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오다. 드라이브가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멋진 드라이브코스로 추천되고 있는 농다치고개는 안개로 자욱했다. 중미산휴양림 산책로에서 살짝 내렸다. 오가는 길에 마주친 곳에서, 사람마다 밑줄긋기가 굉장히 다르구나를 느꼈다. 그녀가 그어놓은 내용은 읽기가 버거웠다. 내가 외롭고 헛헛할 때, 내가 포기하고 싶을 때, 내가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내 영혼에 보습이 필요할 때, 내가 밑줄긋고 싶은 시간, 장소, 사람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썸네일    썸네일   썸네일   은행나무

이름 : 은행나무,  나이 : 약1,100~1,500살,  키 : 42m, 허리둘레 : 14m, 사는곳 : 양평군 용문사내/ 은행나무 앞에서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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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여자 - 떠남과 돌아옴, 출장길에서 마주친 책이야기
성수선 지음 / 엘도라도 / 2009년 7월
품절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그 사람과 함께 먹고 싶다면, 그 마음이 간절하다면 분명히 사랑을 하고 있는 거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 궁금하다면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 사랑을 확인하는 리트머스종이, 그게 바로 맛있는 음식이니까.-17쪽

고흐는 수많은 절망을 딛고 일어나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고흐가 불멸의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생계조차 꾸리기 힘든 가난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함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렸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데생을 배우는 대신 밀레의 그림들을 모사하여 독학으로 기초를 다지고 하루종일 지칠 정도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고흐가 자신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칭했던 밀레는 "그림에 모든 것을 다 걸었다"고 말했고, 고흐는 밀레의 그림뿐 아니라 그의 철학과 인생을 예술의 길잡이로 여겼다. -114쪽

... 나도 돌이켜보니 내가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진심을 이용한 적이 많았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사귈 생각도 없으면서 술 취하면 콜택시를 부르듯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고, 같이 밥 먹을 사람 없어도 전화하고, 주말에 약속 펑크나면 전화하고, 우울하면 술 한잔 하자고 불러내고...... 내가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사귈 생각도 없는 남자를 스페어타이어처럼 묶어두고 다녔다. 그것도 몇 번이나, 난 그들을 '희망고문'했다. -154쪽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온갖 바쁜 척은 혼자 다 하며 가족한테, 친구한테 전화가 오면 "미안, 지금 바빠서 그러는데 이따 전화할게"하고는 툭하면 잊어버리는 나는 지금도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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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긋불긋한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린다. 20년 동안 뉴욕의 가난한 작가와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위치한 마크스 서점상이 주고 받은 편지를 읽었다. 기다림과 절실함이 묻어나는 소포에서, 막 튀어나온 책을 받자마자 펼쳐든 여작가의 마음과 아울러 원하는 책을 깔끔하고 아름답게 보내주고, 필요한지 기다려주는 훈훈한 고서적상의 인정, 책을 통한 서로의 소소한 일상과 우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마음까지 불어오면, 못부친 편지들이 기억난다. 요즘도 편지쓰는 사람이 있을까. 까마득한 기억이다.     

"프랭크 도엘 씨,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우두커니 앉아 빈둥거리고 있나요? 리 헌트는 어디 있어요? 옥스퍼드 운문은요? 불가타 성서와 귀여운 바보 존 헨리는 또 어디 있고요? 이 책들이 사순절 독서로는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보내주지 않는군요.(p22)", "나무늘보씨, 당신이 뭐든 읽을 것을 보내주기 전에 여기서 썩어 죽을지도 모르겠어요.(p73)", "친애하는 헬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지난 편지에서 요청한 세권이 일제히 당신한테 가고 있습니다.(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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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구판절판


소중한 친구야-
디킨스 책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고색창연한 멋쟁이 서점이더구나. 직접 와서 보면 너도 완전히 넋을 잃을 거야. 외부에 진열대가 있길래 우선 발길을 멈추고 이것저것 들쳐 보면서 꾸경꾼 태세를 갖추고 나서 방랑을 시작했지. 안은 어둑어둑해서 눈에 보이기 전에 냄새가 먼저 손님을 반기더구나. 참 기분 좋은 냄새야.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먼지와 곰팡이와 세월의 냄새에, 바닥과 벽의 나무 냄새가 얽히고설킨 냄새라고 하면 될까......-52쪽

저는 봄마다 책을 정리해서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은 못 입는 옷을 버리듯이 내버려요. 모두들 큰 충격을 받징. 제 친구들은 책이라면 별나게 구는 사람들이거든요. 이 친구들은 베스트셀러는 뭐든 다 가져다가 최대한 한 빠른 속도로 끝내버려요. 건너뛰는 데가 많을 거다, 하는 게 제 생각이죠. 그러고는 뭐든 두 번 다시 읽지 않으니 1년쯤 지나면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하지요. 그러는 사람들이 정작 제가 책 한 권 쓰레기통에 던지거나 누구한테 주는 걸 보면 펄펄 뛰는 거예요. -88쪽

이건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으로는 불공평하다고 봐요. 제가 보낸 것은 일주일이면 싹 먹어치우고 설날이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제가 받은 것은 죽는 날까지 간직했다가 누군가 그것을 아껴줄 이에게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그런 선물이잖아요. 저는 앞으로 태어날 애서가들을 위하여 최고의 구절들마다 연필로 살그머니 표시를 남겨둘 생각이에요.-91쪽

헤밍웨이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7세기 존 던의 설교문을 모태로 태어났다. 인용문은 이 설교문의 한 구절이다.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서 온전한 하나의 섬은 아닐지니, 무릇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요.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한 줌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지며, 작은 곶 하나가 그리 되어도 그대 벗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되어도 마찬가지어라. 그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축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좋은 울리나-이를 알고저 사람을 보내지는 말지어다.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여 울리기에....."-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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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재미있다. 재미있기에 오래동안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배운다. '간접적 보호자'는 나의 직업과 관련이 있고, 인권을 정치적으로 만 보아온 시각을 '사회권'으로 바꾸어 주고, 객관적인 때와 주관적일 때의 한없는 차이도 알려준다. 저자가 말하는 부분과 저자가 읽은 책이 말하는 부분의 경계선에서 사실(fact)을 제하고는 얼마든지 동심원을 그려나갈 수 있다. 감정적일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 책읽기가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면야 굳이 시간을 들여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공감도 하고 부정도 한다.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안에 쾌락이 있기 때문이다.'는 장정일의 말에 감히 동의한다. 읽은 책의 권수와 쓴 글의 크기와 길이와는 비례하지는 않겠지라는 바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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