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과 자유 - 장자 읽기의 즐거움 問 라이브러리 8
강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구판절판


사랑은 어떤 타자를 특별한 것으로 느껴지기를 바라는 감정이자, 동시에 그 타자로부터 자신도 특별한 것으로 느껴지기를 바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이란 내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타자가 내가 그런 것처럼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감정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어떤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어려운 문제는 타자로 하여금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에게도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타자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 타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16-17쪽

장자가 이야기하는 망각이나 비움이란 개념을 우선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독해해서는 안 됩니다. 장자는 우리로 하여금 타자에 대한 사랑 자체를 망각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가 망각하거나 비워야 한다고 생각한 대상은 우리가 타자에 대해 미리 갖고 있는 생각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장자가 문제삼았던 것은 타자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우리의 판단 혹은 추측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타자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야." "그에게는 이것이 가장 좋을거야." 이러한 판단들 속에는 타자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 그래서 그는 우리와는 다른 생각과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진지하게 숙고되고 있지 않습니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자유, 즉 타자성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위험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장자는 바로 이것을 망각하거나 비우라고 역설했던 것이지요.-18-19쪽

아름다움이나 숭고의 느낌은 모두 일종의 무관심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무관심은 따뜻한 봄날처럼 평온하고 안정된 것이라면, 후자의 무관심은 폭풍우 속에 있는것처럼 불안하고 역동적인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창문을 통해서 폭풍우를 구경하는 것과 들판에 서서 폭풍우를 맞는 것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과 관련된 무관심이 타자를 관조하는 무관심이라면, 숭고와 관련된 무관심은 타자와 마주쳤을 때 발생하는 무관심이라고 말해도 된다.-52-53쪽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자에게 있어 도(道)란 미리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장자는 "도는 우리가 걸어 다녀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87쪽

'도추'의 상태란 이분법적 대립과 판단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유예되는 상태, 판단이 중지되는 상태를 말한다. 자신이 상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못하여 현기증을 느끼면서 송나라 상인이 경험했던 것도 바로 이 상태이고, 원숭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지 못해 당혹감을 느꼈던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경험했던 것도 바로 이 상태다.
결론적으로 장자의 '양행' 논리는 '타자성의 테마'와 판단중지의 테마'에 대한 통찰 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옳고 그름(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대립을 조화시킨다"는 표현이 '타자성의 테마'없이는 이해불가능한 것이라면, "천균(天鈞)에서 편해한다"는 표현은 '판단중지의 테마'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에게 있어 이 두 가지 테마는 "둘이 함께 가는(兩行)"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성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일종의 판단중지 상태에 이르게 되고, 역으로 일종의 판단중지 상태에 있게 되면 우리는 타자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행'논리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논리가 장자가 권고하는 심재(心齎)나 좌망(坐忘)의 수양론의 취지를 이해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114-115쪽

인간의 유한성과 타자의 타자성 사이, 다시 말해 자타(自他)사이의 심연을 건너기 위해서는 일종의 결단과 비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비약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충분히 가벼워야만 한다. 심연을 건너기에 충분히 가볍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비워야만(虛) 한다.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심연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보물처럼 가지고 있었던 것들[선입견, 오만, 자의식, 사변적 사유 등등]과 경건하게 작별의식을 수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심연을 건너는데 자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비워야만 우리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가벼움과 경쾌함, 도약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장자에게 주체의 변형 혹은 주체의 자기수양은 타자와 소통이라는 이념에 종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비우고 심연을 비약한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타자에 이른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우리는 건너편에 이르지 못하고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움의 수양은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일 뿐 결코 타자와의 소통을 필연적으로 보장하지는 못한다.-123쪽

