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일시품절


머릿속에서는 자존심과 이성 간에 한판 싸움이 벌어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은 이성이 승리했다. 찬장에서 꽃병을 꺼내 물을 채운 뒤 아내가 들고 온 꽃을 꽂았다. 그리고 수납장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 개가 현관 복도에 남긴 흔적을 치웠다. 어찌 됐든 아내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30쪽

인생은 그렇게 순식간에 바뀐다. 잘못 디딘 한 걸음, 잘못된 사람과의 잘못된 만남, 그러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뭘 원한 걸까? -58쪽

대장간의 열린 문틈으로 코지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통화를 하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몸짓과 웃는 얼굴이 그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왜 저렇게 숨어서 통화를 하는 거지? 보덴슈타인은 아내가 자신을 알아차리기 전에 재빨리 그 자리를 떴다. 마음속에서 의심이 고개를 쳐드는 게 느껴졌다. 보일 듯 말 듯한 아주 작은 가시 하나가 심장에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89쪽

의심이 결혼 생활을 파탄내기 전에 어서 이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지금 당장 어깨를 흔들어 깨워 왜 나를 속였느냐고 따져야 옳다. 그러나 불화를 싫어하는 비겁한 마음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막았다. -167-168쪽

불현듯 그녀가 자신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있을 때 항상 느꼈던 자격지심이 되살아났다. 만신창이 낯짝에 닳고 닳은 싸구려 가죽점퍼를 걸친 자신이 마치 부랑자 같았다. 그냥 갈까?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248-249쪽

문득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랫동안 혼자일 것이다. 낙엽이 흩날일 때면 어수선한 마음을 부여잡고 나무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홀로 버려졌다는 느낌이 사나운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딘가로 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325쪽

그녀의 말이 이어졌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미 다 나왔다. 그녀의 마음은 오래전에 그를 떠났다. 그들이 함께한 오랜 세월을 깨끗이 털러버린 것이다. 사실 그는 마음 한구석으로 그녀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지난 세월, 그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이 둘 사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마치 수프에 넣는 소금처럼. 그러나 이제는 서로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아팠다. -427쪽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끔찍한 소식을 너무 많이 들어서 마음속에 더이상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물이 가득 새어 들어온 배를 가라앉히지 않으려고 마지막 방수 분리벽을 닫아놓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4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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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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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달릴 때는 가까운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 빨리 달리면 뒤섞여 있는 것들이 또 뒤섞인다. 속도로 주변의 사물을 뒤섞는 것도 있다. 시간 같은 것, 자동차 같은 것, 혜성 같은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그와 같은 것.-10쪽

한순간 그의 얼굴은 웃음 짓는 분칠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승부를 해오면서 희로애락을 초월한, 아니 희로애락을 철저하게 감추는 데 익숙해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100쪽

"충이나 효라 카는 기 꼭 젊은 아들한테마 안 통하는 기 아이라. 요새는 늙은이들도 그런 이야기는 싫어해. 돈하고 술하고 놀음이라는 말만 들으마 심봉사맨쿠로 눈을 번쩍 떠면서. 뭐 시속이 나쁘다는 기 아이고 역사를 자세히 보마 그 속에 있는 사람들한테서 한 분은 들어볼 진리가 있으이. 사람다움이라는 기 뭐냐. 그때 자기가 꼭 안 해도 되는데 나서게 하는 힘이 뭐냐. 이런 걸 어렵고 까시롭기 여길 거 없다."
"요새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도 싫어해요. 손가락 끝하고 눈꺼풀하고 입만 움직이려고 하는걸요. 아, 혀도, 끝만."-198쪽

친척이 있다는 것도 재산이다. 물론 그는 친척이 없다. 이 분야에도 가난이 그에게 적용된다.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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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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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우리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불어넣지만 질병은 놀랍게도 그러한 확실성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다.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순간순간을 참고 이겨내는 것이 다였다. -20쪽

