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 호화 크루즈 여행에는 견딜 수 없이 슬픈 무언가가 있다. 견딜 수 없이 슬픈 것이 으례 그렇듯 이것은 정체를 파악하기는 엄청나게 어렵고 원인은 복잡하지만 결과는 단순한 듯하다. 그 결과란, 내가 네이디어 호에서-특히 밤에, 배의 놀이 활동과 안심과 즐거운 소음이 다 그친 뒤에-절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워낙 남용되어 이제는 진부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지한 다어이고, 나는 지금 이 단어를 진지한 의미로 쓰고 있다. 내게 절망이란 다음 두 가지의 혼합을 뜻하는 말이다. 죽음에 대해 이상한 갈망, 그리고 나 자신의 시시함과 쓸모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에서 비롯한 죽음에 대한 공포, 어쩌면 이것은 사람들의 불안이나 고뇌라고 말하는 기분과 비숫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같지 않다. 최소한 정확히 같지는 않다. 절망은 내가 참으로 작고 약하고 이기적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죽고 싶은 것에 가깝다. 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다. (27-28쪽)
예술인 척하는 광고는-아무리 훌륭하더라고-말하자면 당신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따스하게 미소 짓는 사람과 같다. 이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은 그런 부정직이 우리에게 미치는 누적적 영향이다. 진정한 선의 없이 선의의 완벽한 복사물이나 모조품만을 제공하는 그런 것을 자주 접하면, 우리는 차츰 혼란스러워져서 나중에는 진실된 미소와 진짜 예술과 진정한 선의마저 경계하는 태도로 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우리에게 혼롼과 외로움과 무력함과 분노와 두려움을 안긴다. 절망을 일으킨다. (71쪽)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면, 집주인이 당신을 배회하거나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살림살이의 청력이나 질서에 관한 사적인 편집증에 따라 그러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당신도 통찰하게 된고... 이것은 곧 청소의 궁극적 요지와 목적이 당신이 아니라 청결과 질서이므로 집중에게는 당신이 떠나는 것이 한숨 돌리는 일이라는 뜻이다. (87쪽)
셀레브리티 홍보물의 어두운 핵심에는 거짓말이 있었고, 우리는 이제야 그 정체를 제대로 간과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거짓된 홍보물의 약속이야말로-즉, 내 안의 늘 무분별하게 원하는 부분을 만족시켜주겠다는 약속이야말로-홍보물이 판매하는 환상의 핵심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때 진정한 환상은 그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애초에 그 약속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이라고 믿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 거짓말, 이것은 거대한 거짓말이다. (114쪽)
학생들이 카프카의 유머를 ‘해득하지get‘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유머란 ‘획득하는get‘ 것이라고 가르쳐온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란 ‘갖는have‘ 것이라고 가프쳐온 것어럼 말입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카프타의 농담에서 진정한 핵심을 음미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 핵심이란 이것입니다. 인간이 자아를 구축하고자 지독하게 분투한 결과는 그 지독한 분투로부터 떼려야 땔 수 없는 인간성을 지닌 자아라는 것. 우리가 집을 향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여정을 밝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사실은 우리의 집이라는 것. 이런 것을 말로 풀어서 칠판에 적기는 어렵습니다. 정말입니다. (179-180쪽)
차라리 학생들에게 너희가 카프카를 ‘이해하지get‘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말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학생들에게 카프카의 모든 이야기를 일종의 문으로 상상해보라고 요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문에 다가가서 두드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우리는 점점 더 세게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데, 그냥 들어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꼭 들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정확히 그 절박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문으로 꼭 들어가야 한다는 필사적인 절박함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문을 두드리고 들이받고 찬다고. 그러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데.... 문이 바깥쪽으로 열린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내내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곳에 그동안 내내 들어 있었던 거라고. (180-181쪽)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사전에서 기대하는 것은 권위 있는 지침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단어가 사전에 들어가야 할지, 어떤 단어와 철자와 발음은 함량 미달이거나 부정확한지 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좀처럼 생각해보지 않는다. 무엇은 괜찮고 무엇은 아닌지를 결정하는 사전 편찬자의 권위는 어디서 나올까? 우리가 그들을 선출해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단순하게 선례나 전통에만 호소해서는 통하지 않는다. 무엇이 정확한 언어로 여겨지는가 하는 문제는 시간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197-198쪽)
우리가 특정 어휘를 사용하는 동기에는 자신에 관한 정보를 소통하려는 욕망이 어느 정도 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유행어가 그렇듯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도 사실은 주로 화자의 미덕을-양심적인 평등주의, 모든 사람의 존엄에 대한 관심, 언어의 정치적 함의를 아는 세련됨 등을-알리고 칭송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새롭게 명명된 개인이나 집단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 더 도움이 된다. (259쪽)
우리가 감각 있는 생물체를 그저 우리의 미각적 즐거움을 위해서 산 채로 삶아도 괜찮을까? 관련된 고민이 더 있다. 앞선 질문은 혹 짜증스럽도록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올바르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일까? 이 맥락에서 ‘괜찮다‘는 것이 어떤 뜻일까? 이런 것이 모두 개인적 선택의 문제일 뿐일까? (317-318쪽)
‘좋은good‘이라는 형용사가 뜻하는 바가 정말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그리고 이런 질문은 워낙 깊고 위험한 바다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에, 공개적인 토론은 여기서 그만 접는 것이 최선이리라. 이해와 관심이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물을 수 있는 질문에는 한계란 것이 있는 법이니까. (335쪽)
우리의 진지한 소설들의 진지하지 못함을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할까? 문화? 비웃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만약 도덕적으로 열정적이고 열정적으로 도덕적인 소설이 그와 동시에 독창적이면서도 아름답도록 인간적이기까지 한다면, 감히 비웃지 않을(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어떻게 만들까? 어떻게-오늘날의 작가가, 제아무리 재능 있는 작라라도-그것을 시도할 배짱이라도 부릴 수 있을까? 확실한 공식이나 약속은 없다. 하지만 본보기는 있다. 프랭크의 전기는 바로 그런 본보기 하나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정말로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369쪽)
천재성은 복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감은 전염되고, 그것도 여러 형태로 전염된다. 그리고 힘과 공격성이 아름다움 앞에서 취약해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감을 느끼고(필멸하는 인간의 덧없는 방식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407쪽)
그런데 대중문화가 우리에게 교묘하게 얻어내려는 것은 우리의 충성심만이 아니라 관심 그 자체이므로, 우리는 관심을 생필품 같은 것으로, 힘의 척도로 여긴다. 관심을 즐까 말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천부적 권리로 여기는 즐거울 관리도 마찬가지다. 설령 즐겁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극은 받아야 한다. 흥미롭기만 하다면, 불쾌한 것도 완벽하게 괜찮다.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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