장자는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기억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서, 기존의 낡은 기억을 제거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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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이다. 그간 가족여행을 경주로 다녀왔고, 명절을 쇠느라 시골을 다녀왔다. 동일한 사람들을 두주 연거퍼 다시 만났다. 연중행사가 된 가족여행은 늘 재미가 있다. 아빠의 생신과 동생의 생일, 조카의 대학합격까지 같이 예배드리며 말씀과 특송, 시낭송, 편지읽기, 동영상보기, 케익자르기, 선물주기, 이야기등 함께 한 모두에게 행복과 기쁨이 되었으리라.  첨성대, 불국사, 감포, 박물관을 거쳐서 2박3일간의 여행을 마쳤다. 설날에는 세배와 덕담과 떡국, 윷놀이, 그림맞추기, 카드놀이, 게임등 각자 하고 싶은 것에 동참하며 즐거워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일가를 이룬 오남매의 놀이는 누구나 부러워한다. 어떻게 그렇게 놀 수 있나? 서로를 배려하고 수용하는 태도가 가장 큰 이유이리라. 또한 매일 기도하시는 아빠, 당신의 삶은 그 어느 누가 보아도 고개 숙여 존경을 표하리라. '예수전'을 읽으면서 기도하는 아빠와 당신의 삶이 오버랩된다. 품위가 없는 현장에서 품위를 가졌던 아빠는 예수를 진정으로 잘 아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다. 이건 나의 아빠가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의 말이다. 우리아빠같은 사람만 있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니까...우린 아빠의 기도손만 믿고 아직도 예수와 세상의 말에 귀기울이며 넘나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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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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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들렸다는 건 뭔가? 사람이 어떤 다른 정신에 장악되어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과 입이 돌아가고 미친 말을 해 대는 것만 귀신 들린 게 아니다. 진짜 심각한 귀신 들림은 오히려 겉보기엔 멀쩡해서 귀신 들렸다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운 상태다. 이를테면 오늘 우리는 이른바 '행복과 미래'를 얻기 위해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느라 정작 단 한순간도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소모하는, 돈 귀신에 들린 '멀쩡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볼 수 있다. -35쪽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38쪽

...먹고사느라고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바리사이인들 앞에서 죄의식과 열등감에 젖어야 했다. 바리사이인들은 인민들의 그런 죄의식과 열등감을 기반으로 여느 인민들에게서 자신들을 '분리'하여 품위를 유지했다. 예수는 그 공공연한, 그러나 아직 단 한 번도 문제시되지 않은 억압의 체제에 분노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반대로 1년 내내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도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품위를 잃을 행동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은 품위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59쪽

어떤 게 더 큰 이적인가?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 그리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진 걸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그것을 부끄럽고 불편해하게 되는 것. 예수는 진정한 이적, 더 큰 이적을 요구한다. -82쪽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이 반드시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가장 악한 세력은 그 악함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어, 뒤집어 말하면 그들에 대한 인민들의 적대감이나 반감 또는 일반화되어 있어서, 그들을 비판하는 일은 그런 일반화한 적대감이나 반감을 한 번 더 되새기는 일에 머물기 쉽다. 너무나 지당한 일은 하나 마나 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두 가지 요건을 갖는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모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가질 것, 그러나 그 갈등과 적대의 수준은 지배체제 자체를 뒤흔들 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 요건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103쪽

믿음의 주체는 '나'이며 기도는 그 믿음을 일상화하며 풍성하게 키우는, 우주의 기운을 불러 모으는 행위다. -146쪽

불의한 사회 현실 속에서 분노와 용서는 늘 균형을 잃곤 한다. 현실에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대개 용서를 모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빠져 들어간다. 한편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노할 줄 모른다. 그들의 분노 없는 용서,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 않는 무작적한 용서는 불의한 현실을 덮고 그 현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세력에게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에게 분노와 용서는 늘 병행한다. -188-189쪽

