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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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격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모든 걸 가진 자에게서보다 거의 가진 게 없는 자에게서 더 잘 목격할 수 있는 가치이고, 모든 걸 가진 자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유일한 가치이고, 거의 가진 게 없는 자가 유일하게 잃기 싫은 마지막 가치이기 때문이다. (28쪽)


그러고 싶은 것에 대하여는 이것이 무엇보다 어렵고 그러기 싫은 것에 대하여는 이것이 무엇보다 쉽다. (84쪽)


변해가는 모든 모습에서 ‘예쁘다‘라는 말을 들어온 유일무이한 존재. (91쪽)


이것 없이는 이제 사랑도 하지 않는다. (109쪽)


모든 아름다움은 모든 권위보다 더 권위 있다. 진. 선. 미 가운데서 유일하게 생존한 인간의 덕목이다. 하지만 편파적이다. 여성의 진과 선은 아름다움의 지위를 얻지 못할 때가 많든 데 반해, 남성의 진과 선은 아름다움의 지위를 손쉽게 얻는다. (152쪽)


참말을 더 참말처럼 보이려고 지나친 애를 쓰다가 사용하게 되는 과장된 참말. (198쪽)


인간의 한 생은 ‘생‘일 수밖에 없다. 익지 않거나 익히지 않은, 엉뚱하고 공연한, 본디 그대로의, 지독하거나 혹독한 것일 수밖에 없는. (223쪽)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248쪽)


사람이 있어야 할 가장 좋은 자리. 사회적으로 높거나 낮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맥생에서 멀거나 가깝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누군가에게. (270쪽)


......인간의 사유와 인간의 말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지 책을 통해 목격하는 행위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328쪽)


가난함은 티가 나고 부유함은 티를 낸다. (365쪽)


폐가 될까 걱정하는 것이 사람다움이다. 폐가 폐라는 걸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폐가 된다. (373쪽)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한다. 눈에만 들어가지 않는다면. (3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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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필을 본 적은 있는가. 크루즈 광고, 사전편찬, 작가들, 테니스 대회, 카프카, 풍경, 사물과 사람, 심지어 갑각류까지, 모든 것을 대상으로 그 대상이 가진 모습과 성질의 내/외부를 이성적, 감정적, 총체적, 문화적, 현상적으로 아주 긴 각주까지 붙여서, 심지어 각주의 각주까지... 세밀하고 자세하게 집요하게 장대하게 월리스는 쓰고 있다. 단어들이 서로 연결되어 문장이 되어 하나의 풍경을 이루면서 몇 폭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어떤 대상을 마주하거나 상황에 처할 때 느끼는 감정을-나에게는 잡힐 듯하면서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느낌을-아주 솔직하게 신랄하게 정확하게 적합한 말로 집어낸다. 윌리스는 모든 감각이 퍼덕 생생히 살아있어 불에 데인 듯한 글로, 한계치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을 쉼없이 몰아부친, 그래서 또 다른 감각이 더 있어야 되는데,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말로하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더운 날이다. 아이가 태어나던 1994년 그때가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 이런 날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로 책 읽기를 권한다... 어쩌면 여름방학은 마지막일 수 있다... 잘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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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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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 호화 크루즈 여행에는 견딜 수 없이 슬픈 무언가가 있다. 견딜 수 없이 슬픈 것이 으례 그렇듯 이것은 정체를 파악하기는 엄청나게 어렵고 원인은 복잡하지만 결과는 단순한 듯하다. 그 결과란, 내가 네이디어 호에서-특히 밤에, 배의 놀이 활동과 안심과 즐거운 소음이 다 그친 뒤에-절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워낙 남용되어 이제는 진부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지한 다어이고, 나는 지금 이 단어를 진지한 의미로 쓰고 있다. 내게 절망이란 다음 두 가지의 혼합을 뜻하는 말이다. 죽음에 대해 이상한 갈망, 그리고 나 자신의 시시함과 쓸모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에서 비롯한 죽음에 대한 공포, 어쩌면 이것은 사람들의 불안이나 고뇌라고 말하는 기분과 비숫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같지 않다. 최소한 정확히 같지는 않다. 절망은 내가 참으로 작고 약하고 이기적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죽고 싶은 것에 가깝다. 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다. (27-28쪽)

