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의 인간론. 결혼은 연애의 업보이고, 자식은 부모의 업보이며, 설저지는 취식의 업보입니다. 설거짓거리는 취식의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얼마나 깔끔하게 혹은 게걸스럽게 먹었느냐가 고스란히 설거짓거리에 반영됩니다. 사실 인간 자체가 설거짓거리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의 육쳋는 땀과 침과 피지를 분비하고, 각질과 군살을 만들어냅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타성, 나쁜 습관, 부질없는 권력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면에서 성장과 노화란 곧 썩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설거지 없이 깔끔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중략) 끝으로 가장 중요한 한마디, 모든 설거지는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41-42쪽)
과연 어떤 기준으로 지나온 학창 생활을 평가할 것인가? 학교 졸업 후 얼마나 높은 연봉의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현실 사회에서 타인과 사는 일의 고통과 영광을 얼마나 잘 겪을 마음의 준비, 즉 정치적 덕성political virtue을 습득했느냐는 것입니다. 즉 얼마나 성숙한 정치 주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졸업생들이 염두에 둘 만한 평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114-115쪽)
파국을 넘어, 사회적 삶은 의외로 오래 지속된다. 사회적 삶이 지속되는 동안은 공적인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역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는 사회에 대해 죽음이 삶에 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137쪽)
탄액 여부를 숙고하는 일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의 사안이 아니라, 우리가 헌법을 가진 존재라는 일을 상기하는 일이다. 우리가 각자도생하며 사적 이해 추구에만 골몰하는 유글레나가 아니라, 공적 삶을 위한 일정한 가치에 합의한 바 있고, 그 가치를 심각하게 배반했다고 판명되는 경우에는 가장 힘센 권력자마저도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아이돌 숭배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보다 확장되고 고양된 삶을 살게 한다. (164쪽)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 있다. 모든 이야기들이 결말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듯이, 인생의 의미도 죽으므이 방식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 결말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동안 진행되어온 사태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서 산다"는 말의 의미다.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삶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 (중략) 비록 우리의 탄생은 우연에 의해 씨 뿌려져 태어난 존재일지언정, 우리의 죽음은 그 존재를 돌보고자 한 일생 동안의 지난한 노력이 만들어온 이야기의 결말이다. (175쪽)
정치는 구분에서 출발한다. 구분을 지음에 의해 비로소 복수의 단위들이 생겨나고, 복수의 단위들이 존재할 때 비로소 관계가 존재한다. 그 관계가 특유한 정치의 역학을 만든다. 그렇다면 오늘날 정치의 중요한 과제는, 앙상해진 도덕적 진정성에 너무 의지하지 않으면서 그 구분을 재정의하는 일이다. (222-223쪽)
근대가 만든 강력한 판타지 중의 하나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그 자체로서는 오리무중인 어떤 것, 가치와 의미가 박탈된 어떤 돌덩어리 같은 것이라는 이미지다. 근대 과학적 사유에 깃들어 있는 가치화 사실 간의 과격한 자연주의적 분리나, 가치는 세계나 우리 본성에 내재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는 사회과학의 구성주의적 입장이나 모두 일단 그러한 세계의 이미지에서 암묵적으로 출발하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아마도 한국 영화사상 가장 효과적으로 그러한 근대적 이미지를 환기하고 있다. (중략) 그런데 홍상수 영화는 기존의 가치를 냉소하는 반면 아무런 대안적 가치를 이야기할 의사가 없다는 점에서, 근대가 도달한 참으로 황폐한 그 저지대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272-273쪽)
이처럼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대상을 장악하게끔 해준다. 하지만 한니발에게 지식은 단지 대상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지식을 통해 뭇 대상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데까지 이른 사람이다. 그렇다. 지식이 지식의 소유자에게 가져다조는 보다 깊은 신비는 바로 지식이 그와 대상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한니발이 지식을 매개로 맺은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는 그의 식인행위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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