하느님은 우리 삶과 세계의 외곽에서 우리를 절대적 힘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살아 있는 하느님인 것이다.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을 자행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 속에서 함께 고통받는 분인 것이다. -202쪽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정치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상투적인 견해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치적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겉보기엔 제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지배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더 이상 혁명적인 게 아니다. 학술적.문화적 차원에 머무는 혁명이론 따위가 그렇다. 반대로 겉보기엔 그다지 혁명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데 지배체제가 어떤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운동보다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는 비폭력주의자였고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안다. 그런데 왜 지배체제는 폭력을 사용하고 국가권력 접수를 목표로 싸운 바라빠보다 예수에게서 더 큰 위협을 느끼는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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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길, 강의 내내 책을 읽었다. 한데를 나가면 금방 얼음같이 이마가 차가워진다.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온다. 둘둘 말아 입었건만...  

한페이지에 세가지의 글이 들어있다. 연극을 보는 듯하다.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동시에 들어 있으니까. 책이 참 낯설지만 재미있다. 어떻게 이렇게 쓸 생각을 했지.   

"하느님, 제가 죽기 전에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소서."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이라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그 소원을 철회했다.(어느운나쁜해의일기 p16) - 늙은남자 셰뇨르 C가 젊고 예쁜 여자 안냐를 보면서... 그런데 왜 금방 철회했을까요?  

죽기 전에 한가지 소원을 생각해 보는 것도 이 추운날 무지 괜찮은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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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절판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왕의 통치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순진했을 것처럼, 우리 시대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순진하긴 마찬가지다. 이양의 규칙은 최고의 통치자를 찾아내기 위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합법성을 부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갈등을 막기 위한 방식이다. 유권자, 즉 데모스(demos)는 최선을 택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임무라는 것은 사실 그보다 훨씬 더 간단한 것이다. 즉, 한 사람을 선정하는 것이다. -22쪽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자유롭게 한다. 똑같은 의미에서,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예쁘기 때문에 그녀는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이나 자유롭게 한다. 버릇없는 아이의 사고방식. 문제는 그녀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데 있다. -56쪽

당신의 정체성은 오직 당신 것이야. 어떻게 보면 그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가장 귀중한 자산이잖아. 당신은 그것을 지킬 권리가 있어. 단호하게 말이지.-69쪽

너무 늙어서 사악한 생각들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대로 가둬 놓아야 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사악한 것일까? 결국 이 세상에서 사악한 생각 말고 노인에게 남아 있는 건 뭘까?-101쪽

개연성을 무시하는 것을 구어적으로 표현하면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는 삶이 규칙들에 의해 살아지는 삶보다(아마도) 더 좋지 않을거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118쪽

그들은 정치란 본질적으로 진실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혹은 적어도 모든 상황에서 진실을 얘기하는 것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길게 보면 역사가 그들이 옳다는 걸 증명해 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142쪽

하지만 의견은 기분에 따라 변한다. -145쪽

나는 영국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바와 같은 집단적인 축하 장면을 보면서, 내가 계속 이런 사람으로 고집스럽게 남아 있음으로써 인생에서 놓친 것, 나 자신을 소회시켰던 것들이 무엇인지를 얼핏 엿본다. 집단에 속하는(또 그 속에 있는) 기쁨, 집단적인 감정의 물결에 휩쓸리는 기쁨 말이다. 집단이 표준이고 혼자 있는 것이 비정상적인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이 무슨 깨달음이란 말인가?-188-189쪽

"네, 예쁘죠. 하지만 얼굴이 결국 사람을 어디로 데려다 주죠?" 우리 두 사람은 잠시, 얼굴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다 주는지 생각해 보았다. -194-195쪽

당신은 생각을 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내게 보여 줬어요. -224쪽

고등 동물만이 지루해할 수 있다. 니체의 말이다. 내 생각에 이런 발언은 고등 동물 중 하나인 인간에 대한 찬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삐딱한 찬사다. 즉, 이런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들떠 있다. 그것은 뭔가 할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달하고 불안해하며 결국 사악하고 분별없는 파괴로까지 치달을 것이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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