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우리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불어넣지만 질병은 놀랍게도 그러한 확실성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다.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순간순간을 참고 이겨내는 것이 다였다. -20쪽
대개 생존은 특정한 목표, 관계, 믿음, 또는 가능성의 언저리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희망 같은 것에 의존한다. 혹은 그것들보다 더욱 덧없는 어떤 것, 어쩌면 뚫고 지나갈 수 없을 것처엄 보이는 단단한 유리창을 통과해서 담요를 따뜻하게 덥히는 햇살,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두터운 담벼락 너머로 커다랗게 들리는 바람소리 같은 것 덕분에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지도 모른다.-29-30쪽
시간이 많으면 많은 대로, 반대로 시간이 적으면 적은 대로 우리는 시간의 인질이다. 사람에 따라 하루에 몇 분, 혹은 몇 시간을 더 살거나 덜 살 수는 없다. 모두 똑같은 시간을 산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병이 난 뒤로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아서 그야말로 시간 속에 파묻혀 있다고 느꼈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은 산처럼 쌓여서 달에 가 닿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무엇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은 그냥 하염없이 나를 질질 끌고 갔다. 너무 시간이 없어서 쩔쩔매는 친구들을 보면 내가 쓸 수 없어서 넘쳐나는 시간을 그들에게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리 바라는 것을 얻었다 한들 건강이 이 모양이 되었으미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나 하는 생각에 착잡해졌다. -56쪽
우리 인간은 다섯 가지 감각이 있고 길을 찾을 때는 주로 시각에 기대지만, 달팽이는 모든 것을 후각, 미각, 촉각, 세가지 감각에만 의존한다. 특히 후각이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달팽이는 완전히 귀머거리였다. 따라서 달팽이가 사는 곳은 침묵의 세계다. -71쪽
내 침대는 황량한 바다와도 같은 방 안에 외롭게 떠 있는 섬이었다. 그러나 나 말고도 전 세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많은 시골 마을과 도시에는 다치고 병들어 집 안에서만 틀어 박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의 공동체였다. 나는 비록 여기 침대에 누워 있지만 그들 모두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102쪽
생물학자 로만 비쉬니액은 연못의 물 한 방울에 사는 극히 작은 동물들이라도 그들 나름의 개성과 상호관계, 다툼이 있다는 사실에 언제나 경이로움을 느꼈다. 다른 종이나 동물 집단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어떤 종도 없지 않을까?-119-120쪽
잡아먹히기 쉬울 것 같아 보이는 달팽이의 느린 이동속도가 사실은 달팽이의 생존수단일지도 모른다. 포식자들은 대개 먹잇감이 되는 대상의 빠른 움직임을 포착해서 사냥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달팽이가 소리 없이 기어서 이동하는 것도 소리로 사냥감을 포착하는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135쪽
고립은 사람을 더욱더 깊이 병들게 한다. 그때 유일하게 존재를 규정하는 법칙은 불확실성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유일한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뿐이다. -151쪽
겨울 몇 달이 지나고 내가 달팽이를 관찰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지난봄, 내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달팽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움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달팽이를 지켜보는 일이 인내심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연 얼마만큼 몸이 회복되어야 달팽이의 세계에서 마음이 떠날까.-172쪽
어미 달팽이는 내게 가장 좋은 길동무였다. 녀석은 한 번도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나는 달팽이가 바뀐 환경에 적응하고 잘 견뎌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달팽이가 그저 묵묵히 미끄러지듯 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고 깨달음이었으며 아름다움이었다. 달팽이의 타고난 느린 걸음걸이와 고독한 삶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헤매던 나를 인간세계를 넘어선 더 큰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달팽이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 아주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 -180-181쪽
병 때문에 언제나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나 자신의 생존이나 내가 속한 종의 생존문제가 아니라 생명 자체가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임을 깨달았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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