예술인 척하는 광고는-아무리 훌륭하더라고-말하자면 당신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따스하게 미소 짓는 사람과 같다. 이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은 그런 부정직이 우리에게 미치는 누적적 영향이다. 진정한 선의 없이 선의의 완벽한 복사물이나 모조품만을 제공하는 그런 것을 자주 접하면, 우리는 차츰 혼란스러워져서 나중에는 진실된 미소와 진짜 예술과 진정한 선의마저 경계하는 태도로 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우리에게 혼롼과 외로움과 무력함과 분노와 두려움을 안긴다. 절망을 일으킨다. (71쪽)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면, 집주인이 당신을 배회하거나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살림살이의 청력이나 질서에 관한 사적인 편집증에 따라 그러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당신도 통찰하게 된고... 이것은 곧 청소의 궁극적 요지와 목적이 당신이 아니라 청결과 질서이므로 집중에게는 당신이 떠나는 것이 한숨 돌리는 일이라는 뜻이다. (87쪽)

셀레브리티 홍보물의 어두운 핵심에는 거짓말이 있었고, 우리는 이제야 그 정체를 제대로 간과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거짓된 홍보물의 약속이야말로-즉, 내 안의 늘 무분별하게 원하는 부분을 만족시켜주겠다는 약속이야말로-홍보물이 판매하는 환상의 핵심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때 진정한 환상은 그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애초에 그 약속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이라고 믿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 거짓말, 이것은 거대한 거짓말이다. (114쪽)

학생들이 카프카의 유머를 ‘해득하지get‘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유머란 ‘획득하는get‘ 것이라고 가르쳐온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란 ‘갖는have‘ 것이라고 가프쳐온 것어럼 말입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카프타의 농담에서 진정한 핵심을 음미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 핵심이란 이것입니다. 인간이 자아를 구축하고자 지독하게 분투한 결과는 그 지독한 분투로부터 떼려야 땔 수 없는 인간성을 지닌 자아라는 것. 우리가 집을 향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여정을 밝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사실은 우리의 집이라는 것. 이런 것을 말로 풀어서 칠판에 적기는 어렵습니다. 정말입니다. (179-180쪽)

차라리 학생들에게 너희가 카프카를 ‘이해하지get‘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말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학생들에게 카프카의 모든 이야기를 일종의 문으로 상상해보라고 요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문에 다가가서 두드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우리는 점점 더 세게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데, 그냥 들어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꼭 들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정확히 그 절박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문으로 꼭 들어가야 한다는 필사적인 절박함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문을 두드리고 들이받고 찬다고. 그러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데.... 문이 바깥쪽으로 열린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내내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곳에 그동안 내내 들어 있었던 거라고. (180-181쪽)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사전에서 기대하는 것은 권위 있는 지침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단어가 사전에 들어가야 할지, 어떤 단어와 철자와 발음은 함량 미달이거나 부정확한지 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좀처럼 생각해보지 않는다. 무엇은 괜찮고 무엇은 아닌지를 결정하는 사전 편찬자의 권위는 어디서 나올까? 우리가 그들을 선출해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단순하게 선례나 전통에만 호소해서는 통하지 않는다. 무엇이 정확한 언어로 여겨지는가 하는 문제는 시간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197-198쪽)

우리가 특정 어휘를 사용하는 동기에는 자신에 관한 정보를 소통하려는 욕망이 어느 정도 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유행어가 그렇듯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도 사실은 주로 화자의 미덕을-양심적인 평등주의, 모든 사람의 존엄에 대한 관심, 언어의 정치적 함의를 아는 세련됨 등을-알리고 칭송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새롭게 명명된 개인이나 집단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 더 도움이 된다. (259쪽)

우리가 감각 있는 생물체를 그저 우리의 미각적 즐거움을 위해서 산 채로 삶아도 괜찮을까? 관련된 고민이 더 있다. 앞선 질문은 혹 짜증스럽도록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올바르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일까? 이 맥락에서 ‘괜찮다‘는 것이 어떤 뜻일까? 이런 것이 모두 개인적 선택의 문제일 뿐일까? (317-318쪽)

‘좋은good‘이라는 형용사가 뜻하는 바가 정말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그리고 이런 질문은 워낙 깊고 위험한 바다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에, 공개적인 토론은 여기서 그만 접는 것이 최선이리라. 이해와 관심이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물을 수 있는 질문에는 한계란 것이 있는 법이니까. (335쪽)

우리의 진지한 소설들의 진지하지 못함을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할까? 문화? 비웃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만약 도덕적으로 열정적이고 열정적으로 도덕적인 소설이 그와 동시에 독창적이면서도 아름답도록 인간적이기까지 한다면, 감히 비웃지 않을(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어떻게 만들까? 어떻게-오늘날의 작가가, 제아무리 재능 있는 작라라도-그것을 시도할 배짱이라도 부릴 수 있을까? 확실한 공식이나 약속은 없다. 하지만 본보기는 있다. 프랭크의 전기는 바로 그런 본보기 하나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정말로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369쪽)