대개 생존은 특정한 목표, 관계, 믿음, 또는 가능성의 언저리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희망 같은 것에 의존한다. 혹은 그것들보다 더욱 덧없는 어떤 것, 어쩌면 뚫고 지나갈 수 없을 것처엄 보이는 단단한 유리창을 통과해서 담요를 따뜻하게 덥히는 햇살,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두터운 담벼락 너머로 커다랗게 들리는 바람소리 같은 것 덕분에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지도 모른다.-29-30쪽

시간이 많으면 많은 대로, 반대로 시간이 적으면 적은 대로 우리는 시간의 인질이다. 사람에 따라 하루에 몇 분, 혹은 몇 시간을 더 살거나 덜 살 수는 없다. 모두 똑같은 시간을 산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병이 난 뒤로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아서 그야말로 시간 속에 파묻혀 있다고 느꼈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은 산처럼 쌓여서 달에 가 닿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무엇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은 그냥 하염없이 나를 질질 끌고 갔다. 너무 시간이 없어서 쩔쩔매는 친구들을 보면 내가 쓸 수 없어서 넘쳐나는 시간을 그들에게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리 바라는 것을 얻었다 한들 건강이 이 모양이 되었으미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나 하는 생각에 착잡해졌다. -56쪽

우리 인간은 다섯 가지 감각이 있고 길을 찾을 때는 주로 시각에 기대지만, 달팽이는 모든 것을 후각, 미각, 촉각, 세가지 감각에만 의존한다. 특히 후각이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달팽이는 완전히 귀머거리였다. 따라서 달팽이가 사는 곳은 침묵의 세계다. -71쪽

내 침대는 황량한 바다와도 같은 방 안에 외롭게 떠 있는 섬이었다. 그러나 나 말고도 전 세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많은 시골 마을과 도시에는 다치고 병들어 집 안에서만 틀어 박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의 공동체였다. 나는 비록 여기 침대에 누워 있지만 그들 모두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102쪽

생물학자 로만 비쉬니액은 연못의 물 한 방울에 사는 극히 작은 동물들이라도 그들 나름의 개성과 상호관계, 다툼이 있다는 사실에 언제나 경이로움을 느꼈다. 다른 종이나 동물 집단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어떤 종도 없지 않을까?-119-120쪽

잡아먹히기 쉬울 것 같아 보이는 달팽이의 느린 이동속도가 사실은 달팽이의 생존수단일지도 모른다. 포식자들은 대개 먹잇감이 되는 대상의 빠른 움직임을 포착해서 사냥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달팽이가 소리 없이 기어서 이동하는 것도 소리로 사냥감을 포착하는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135쪽

고립은 사람을 더욱더 깊이 병들게 한다. 그때 유일하게 존재를 규정하는 법칙은 불확실성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유일한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뿐이다. -151쪽

겨울 몇 달이 지나고 내가 달팽이를 관찰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지난봄, 내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달팽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움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달팽이를 지켜보는 일이 인내심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연 얼마만큼 몸이 회복되어야 달팽이의 세계에서 마음이 떠날까.-172쪽

어미 달팽이는 내게 가장 좋은 길동무였다. 녀석은 한 번도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나는 달팽이가 바뀐 환경에 적응하고 잘 견뎌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달팽이가 그저 묵묵히 미끄러지듯 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고 깨달음이었으며 아름다움이었다. 달팽이의 타고난 느린 걸음걸이와 고독한 삶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헤매던 나를 인간세계를 넘어선 더 큰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달팽이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 아주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 -180-181쪽

병 때문에 언제나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나 자신의 생존이나 내가 속한 종의 생존문제가 아니라 생명 자체가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임을 깨달았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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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 딸과 떠나는 여행시리즈 1
이용재 글.사진 / 디자인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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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스무 살 때 갈 길을 결정했고, 갈 것이고, 아무도 날 말릴 수 없다.
"딸, 갈 길 결정했니?"
"응, 아빠는 어떤 길 가는 거야?"
"어진 길."
"어진 길 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
"인문학 서적 독서."
"책만 읽으면 되는 거야?"
"문화유적 답사 병행."
"난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길 갈래."
"머라."-9쪽

