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나, 하늘은 꿀꿀하고, 실내는 온기가 없다.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재채기가 쉬지 않고 나오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모두 다 놓아버리고 집에 빨리 오고 싶었다. 다운이다. 꽃이나 화분이라도 사고 싶은 데...향수라도 살까.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자신의 욕구를 인정받지 못할 때 고통을 느낀다.-9쪽
나의 특수한 욕구와 타인의 특수한 욕구가 서로 자기중심적으로 작동하고, 서로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면, 욕구들 간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33쪽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싸움을 통해 자유를 획득하고 타인에게서 인정받으려고 할 때 작용하는 '자유에 대한 자각'은 '자기의식에 대한 자각'과 같은 지평에 놓여있다. 인간이 참다운 정신성에 도달하는 것은 '자유'와 자유를 자각하는 '자기의식'을 정립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자신의 자기의식)의 자유가 박탈당하거나 타인(다른 자기의식)의 자유를 박탈하는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그로 인한 고통도 끊임없이 생겨난다.-53쪽
상호인정은, 내가 나 자신의 특수성을 지양하고 타인 속에서 자신을 직관함으로써 그리고 타인 또한 타인의 특수성을 지양하고 나 속에서 자신을 직관함으로써 '보편성'을 정립하는 것이다.-70쪽
이렇게 타자 속에서 나를 직관할 수 있을 때, 타자는 나의 밖의 타자가 아니라 내 안의 타자가 되는 것이다. 타자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타자 속에서 무한성을 파악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 무한성을 열어놓고 나 속에서 무한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타자에게 나의 모든 것을 개방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에게 나의 모든 것을 개방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삶은 나에게 모든 것을 개방할 수 있는 정신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93쪽
마음이 괜히 조급해진다. 날씨가 화창하여, 꼭 어디라도 가야 될 거 같고, 가야만 되는 생각이 마구 난다. 딱히 갈데도 없고, 가야만 할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조금씩 들뜨고 있다.
"진짜 증명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지. 틀리지도 않아도 너저분하고 짜증나는 증명도 얼마든지 있어. 알겠나? 왜 별이 아름다운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수학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곤란한 일이지만 말이야."-26쪽
220: 1+2+4+5+10+11+20+22+44+55+110=284220: 142+71+4+2+1: 284"정답이야. 자 보라구. 이 멋진 일련의 수를 말이야. 220의 약수의 합은 284. 284의 약수의 합은 220. 바로 우애수야. 쉬 존재하지 않는 쌍이지. 페르마도 데카르트도 겨우 한 쌍씩밖에 발견하지 못했어.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 아름답지 않은가? 자네 생일과 내 손목시계에 새겨진 숫자가 이렇게 멋진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니."-30쪽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껴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41쪽
나는 소수의 매력은 그것이 어떤 질서 속에서 출현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1과 자기 자신밖에는 약수가 없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면서도 각각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수가 커지만 커질수록 찾아내기 힘든 것은 분명한데, 어떤 규칙에 따라 그들의 출현을 예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무질서가 완벽한 미인을 추구하는 박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었다.-89쪽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164쪽
e와 ㅠ와 i를 곱한 수로 거듭제곱하여 1을 더하면 0이 된다.나는 다시 한 번 박사의 메로를 쳐다보았다. 한없이 순환하는 수와,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수가 간결한 궤적을 그리며 한 점에 착지한다. 어디에도 원은 없는데 하늘에서 ㅠ가 e곁으로 내려와 수줍음 많은 i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고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ㅠ(파이) -180쪽
"그러나 0의 경이로움은 기호나 기준일 뿐만 아니라, 명실상부한 숫자라는 점에 있어. 가장 적은 자연수 1보다 1만큼 작은 수, 그것이 바로 0이지. 0이 등장했다고 해서 계산 규칙의 통일성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어. 아니 오히려 질서가 견고해지지, 모순도 없어지고 말이야. 자, 한번 상상해봐. 나뭇가지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고운 소리로 지저귀는 새야. 부리는 귀엽고 날개에는 예쁜 무늬가 있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순간, 새는 놀라 날아가 버리지. 나뭇가지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그저 마른 잎이 흔들리 뿐."-202쪽
"1-1=0 아름답지 않나?"-203쪽
나는 언제나 답을 얻으려는 욕구가 있었던 거지. 대답을 듣지 못하면서 누구와 대화를 하겠니?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답을 얻지 않으면서 이야기한다는 걸 믿어야 할 것 같구나.-30쪽
마치 인물들의 내면을 훤하게 꿰어보는 것처럼,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표정과 분위기가 아주 묘하고 매혹적이었지. 그들의 가슴속엔 깊은 우물이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 슬픔의 심연속에서도 잔잔한 기쁨이 동심원을 그리고, 생의 고단과 우수와 권태와 관조와 비애가 공기처럼 흐르고 있는 듯하거든. 길다랗고 가는 목에 처진 어깨, 살짝 꼰 고개, 긴 얼굴..... 얼마나 슬프고도 애틋한 모습이니.-94-95쪽
나는 행복한 그녀의 얼굴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그림에 빠져들어 마치 내가 키스를 받고 있는 듯하다. 온몸이 버터가 녹는 듯 녹아 흐르는 것 같다. -117쪽
당신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너무도 환한 햇빛이나 또 밤의 전등빛을 받고 있는 고독한 건물 벽이나 방 안의 사물, 인물들의 침묵이 그대로 느껴질지 몰라요. 하이라이트를 받고 있는 인물의 내면에서 뜨겁게 끓고 있으나 내뱉지 못한 먹먹한 슬픔이 전해져 올 거예요.-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