천재성은 복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감은 전염되고, 그것도 여러 형태로 전염된다. 그리고 힘과 공격성이 아름다움 앞에서 취약해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감을 느끼고(필멸하는 인간의 덧없는 방식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407쪽)

그런데 대중문화가 우리에게 교묘하게 얻어내려는 것은 우리의 충성심만이 아니라 관심 그 자체이므로, 우리는 관심을 생필품 같은 것으로, 힘의 척도로 여긴다. 관심을 즐까 말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천부적 권리로 여기는 즐거울 관리도 마찬가지다. 설령 즐겁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극은 받아야 한다. 흥미롭기만 하다면, 불쾌한 것도 완벽하게 괜찮다.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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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동안 당연하게 남자의 몸과 마음에 박혀 있는 편견, 왜곡은 문화, 교육, 상황등에서 근거하고, 그러한 부분이 단단하고 견고하게 된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고 허용한 일이다. 특히, 남자는 여자와 동등한 입장이 처음부터 아니다, 아예 '경쟁이 안 되니까요(182쪽)'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를 고민하자면 굉장히 많은 부분이 얽혀 있다.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서, 동등하게 새롭게 바라봐야 할 여자에게 권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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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 - 예술, 성 그리고 마음을 바라보는 시선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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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지각은 문맥을 통해 암호화되고, 문맥의 암호화는 외면의 환경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안의 심리적.생리적 현실이 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화가의 이름이 붙으면 그림이 훨씬 더 좋아 보이는‘ 이유이다. (44쪽)

우리는 사실에 입각한 외부의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정립된 패턴들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능동적으로 창출한다. 이런 학습된 패턴은 자동적이다 못해 무의식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동반해 미술작품에 접근한다. 자아들과 과거들, 여기에는 우리의 민감한 감수성과 명민한 지성뿐 아니라 편견과 맹점도 포함된다. (54쪽)

상징은 실제가 아니다. 재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고 읽을 때 우리 안에 살아있다. 그 상징은 우리가 된다. 우리 세포의 일부를 구성하고, 우리 몸과 뇌의 일부가 된다. 기억 속에서 계속 삶을 이어가다가, 가끔은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기이한 뇌회를 통해 또 다른 예술작품이 된다. (70쪽)

대형 평면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몸들은 무대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몸들이 관객에게 미치는 효과를 내지 못한다. 영화는 인간의 몸을 추상화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멀찌감치 거리를 두게 만든다. (100쪽)

성적 자아의 충족과 평범한 일상적 자아의 충족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 이유는 고도의 에로틱한 쾌감은 자아의 상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143쪽)

최고의 픽션은 자아를 떠나 타자에게로 소풍을 떠나는 특별한 경험이다. 그 어떤 여행보다도 ‘사실적‘이고 혁명적인 잠재력을 지닌 여행 양식이다. 그리고 타자성을 지향하는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려면, 섹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타자에게 열려야 하고 감정적 위험부담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166쪽)

"여성은 착해야 한다는 처방은 곧 여성이 수행능력을 착함으로 중화하지 않으면 벌을 줘야 한다는 암묵적 믿음이다." 여성들은 인정받기 위해 착하게 굴면서 힘과 야망을 상쇄해야만 한다. 반면 남자들은 여자들만큼 착하게 굴 필요가 없다. (177쪽)

언어에는 속속들이 권력관계가 배어들어 있다. 말의 본성이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은 또한 우리의 사적이고 정신적인 지형에 등장하고 그 의미는 개인적으로 암호화된다. (226쪽)

글쓰기는 내면에서 외면으로의 전이가 인식되는 것이고 그 움직임은 그 자체로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행위이다. 눈에 보이는 대화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통과의례라는 말이다. 또한 글쓰기는 언제나 누군가를 위한 행위이다. 글쓰기는 나와 당신의 담론이라는 축에서 발생한다. (236쪽)

아무튼 두 사람 사이에 반복되는 상담 치료는 미지의 사실을 파헤쳐 기지의 조명 속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다. 그것은 분면 기억하기의 일환이지만, 그중에서도 감정을 담은 기억하기, 혹은 감정에 대한 기억하기이다. 드러나는 기억들은 정확할 필요도 없고, 다큐멘터리적인 의미에서 말 그대로 진실일 필요도 없다. 우리가 가진 자전적 기억들이 얼마나 신빙성 없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261쪽)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계속해서 다른 여러 종류의 전이와 역전이에 사로잡힌다. 내가 어떤 사람을 위협적이거나 혐오스럽거나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내 안에 내 기억에서 도출된 어떤 특질이 있고, 그것이 내가 개인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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