자네도 잘 알겠지만
어떤 때는 지나치게 과욕을 부린 적도 있었지
하지만 그런 모든 일을 겪는 도중
의심이 생길 땐 전적으로 믿었다가도
딱 잘라 말하기도 서슴지 않았어
모든 것과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난 당당했고, 내 방식대로 해냈던 거야
사랑도 해봤고, 웃기도, 울기도 했었지
가질 만큼 가져도 봤고, 잃을 만큼 잃어도 봤지
이제, 눈물이 가신 뒤에 보니
모두 즐거운 추억일 뿐이야
내가 했던 모든 걸 생각하니
쑥스럽지만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
(중략)
항상 내 방식대로 해결했어
그래, 그건 나만의 방식이었어
나 역시 내가 결정한 방식이 있어서 그대로 따른 거야
때론 그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그 길을 따를까도 생각했었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했어-45쪽

식영정의 건립경위를 적은 [식영정기]를 보자. 석천 왈. 푸른 시내 위 차가운 소나무 아래에 이름 있는 좋은 터를 얻어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모퉁이마다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는 텅 비었으며 흰 띠로 덮고 대나무 자리로 둘렀으며, 바라보면 그림으로 장식한 배 위에 새가 날개를 펴고 앉아 있는 모양이다. 그대 장자의 말을 들었는가. 옛날에 그림자를 무서워한 사람이 있었다. 낮에 달려가는데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 역시 쉬지 않고 따라오는 것을 보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 역시 쉬지 않고 따라오다가 나무 그늘에 이르러서야 문득 보이지 않았다. 본래 그림자는 사람을 따라다니므로 사람이 엎드리면 그림자도 엎드리고, 사람이 쳐다보면 그림자도 쳐다보며, 가면 가고 쉬면 쉬는 것이 오직 물체를 따르므로 그늘에서나 밤에는 없어지고 불빛에서나 낮에는 생기게 되니 사람의 처세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옛 말대로 꿈과 그림자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조물주와 더불어 대지 위에 놀며 그림자마저 없도록 하여 사람이 바라보고 손으로 가리킬 수도 없게 함이니 이름을 식영이라 함은 또한 마땅치 않은가.-86쪽

딸을 '인문학적 아이'로 키우고 싶어서 시작한 여행이라고 들었다. 이용재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아이'는 어떤 사람인가?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는 아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재산은 독서임을 아는 아이. 부모에 대한 가장 큰 불효는 자살임을 아는 아이. 돈을 쫓아다니지 않고 덕을 베풀어 돈이 모여들게 하는 아이. 돈을 버는 이유는 좋은 일에 쓰기 위한 것임을 아는 아이. 인문학적 아이는 어떠한 고난과 좌절이 와도 남을 원망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헤쳐 나간다. -141쪽

'이병기 선생 묘.' 1969년 후학들은 전주 다가공원에 시비를 세우고 '시름'을 새겼다.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196쪽

한옥이 과연 현대 건축으로 가능한가?
"현대라는 시대에 맞게 한옥이 지어질 수 있다. 그게 호텔일 수도 있고 레스토랑일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 한옥이 진화할 수 있다고 본다. 한옥 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나도 '전통은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머릿속에 주입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직접 한옥 작업을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한옥은 스스로 건축으로, 특히 현대 건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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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과 도 - 울자, 때로는 너와 우리를 위해
윤미화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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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은 폭주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팽창 속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어차피 자본주의를 버릴 수 없다면 기업은 돈 버는 고민과 함께 사람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30쪽

외모 지상주의는 미모의 기준에 미달되는 여성들에게 박탈감을 제공한다. 물론, 이 기준은 우스꽝스럽게도 사회적 합의나 법률적 토대에 기댈 수 없다. 미모의 기준이란 정서와 문화라는 모호한 공작을 등에 업고 권력과 자본이 일방적으로 정한 경우다. 이 때문에 다수의 의견이 마치 정답처럼 판결을 받는데(미스코리아 대회 같은 미녀선발대회가 대표사례다) 그 틈새로 편견과 차별이라는 샛바람이 분다.(중략) 열등은 곧 미천한 것, 나쁜 것, 그래서 무시해도 되는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이다. -39쪽

