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바람을 쐬러 먼길을 다녀왔다. 바람이 분다. 맑은...

 

 

바람의 지문(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 行方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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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남자 :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이해해줘야 하지 않나?

 

-그여자 :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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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미친 짓이다 - 사랑에 대한 열여섯 가지 풍경
김훈.박범신.이윤기 외 13인 지음 / 섬앤섬 / 2007년 10월
구판절판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9쪽

"내 삶의 순간순간을 자연스럽게 선택할 때, 내가 내 삶의 가장 완벽한 주인일 때, 나는 가장 행복하다."-58쪽

세상에 질투 없는 사랑, 죄 없는 사랑, 두려움 없는 사랑, 번민 없는 사랑, 상처 없는 사랑, 이별 없는 사랑, 절망 없는 사랑이 있겠는가. 아, 매번 사랑을 쓰는 일은, 매번 사랑을 하는 일만큼이나 설레고 황홀하고 곤란하고 피로한 일이다.-97쪽

젊은 날, 나는 사랑을 가리켜 '고유명사'라고 했다. 유일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면 그 여자는 세상의 모든 여자들로부터 분리된다. 세상의 모든 여자 중 한 명이 아니라 세상엔 그 여자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다.-123쪽

그러나 여자와 지냈던 그 시간들을 사랑이라 말하지 못한다. 사랑은 같이 보낸 시간보다는 그 상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자와 지냈던 많은 시간들은 오히려 고독하고 쓸쓸했다. 가졌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여성의 외모였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포근한 살의 감촉과 체취, 영혼을 빼앗을 것 같은 눈매와 음성, 이를 감싸고 있는 여체의 아름다움을 갖고 싶었다. 여자는 강렬한 탐구 대상이었다. -174쪽

부부란 적당한 관계의 유격으로 사랑하고 미워하며 '따로 또 같이' 사는 것이었다. -180쪽

연애 예찬론자였던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연애란 그 사람의 우주를 덤으로 얻는 것이다. 광활안 우주에 궤도를 따랄 도는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친구의 가슴 속에는 우주처럼 수많은 별들이 떠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니, 수금지화목토천해명......., 가슴 속의 수많은 별들이라니.-211쪽

내가 그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爲君我在), 그대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君不爲我).-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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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당하는 채소의 기분은 어떨까...

계속해서 채소의 기분이 되어 책만 읽었다...

또한 바다표범과 키스한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바다표범 오일을 한 숟갈 떠 먹었을 때, 바다표범이 '억지로 입을 벌려 뜨뜻미지근한 입김과 함께 축축한 혀를 입안으로 쑥 밀어넣은(p154)' 것처럼 비렸다... 그 어떤 것을 먹어도 가시지 않는 맛이었다...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관계를 끊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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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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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에 "그런가?" 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하나하나의 채소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무심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그럴 때도 있다).-15쪽

무슨 일인가로 확 열이 받아도 그 자리에서는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고 한숨 돌렸다가 전후 사정을 파악한 뒤에 '이 정도라면 화내도 되겠어' 싶을 때 화를 내기로 했다. 이른바 '앵거 매니지먼트'다.-44쪽

사람을 신뢰하면서 신용하지 못하는 인생이란 것 역시 때로는 고독한 것이다. 그런 미묘한 틈, 괴리 같은 것이 통증을 초래하여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하는 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아, 이런 건 그냥 미트 굿바이잖아'라고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트 굿바이(meat goodbye) : 자이언트의 전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 씨는 근육이 파열된 것을 '미트 굿바이'라 불렀다고 한다.(p52)-55쪽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다음에 또'는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68쪽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하와이 바다에서 웅덩이 같은 곳을 헤엄쳐 지날 때였다. 그곳만 바닥이 움푹 깊어졌다. 물은 한없이 투명하고 정적 그 자체여서 마치 고층빌딩 틈새의 상공을 맨몸으로 떠다니고 있는 듯한 착각이 엄습했다. 고소공포가 있는 나는 앞이 캄캄하고 등이 오싹해지면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악마도, 깊고 푸른 바다도 어쩌면 바깥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한없이 깊은 해저의 웅덩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것은 늘 어딘가에서 잠재적으로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107쪽

아,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하면 수집(마음을 쏟는 대상)할 때의 문제는 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그걸 이해하고 사랑하는가, 그런 기억이 당신 안에 얼마나 선명히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진짜 의미 일 것이다. -123쪽

생각해보면 진짜로 상대를 싫어한다면 "네가 쓴 글이 싫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가진 않을 터다. 논리적으로 옳다. -131쪽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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