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여자 - 떠남과 돌아옴, 출장길에서 마주친 책이야기
성수선 지음 / 엘도라도 / 2009년 7월
품절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그 사람과 함께 먹고 싶다면, 그 마음이 간절하다면 분명히 사랑을 하고 있는 거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 궁금하다면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 사랑을 확인하는 리트머스종이, 그게 바로 맛있는 음식이니까.-17쪽

고흐는 수많은 절망을 딛고 일어나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고흐가 불멸의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생계조차 꾸리기 힘든 가난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함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렸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데생을 배우는 대신 밀레의 그림들을 모사하여 독학으로 기초를 다지고 하루종일 지칠 정도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고흐가 자신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칭했던 밀레는 "그림에 모든 것을 다 걸었다"고 말했고, 고흐는 밀레의 그림뿐 아니라 그의 철학과 인생을 예술의 길잡이로 여겼다. -114쪽

... 나도 돌이켜보니 내가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진심을 이용한 적이 많았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사귈 생각도 없으면서 술 취하면 콜택시를 부르듯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고, 같이 밥 먹을 사람 없어도 전화하고, 주말에 약속 펑크나면 전화하고, 우울하면 술 한잔 하자고 불러내고...... 내가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사귈 생각도 없는 남자를 스페어타이어처럼 묶어두고 다녔다. 그것도 몇 번이나, 난 그들을 '희망고문'했다. -154쪽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온갖 바쁜 척은 혼자 다 하며 가족한테, 친구한테 전화가 오면 "미안, 지금 바빠서 그러는데 이따 전화할게"하고는 툭하면 잊어버리는 나는 지금도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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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긋불긋한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린다. 20년 동안 뉴욕의 가난한 작가와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위치한 마크스 서점상이 주고 받은 편지를 읽었다. 기다림과 절실함이 묻어나는 소포에서, 막 튀어나온 책을 받자마자 펼쳐든 여작가의 마음과 아울러 원하는 책을 깔끔하고 아름답게 보내주고, 필요한지 기다려주는 훈훈한 고서적상의 인정, 책을 통한 서로의 소소한 일상과 우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마음까지 불어오면, 못부친 편지들이 기억난다. 요즘도 편지쓰는 사람이 있을까. 까마득한 기억이다.     

"프랭크 도엘 씨,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우두커니 앉아 빈둥거리고 있나요? 리 헌트는 어디 있어요? 옥스퍼드 운문은요? 불가타 성서와 귀여운 바보 존 헨리는 또 어디 있고요? 이 책들이 사순절 독서로는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보내주지 않는군요.(p22)", "나무늘보씨, 당신이 뭐든 읽을 것을 보내주기 전에 여기서 썩어 죽을지도 모르겠어요.(p73)", "친애하는 헬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지난 편지에서 요청한 세권이 일제히 당신한테 가고 있습니다.(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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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구판절판


소중한 친구야-
디킨스 책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고색창연한 멋쟁이 서점이더구나. 직접 와서 보면 너도 완전히 넋을 잃을 거야. 외부에 진열대가 있길래 우선 발길을 멈추고 이것저것 들쳐 보면서 꾸경꾼 태세를 갖추고 나서 방랑을 시작했지. 안은 어둑어둑해서 눈에 보이기 전에 냄새가 먼저 손님을 반기더구나. 참 기분 좋은 냄새야.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먼지와 곰팡이와 세월의 냄새에, 바닥과 벽의 나무 냄새가 얽히고설킨 냄새라고 하면 될까......-52쪽

저는 봄마다 책을 정리해서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은 못 입는 옷을 버리듯이 내버려요. 모두들 큰 충격을 받징. 제 친구들은 책이라면 별나게 구는 사람들이거든요. 이 친구들은 베스트셀러는 뭐든 다 가져다가 최대한 한 빠른 속도로 끝내버려요. 건너뛰는 데가 많을 거다, 하는 게 제 생각이죠. 그러고는 뭐든 두 번 다시 읽지 않으니 1년쯤 지나면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하지요. 그러는 사람들이 정작 제가 책 한 권 쓰레기통에 던지거나 누구한테 주는 걸 보면 펄펄 뛰는 거예요. -88쪽