'무한한 자유에 제공된 불안정한 고용형태와 낮은 임금, 건강과 안전에 대해 거의 전무한 규제, 무한한 자유'라는 표현은 다국적 기업을 정확히 짚은 말이다. 위법행위를 적발해도 국내법 적용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다국적 기업은 단기간에 고소득을 보장한다. 결과는 사냥당한 기업의 헐값 매수와 현지 경제의 파국이다.-45쪽

결국 학교와 사회에서 스펙을 추가하지 못한 계층은 쇠외될 뿐만 아니라 계속 착취당할 것이다. -68쪽

축제가 성공하려면 프랑스 대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자발적이어야 하고 미래 지향적이어야 하며 흥을 동반해야 한다. 굿판에서 엑스터시를 중요시하는 이유도 '자발적 공감과 교감'을 축제의 성공 포인트로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엑스터시가 사라진 축제는 축제가 아니라 전시(展示)다. 히틀러 광장과 5.16광장, 김일성 광장이 그렇고 보수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주최한 축제가 그렇다.-84쪽

어느새 내가 아닌 타인의 희생은 슬프지만 금방 안도하고 조용히 발길을 돌리는 나는 누구인가. '나를 대신해서 희생할 야만인'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나는 누구인가.-99쪽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의복이 아니라 유행 혹은 체면을 구입해 오고 있다. 대중은 이제 제품이 아니라 만족을, 의복에 내포된 의미를 구입한다." -113쪽

종자란 무엇인가. 종자는 한 톨의 밀이거나 쌀, 호박, 포도씨앗이다. 풍부한 과육과 풍성한 영양가, 뒤어난 향미를 가진 음식이 식욕을 돋우지만 그것은 작고 볼품없고 거칠고 울퉁불퉁한 씨앗으로부터 왔다. -148쪽

세상에 뒤쳐지는 것 같아 두려웠고 돈 없는 생활 역시 그랬다. 많은 시행착오와 갈등, 고독과 번민이 현실과 내면에서 동시에 분탕질을 치면서 차츰 익숙해졌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시골살이에서 얻을 것은 자연에의 경이와 자족이다. '낮은 태도와 작은 규모와 적은 소유'에 천천히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계절과 사람이 섞이고 순환하는 것을 배우고 현금이 없어도 텃밭에서 채소를 가져와 밥상을 차릴 수 있다. 한 송이 꽃이 힘들게 몸을 여는 과정도 지켜본다. 분투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을까. -162쪽

니어링 부부가 추구한 '존재지향적 삶'은 '쓰고 버리는 소비' 행위와 대척점에 있다. 존재지향적 삶은 '시장경제 의존도를 줄이고 여백의 시간을 즐기는 일'이다. 이러면 돈을 못 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유지향적이 아닌 존재지향적 삶을 염원하지만 가난은 두렵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돈은 '달콤한 드라큘라'다.-203쪽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아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204쪽

"진정한 사진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체험이 수반되어야 한다."-239쪽

"우리는 모든 것을 무릅쓰고 살아왔고, 또 삶이 허락한다면 앞으로도 살아갈 거야. 우린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아직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딱 한 가지 있단다. 그건 어떠한 외부의 힘이나 폭군의 탄압으로도 우리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것이지. 네가 사랑이라 부르고 나는 공감이라 부르는 것 말이다."-272-273쪽

마음이 마음을 고르고 마음이 마음에게 다가가는 것은 연애다. 책도 다르지 않다. (중략) 자갈길을 좀 걸어본 사람이 공감하는 '세월의 냄새' 같은 것. 세월의 냄새, 영혼의 관절염, 마음의 뼈,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러면 곽재구 시인 에세이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을 읽어야 한다. -298쪽

......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를 알고 있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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