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아무하고나 잘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하고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손잡는 것이 좋다.-15쪽
스물 살이 넘어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모든 시공간이 정지한 채 오직 너와 나만이 존재하던 시간들. 그러나 더욱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내 마음이 멀어지는 걸 느끼던 순간이었다. 그때의 충격과 상실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종말의 순간은 너무 빨리 찾아왔고 그 어떤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었다. -23쪽
아무런 관리를 하지 않아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던 많은 것들이 어느새 너무 빨리 바닥을 보였다. 아무리 뛰어놀아도 지치지 않던 체력은 이십 대를 넘어서면서 단지 오 분 정도의 농구 게임을 뛰기에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고 무한대로 먹어도 소화에 문제가 없던 위장은 이제 밥 한 공기를 채 온전히 소화하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은 한순간에 이뤄지는 듯하지만 내 안의 많은 것들은 이미 사망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77-78쪽
다만 분명한 건 인생이란 사랑할 대상을 골라서 사랑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뿐.-98쪽
말이란 존재한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억될 뿐이다. 나를 황홀하게 했던 수많은 말들은 언제나 내 귀에 들려온 순간 사라져버렸다. 말이란 이처럼 존재와 동시에 소멸해버리기에 그토록 부질없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144쪽
바로 그 친구였다. 그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는데도 좋은 일이 생기니깐 이상하게 묘한 감정이 들더라는 것이다. 솔직히 난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알게 된 거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170쪽
어렸을 때, 왜 함께 사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미움을 사고 떨어져사는 자식들은 예쁨을 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새벽 두 시에 일어나서 소리를 내며 집안일을 하는 엄마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것.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커다란 볼륨으로 마루와 온 방 안의 티비를 켜놓은 채 생활하는 아버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182쪽
돌이켜보면 씁쓸한 것은 사람이 결혼하자고, 우리 같이 살자고 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제발 헤어졌으면 하는 마음보다 강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나가 되고 싶다고 눈이 멀어서 맹렬히 달려갔다가 나중에는 다시 혼자가 되고 싶어 더 무서운 속도로 돌아오는 것. 이게 사람의 이기심이란 것일까.-251쪽
문제는 역시나 연락이다. 뻔히 로밍이 되어 있는 걸 아는데도 문자 한 통 없다. '바빠서 그렇겠지.' 세상에 아무리 바쁜 사람도 문자 보낼 시간 몇 초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루가 지난다. 이틀이 지난다. 화가 난다. 그러나 역시 화는 이해로 가기 위한 노력에 의해 묻혀버린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너무 바빠서, 외국이라 힘들어서,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일들이 있을 거야. 나는 외국 출장 같은 것 한번도 가본 적 없으니까. 너무나 경황이 없겠지. 어쩌면 문자를 보냈는데 '거리가 멀어서' 늦게 오는 걸 수도 있고.' A의 노력은 끝없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것을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고자 하는 순수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이 보통의 존재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불과하다. -272쪽
돈을 모으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부족함이나 오해 없이 전달해서 관계를 유지하고 돈독하게 만드는 일, 또 누군가 나를 오해해서 싫어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거든요. -314쪽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하나둘 포기해야 하는 것이 그만큼 늘어남을 뜻하고 결국엔 그렇게 켜져가는 빈자리를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바로 어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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