이건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으로는 불공평하다고 봐요. 제가 보낸 것은 일주일이면 싹 먹어치우고 설날이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제가 받은 것은 죽는 날까지 간직했다가 누군가 그것을 아껴줄 이에게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그런 선물이잖아요. 저는 앞으로 태어날 애서가들을 위하여 최고의 구절들마다 연필로 살그머니 표시를 남겨둘 생각이에요.-91쪽

헤밍웨이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7세기 존 던의 설교문을 모태로 태어났다. 인용문은 이 설교문의 한 구절이다.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서 온전한 하나의 섬은 아닐지니, 무릇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요.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한 줌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지며, 작은 곶 하나가 그리 되어도 그대 벗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되어도 마찬가지어라. 그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축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좋은 울리나-이를 알고저 사람을 보내지는 말지어다.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여 울리기에....."-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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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재미있다. 재미있기에 오래동안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배운다. '간접적 보호자'는 나의 직업과 관련이 있고, 인권을 정치적으로 만 보아온 시각을 '사회권'으로 바꾸어 주고, 객관적인 때와 주관적일 때의 한없는 차이도 알려준다. 저자가 말하는 부분과 저자가 읽은 책이 말하는 부분의 경계선에서 사실(fact)을 제하고는 얼마든지 동심원을 그려나갈 수 있다. 감정적일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 책읽기가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면야 굳이 시간을 들여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공감도 하고 부정도 한다.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안에 쾌락이 있기 때문이다.'는 장정일의 말에 감히 동의한다. 읽은 책의 권수와 쓴 글의 크기와 길이와는 비례하지는 않겠지라는 바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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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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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그 책이나 지은이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세계'라 어떤 것이었나를 파악하고, 다른 책이나 지은이들의 이상 세계와 비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을 비롯한 진짜 좋은 책에는 '인간이 살았으면 싶은 이상 세계'에 대한 설계도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25쪽

너와 나는 연대가 필요하지. 서로에게 친절 '노동'을 요구할 게 아니다. 내가 당신에게 친절을 강요하면,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짜낸 친절을 보상받으려 할 게 뻔하다. 그런 사회에서 친절은 상대방을 베는 칼이다. 하므로 우리는 감정노동자들의 친절에 대해 '쿨'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건 감정노동자들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나 역설적인 사회 안정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오로지 나를 위한 이유도 있다. -33쪽

앞서 프랑스혁명이 쟁취한 시민권 얘기를 했지만, 프랑스혁명은 사회적 강자인 부르주아들이 혁명을 주도하면서 그들 계급의 재산권이나 정치적 권리만 챙겼고, 노동자나 여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권은 배제되었다. 인권이라면 자동적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나 집회. 결사의 자유만 떠올리게 된 것은, 정작 중요한 시민권 가운데 하나인 사회권이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회권은 분배의 정의를 핵심으로 하면서 그것의 이행을 요구할 권리, 일할 수 있는 권리, 실업을 보호받을 권리, 일정 기간의 유급휴가 등 휴식과 여유를 가질 권리, 건강 및 행복에 필요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학비 걱정 없이 교육을 받을 권리, 노령 보호 등을 포함 한다. -40쪽

아버지에게 억압당했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겐 있었지만 히들러나 스탈린에겐 없었던 그것. 간접적 보호자란 학대받는 어린아이를 편드는 사람으로, 어린이 주변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될 수 있다. 간접적 보호자는 폭력에 노출된 아이에게 '너는 나쁜 아이가 아니며,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주고 자긍심을 갖게 한다.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우는 아이를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이유다. -82-83쪽

스포츠에서 쇼핑에 이르는 온갖 편의가 제공되어 그 자체로 자족적이고 폐쇄적이 되어버린 특권 계층의 프리바토피아(privatopia, 사적유토피아)는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된다. 특히 열린 공동체에서 자라날 권리가 있는 아이들이 공간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분리되어 같은 계급끼리 동질성을 키우는 한편, 다른 계급을 불관용으로 대하는 것이 우려된다. 부유층 전용 주거구역은 "다양한 문제가 산재한 세계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세대를 생산"하게 되므로, 사회의 불안전성을 높이고 도시를 상시적인 내전 상태로 몰아넣는다. 특권 계층은 자신의 재산 형성은 물론이고 온갖 문화적 향유와 재생산이 "이름 없는 하인들의 미등록 이주 및 노동과 분리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127쪽

