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보트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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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혼자 있는 것에는 익숙하다. 엄마가 주로 밤에 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딱 한 번, 낮에만 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상자 속이다. '상자 속'은 엄마와 나 사이에서만 통하는 말이고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일, 즐거운 일도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18-19쪽

하지만 모모이 선생님은 어떤 장소를 떠나지 않는 것과 어떤 장소에 녹아드는 것은 전혀 다르단다. -자네는 통 녹아들지 않는군. 선생님은 내게 종종 그렇게 말했다. 떠나지도 않거니와 녹아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쁜 일은 아니지만 때로 주위 사람들을 고독하게 한단다. -28쪽

한 번 만나고 나면, 사람은 사람을 잃지 않는다. 설령 그 사람과 같이 있지는 못 해도 그 사람이 여기 있다면, 하고 상상할 수는 있다. 그 사람이 있다면 뭐라고 할까. 그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큰 힘을 얻어왔다. 상상만 해도 용기가 끓어올라 생각한 일을 혼자서도 해 낼 수 있었다. -145쪽

겨울은 생물이 모두 잠자는 계절이다. 모모이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 초입에는 꼭 감기에 걸리는 체질인데도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했다. 겨울은 지혜와 문명이 요구되는 계절이라 그렇단다. 나는 계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나가는 데다 어차피 돌아오니까. 바깥세상은 제멋대로 변화한다.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203쪽

여름은 특별한 계절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보듬고 있는 기억, 그 하나하나가 불현듯 깨어나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불온하게 일렁이는 계절. 일요일. 런치 타임의 손님들이 한바탕 들이닥쳤다 간 후 카운터를 닦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창밖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린다. -218쪽

말은 위험한 것이라고 엄마는 말한다. 말이 마음을 건드렸다고 느끼면, 지금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다고 느끼면 그땐 이미 '게임 오버'라고 한다.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미술 선생님의 말은 정말 알기 쉽게 내 마음에 와 닿는다.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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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잡동사니'를 읽었다. 이사람 저사람들의 내밀한 욕망, 감정이 서로 얽히면서 모두 경계에 서있다. 다만 나하고 있을 때만이라도, 나를 알아주고, 나의 사람이었으면 모두가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을 모조리 가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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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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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아이를 보고 있구나." 토란 튀김을 포크로 찍으며 엄마가 말했다. "그러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필요 이상으로 정색했던 것을 후회하며 덧붙였다. "예쁘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자꾸 보게 돼. 왠지 눈길이 가고 마는걸." 엄마는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며 말했다. "바보 같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어?" 엄마는 샴페인을 물처럼 꿀꺽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질투잖아, 그거."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질투? 하지만 아직 어린애인걸, 말도 안 돼." "바로 그거야. 아이와 어른의 중간, 네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둘 다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밖에 가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생명력이 저 아이에게는 있으니까."-36-37쪽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지만, 엄마는 앞으로도 쭉 미우미의 엄마고, 아빠도 쭉 미우미의 아빠야." 그 말을 듣던 날의 일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I know.'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로 알고 있었다. 학교 수업에서도 배워 알고 있었고, 우리 반만 해도 부모가 이혼한 아이가 몇 명이나 있었다. 무엇보다, 아빠에게 그 말을 듣기 전부터 엄마가 수차례 그런 뜻을 비쳤다. 아빠랑 엄마가 이혼해도 상관없겠냐고 묻거나, 아빠나 엄마나 '순수하게' 마음 깊이 나를 소중히 생각한다고도 했다. 그 전부를, 나는 물론 알고 있었다. -120쪽

남편을 알기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다. 애인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훨씬 즐거웠다. 그때마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연애 관계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고지낼 수 있다면 애인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내 시간과 육체, 거짓 없는 말, 그리고 호의와 경의.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그 다섯 가지를 받고 만족하지 않는 남성은 없다. 그래서 남편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그 다섯 가지를 주고 남편에게서도 똑같은 것을 받았다. 고작 다섯 가지! 그것만으로 충분할, 고작 그 다섯 가지.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리라. 우리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낮이고 밤이고 몸을 섞고, 낮이고 밤이고 말을 섞고, 함께 살면서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아 더한 속박을 바라고 소유를 바라고 질투와 말다툼을 바랐다. 서로를 모조리 갖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존재를 바라고 그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공허함도 바랐다. 그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감미로움을 바라는 것과 거의 같은 크기로, 그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고통을 받았다. -160-161쪽

