 하고, 그럴거라는 진하고 깊은 편견, 얼마큼 알아야 제대로 아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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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VS 프로이트 -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대논쟁 C.S. 루이스 연구서
아맨드 M. 니콜라이 지음, 홍승기 옮김 / 홍성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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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적은 완전히 대립하는 두 관점, 즉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세계관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데 있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을 이 두 범주로 나누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대립하는 관점으로 인생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룰 것이다. (15쪽)

우리는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논변들은 타당한 증거를 지니는지, 과연 그럴듯한지를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논변이 얼마나 객관적인 증거를 기초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현실을 왜곡한 감정을 기초로 하고 있는지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78쪽)

루이스와 프로이트는 둘 다 도덕률에 복종하려 했는데, 프로이트는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과 비교 평가하여 자신이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결론지었다. 루이스는 자기 행동을 도덕률이 요구하는 바와 비교했고, "나 자신의 성격에 무시무시한 것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질겁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이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 깨달음은 그가 무신론을 버리고 영적 세계관으로 이행하는 많은 단계 중의 하나가 되었다. (104쪽)

루이스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강조했다. 세상의 어떤 쾌락도 우리를 만드신 존재와의 관계를 향한 갈망과 절실한 필요를 만족시키거나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를 만드신 분과의 관계를 먼저 구한다면 이를 얻을 뿐 아니라 행복도 넉넉히 얻게 되리라고 루이스는 믿었다. (144-145쪽)

프로이트는 인생에서 지속적인 행복을 발견하리하는 기대를 단념했다. 그는 미래에 낙관적인 사람들에 대해 비이성적이며 "진리와 상충된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평생 ‘우울증 발병‘으로 괴로워하다가 인생의 끝이 다가왔을 때 이런 질문을 던졌따. "인생이 힘들고 기쁨이 없다면, 게다가 너무나 비참하여 죽음만이 우리를 구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면 오해 산다는 게 뭐가 좋겠는가?" (169쪽)

무엇이 프로이트의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관계를 파국으로 이끌었을까? 루이스가 지적한 바로는 우정은 공통의 관심사에 기초를 두는 것으로, 프로이트와 동료들은 많은 관심사를 공유했다. 초기 프로이트 추종자들은 모두 정신분석가였으며 그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공유했다. 그런데 왜 갈등이 생겼을까? 프로이트가 사람들을 불신하고 낮게 평가한 것이 그러한 갈등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243쪽)

슬프게도 프로이트는 자기 이웃을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로 보았다. 프로이트에게 이웃은 그의 신뢰와 사랑을 얻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60세 때 프로이트는, 일생 동안 자신을 이용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친구들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회심 전의 루이스는 프로이트처럼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태도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회심 후에는 모든 개인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보았다. "당신은 단지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이에게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국가, 문화, 예술, 문명 등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경솔함이나 무례함이나 우월감을 갖지 않고, 죄가 무엇인지 깊이 알면서도 죄인을 사랑하는 참되고 희생적인 사랑"이 특징이 되어야 한다. 루이스의 사랑의 개념은 그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였고 그를 매우 다른 사람-"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였다. (249-250쪽)

고통은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고통이 우리 삶의 질에 미칠 영향을 결정한다. 만일 루이스처럼, 어떤 지고한 존재가 우리를 사랑하며 궁극정으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는다면 인내와 희망을 가지고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물론적 세계관을 고수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부닥치는 혹독한 현실에 굴복하라는 프로이트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결론은 이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온다면, 이는 그가 자기 고통에 대한 위로와 위안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조건적 굴복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는 아마도 길을 멀리 돌아가는 노력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289쪽)

프로이트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자신이 죽을 날짜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졌지만, 주치의에게 자기 생이 다하는 때를 알려 줘야 한다고 고집했다. (302쪽)

프로이트는 안락사로 죽기 전날인 1939년 9월 22일에 서재에서 발자크의 책 [파멸의 가죽]을 골랐다. 그는 몇 시간 후에 의사에게 자기 생을 마치게 해 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다. 그가 일생 동안 읽은 수백 권의 책 중에서 왜 하필 [파멸의 가죽]인가? 이 소설의 구성은 단순치 않다. 부와 명성을 갈망하는 ‘젊은 과학자‘인 주인공 라파엘은 스스로를 매우 재능 있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자살을 계획한다.(중략)왜 프로이트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 책으로 특별히 발자크의 이 작품을 선택했는가? 부모의 영적 세계관을 등지고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부와 명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 프로이트는 스스로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고 느꼈는가? 프로이트는 심리연구를 자신의 연인이라고 말했다. 베르다흐와 발자크의 두 작품 속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프로이트는 자신이 광란적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는가?(305-308쪽)

그러나 루이스는 그의 슬픔을 애써 감당하면서 "사별이란 사랑의 경험상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루이스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편지들과 당신 그가 읽은 책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략) ‘죽음을 친구로 그리고 구원자로 볼 수는 없겠는지요? 죽음은 당신을 괴롭히는 육신을 벗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죄책감을 벗어 버리거나 컴컴한 지하실을 빠져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당신에게 너무 친절해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유감스러운가요?" 그런 다음 루이스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며 그녀를 위로하려고 애쓴다. (316-317쪽)

(위의 내용에 이어서)"우리가 뒤에 남기고 떠나는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에게 ‘평안하여라, 애야, 평안하여라. 편히 쉬어라. 이제 잡고 있는 것을 놓아라. 영원한 팔이 너를 품을 것이다. ...... 너는 나를 그렇게 믿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되지 않는지요? 물론 이번이 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번이 좋은 연습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 편지에 "당신의 벗(그리고 당신과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 다다른 지친 여행자) 잭"이라고 서명을 남겼다.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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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이라고 저자가 굳히 밝히고 있지만, 넌픽션으로 읽혀졌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눈물이 저절로 났다. 어느 누구의 삶을 무슨 잣대로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으며, 옳다 그르다로 말 할 수 없음을 새삼 느낀다. 

....... 살아가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에서.  

이 세상 떠날 때 나와 관련된 일을 최소라도 의식을 가지고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비가 잦다. 그것도 국지적으로, 아주 많이. 살아가는 데 오만가지 일이 일어나고, 잔잔하게 무관하기도 하고,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오늘 내리는 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각자의 선택도 한 몫을 한다.  


*'스토너' 강추한다. 강력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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