정부나 기업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는 용역 연구나 연구비 지원을 염두에 두고 행해지는 전문가들의 연구는 거의 다 긍정을 위한 연구다. 전문가들은 '4대강의 경제 부양 효과'나 '막걸리가 성인병 예방에 미치는 좋은 영향'을 연구하지, 아무도 부정적인 효과나 영향을 입증하기 위한 연구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뉴스를 만들는 언론이나 전문가의 조언을 바라는 대중들 역시 부정보다 긍정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즉 언론은 논문의 질보다 선정성과 흥미를 더 높이 사면서, 과학상의 획기적인 발견이나 경제 효과를 과장한다. 마찬가지로 대중들은 듣기 싫거나 고려 사항이 많은 조언보다, 간결하면서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전문가를 좋아한다. -154-155쪽

한정된 의제를 가지고 다투기 때문에 정당들 간의 변별력이 상실되면서, 신념에 찬 카리스마형 지도자보다는 기득권이 다루기 좋은 탤런트형 지도자가 더 많은 표를 얻는 꼴불견은 현대 정치의 그늘이다. '정치적인 것'을 정당과 의회에만 국한하면, 정치는 발전하기보다 답보한다. -178쪽

헬렌 칼디코트는 [원자력은 아니다]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는다. "결국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은 개인의 결정이다. 그것은 당신의 방을 나갈 때 불을 끄고 밤에는 컴퓨터를 끄며 집을 단열하고, 겨울에는 더 많은 스웨터를 입고 집안의 열을 내리도록 조정하며, 여름에는 땀을 흘리더라도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에어컨을 끄고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희생과 책임감은 대다수 사람들이 동경하는 고상한 특성이다. 또한 이것들은 세계를 공정함과 지속적인 생존으로 이끄는 자질이기도 한다." 좋은 말이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인다. 헬렌 칼디코트가 권하는 저런 행동은 도덕적 개인이 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저런 행동은 개인의 도덕적 삶으로 수렴될 뿐 아니라, 오래 지속하면 필경엔 무수한 기업과 결탁한 정치엘리트를 향해 '너 그만해!'라고 소리칠 수 있는 덕(힘과 용기)으로 화한다. 내가 먼저 저렇게 해보지 않으면, 끝내 그런 말은, 목구멍에 막혀 나오지 않게 된다. 이게 중요하다. -195-196쪽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뛰어난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사안을 정확히 구분"하는 능력인데, 연산군은 능상의 척결을 자신의 욕망을 채울 자유로 곡해했다.

*(p214)연산군대의 조선왕조실록인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이 가장 많이 내뱉은 말 가운데 하나가 능상(凌上)이다.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뜻의 이말에는, 그만큼 대간들에 의해 왕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국왕의 열패감이 녹아 있다. 연산군은 부왕이 만들어 놓은 국왕.대신.삼사의 정치적 분립을 왕권의 퇴보이자 조정의 폐단으로 여겼다. -215쪽

가부장제가 전제된 대부분의 남녀 관계에서 남자는 가해자고 여자는 피해자다. 이때 남자는 자신의 죄책감을 벗기 위해, 일종의 반성문이거나 석명서를 쓰게 되는 데, 그것이 연애소설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남성이 연애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남성의 반성문이나 변명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사랑을 기억해야 할 사람은 여성이다. 연애 소설은 남성이 낳고 여성이 기른다. 그것을 통해 상처를 입힌 사람은 자신의 수치와 회환과 약점을 위장하고, 가해자로서의 자책감에서 벗어난다."-264쪽

저항적 지식인들은 항상 민중을 앞세우지만 서발턴은 항상 '지식인-저항엘리트'의 계도를 받거나 자신들과 통합되어야만 의미를 갖는 존재다. 그래서 민중이나 계급으로 회수되지 않는 서발턴은 충동적이고 무모한 부화뇌동자로 간주되며, 결정적인 시기에 운동 역량을 왜곡시키는 분열분자로 배척한다.

*(p350)서발턴(subaltern)은 하위(sub)와 타자(altern)가 결함된 조어로, 우리말로는 하층민. 하위 주체. 하위 집단 등으로 번역된다. -352쪽

새마을운동은 노인들이 마을의 어른 역할을 하던 전통적인 공동체질서를 완전히 전복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청. 장년층이 마을의 주도권을 쥐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던 농촌에까지 국가권력이 파고들게 된 것도 새마을운동의 성과로, 작중에 나오는 이장이 행한 역할이 그런 것이다. -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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