나는 다시 한 번 말하고 남편 목에 팔을 둘렀다. 볼과 볼을 대고 피부 냄새를 맡는다. 이제 몇 분 후면 남편은 나가버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장소로 가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곳에서의 남편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인격을 두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힘껏 남편을 끌어안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음번에 만났을 때 이 남자가 새롭게 나를 발견해주길 기도하면서.-224-225쪽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다가 문득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슈코 씨는 그때 아빠와 긴 '산책'을 나갔었다. 낮잠 잘 시간에 아빠 방에 놀러 오면 돼요. 내 말에 슈코 씨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럼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승마후, 덥고 먼지 많은 길에 앉아서. 그때 그 여자와, 지금 이렇게 하라 씨 옆에 있는 슈코 씨가 나로서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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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것, 그 일을 안다는 것, 또 서로를 안다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가까운 부모와의 관계조차도 많이 다르다. 소통의 방법도 다르고 표현의 방법도 다르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안다고 할 때도 나의 기대와는 여지없이 다르다...그러나 산다는 건 대동소이한 거 같다. 오십보 백보의 걸음으로 그렇게 목에 힘을 주고 기가 꺽이고 필요이상으로 모른 척하고, 포장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런데 자꾸 특별한 존재로 인식시키고 대우받고 싶다. 금방 드러날 일도 드러나기 전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고 아닌 척하고 싶다. 이게 내가 극복해야 할 일이다...이석원은 일상의 일을 담담히 기록했다. 이렇게 우린 보통의 존재로 살아가는 거 같다. 편안한 글이다. 특히 노랑색의 표지가 마음에 든다. 까칠한 종이의 질감도 좋다. 그런데 글의 내용에 보면(p259) '우선 나는 노란색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칠선녀가 나에겐 노란색이 '멸망의 색깔'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의 엄마의 믿음과 이석원의 믿음은 다르니까.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이 부르는 '가장 보통의 존재'의 가사를 음미하며. 봄날 저녁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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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달출판사입니다. 이번주 토요일 3시(8/10), 광화문교보에서 이석원 신작 장편소설<실내인간> 출간 기념 사인회 있답니다. 사인받으시면 이석원 작가님이 직접만든 책갈피와 <보통의존재>미니북도 드려요~ :) 꼭 오세요!
 
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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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아무하고나 잘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하고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손잡는 것이 좋다.-15쪽

스물 살이 넘어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모든 시공간이 정지한 채 오직 너와 나만이 존재하던 시간들. 그러나 더욱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내 마음이 멀어지는 걸 느끼던 순간이었다. 그때의 충격과 상실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종말의 순간은 너무 빨리 찾아왔고 그 어떤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었다. -23쪽

아무런 관리를 하지 않아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던 많은 것들이 어느새 너무 빨리 바닥을 보였다. 아무리 뛰어놀아도 지치지 않던 체력은 이십 대를 넘어서면서 단지 오 분 정도의 농구 게임을 뛰기에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고 무한대로 먹어도 소화에 문제가 없던 위장은 이제 밥 한 공기를 채 온전히 소화하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은 한순간에 이뤄지는 듯하지만 내 안의 많은 것들은 이미 사망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77-78쪽

다만 분명한 건 인생이란 사랑할 대상을 골라서 사랑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뿐.-98쪽

말이란 존재한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억될 뿐이다.
나를 황홀하게 했던 수많은 말들은 언제나
내 귀에 들려온 순간 사라져버렸다.
말이란 이처럼 존재와 동시에 소멸해버리기에
그토록 부질없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144쪽

바로 그 친구였다. 그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는데도 좋은 일이 생기니깐 이상하게 묘한 감정이 들더라는 것이다. 솔직히 난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알게 된 거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170쪽

어렸을 때, 왜 함께 사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미움을 사고 떨어져사는 자식들은 예쁨을 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새벽 두 시에 일어나서 소리를 내며 집안일을 하는 엄마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것.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커다란 볼륨으로 마루와 온 방 안의 티비를 켜놓은 채 생활하는 아버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182쪽

돌이켜보면 씁쓸한 것은 사람이 결혼하자고, 우리 같이 살자고 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제발 헤어졌으면 하는 마음보다 강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나가 되고 싶다고 눈이 멀어서 맹렬히 달려갔다가 나중에는 다시 혼자가 되고 싶어 더 무서운 속도로 돌아오는 것. 이게 사람의 이기심이란 것일까.-251쪽

문제는 역시나 연락이다. 뻔히 로밍이 되어 있는 걸 아는데도 문자 한 통 없다. '바빠서 그렇겠지.' 세상에 아무리 바쁜 사람도 문자 보낼 시간 몇 초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루가 지난다. 이틀이 지난다. 화가 난다. 그러나 역시 화는 이해로 가기 위한 노력에 의해 묻혀버린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너무 바빠서, 외국이라 힘들어서,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일들이 있을 거야. 나는 외국 출장 같은 것 한번도 가본 적 없으니까. 너무나 경황이 없겠지. 어쩌면 문자를 보냈는데 '거리가 멀어서' 늦게 오는 걸 수도 있고.' A의 노력은 끝없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것을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고자 하는 순수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이 보통의 존재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불과하다. -272쪽

돈을 모으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부족함이나 오해 없이 전달해서 관계를 유지하고 돈독하게 만드는 일, 또 누군가 나를 오해해서 싫어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거든요. -314쪽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하나둘 포기해야 하는 것이 그만큼 늘어남을 뜻하고 결국엔 그렇게 켜져가는 빈자리를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바로 어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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